제70화
수호령 덕분에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낀 임선유는 얼마간 더 덕진 공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바로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내가 미쳤지.’
그리고 잠깐 후회했다. 몇 시간 뒤면 출근해야 하니까. 이성적으로 따지면 다시 억지로라도 잠을 자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덕진 공원으로 향한 건 이성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신한 뒤 널뛰는 호르몬. 그래서 때때로, 아니, 요새는 꽤 자주 임선유는 감성적으로 되었다. 덕진 공원에 간 것도 그 탓이다. 그러나 임선유는 자고 일어난 뒤 의아함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뭐지?’
너무 개운했다.
아침에 상쾌함을 느낀 건 얼마 만인가. 고작 몇 시간 잤을 뿐인데.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임신한 이래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그래서 출근한 뒤에 동료들에게 무척 밝게 인사할 수 있었다.
“임 간,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
“선생님.”
“그래, 웃으니 보기 좋네. 요새 얼굴이 엄청 그늘져 있었잖아.”
“잠을 푹 자서요.”
“그래, 잠은 푹 자야지. 슬슬 배도 많이 불러 오는 모양이던데 몸조심하고.”
“네.”
덕진 공원에 다녀와서이려나. 그래서 스트레스가 풀린 것 같은데. 하기야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 아니던가. 일전 유산한 이유도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퇴근하고 들려 볼까.’
그래도 사람이 많은 시간은 피하고 싶은데.
* * *
그 무렵, 수호령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제대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들 한 생명을 구하는 데 힘을 적잖이 쓴 탓이다.
‘라면은 나 일어나서 같이 먹어!’
임선유가 사라진 뒤 낙원에 도착하자마자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수호령은 바로 잠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코까지 골아 가면서. 그 모습에 개구리가 은후에게 물었다.
“수호령에게 무슨 일 있었어?”
“있었지.”
은후가 짤막하게 수호령이 한 생명을 구한 일에 관해 설명했다.
“우리 령이 너무 착하다니까.”
“근본이 그러하니까.”
은후가 개구리의 말에 동조하며 수호령을 지그시 바라봤다.
‘성장인가.’
잠에 곧바로 빠진 이유는 힘을 쓴 것도 있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완전히 어린아이.’
그러니까 아기, 심지어 아직 엄마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한 건 수호령이 처음 겪는 일일 것이다. 그건 수호령이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터. 물론 그전에 쌓아 놓은 것들이 없었다면 그럴 수 없었겠지만.
은후와 개구리를 비롯하여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은후 덕분에 충분한 마나를 공급받고, 최근에는 천도복숭아 나무와 밀접하게 이어지기까지 했으니.
‘성장은 이름을 지어 주며 천도복숭아 나무와 직접 연결된 이후라고 여겼는데.’
천도복숭아 나무가 덕진 공원에 뿌리를 내렸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수호령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었기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기분 좋은 오산이네.’
수호령의 선한 일에 서연후도 성호도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때 개구리가 은후에게 말했다.
“아, 맞다. 도깨비와 구미호 부부 말이야.”
“어.”
“낙원으로 한번 놀러 오고 싶다던데. 비가 그치기 전에, 아니면 나중에 비가 오는 날에. 아까 심심해서 놀러 갔다가 은후 도령 허락을 받아 달라고 부탁받았어. 오두막을 지었다고 자랑하니까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건 굳이 내 허락을 맡을 필요가 없는데.”
“에이, 그래도 낙원의 주인은 은후 도령이니까.”
은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해. 두 분은 낙원의 주민이 되기로 했으니까. 게다가 네가 아니면 그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데리고 온다?”
개구리가 사람 형상에서 본 모습으로 돌아간 뒤 폴짝폴짝 뛰어 벽진 폭포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개구리와 함께 도깨비 구미호 부부가 나타났다.
“오우.”
낙원에 나타난 도깨비가 호탕하게 웃으며 감탄했다.
“거, 엄청 큰 집이구만!”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오두막 바깥에서도 우렁차게 들렸다. 그에 개구리가 도깨비를 나무랐다.
“우리 령이 자고 있어서 조용히 해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아.”
도깨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딱히 악의가 있는 건 아니고 단순한 실수였다. 수호령도 잠에서 깨지 않고 뒤척이기만 했을 뿐이기에 개구리가 딱 한마디만 말했다.
“다음부터 조심해 주세요.”
“알겠으이.”
도깨비가 쭈구리가 되어 조용히 오두막에 들어갔다. 그리고 쓱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에 구미호가 속으로 혀를 차며 은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그래도 이이가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에요.”
“압니다. 사과도 하셨고요.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구미호가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도깨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거나 꺼내 봐요.”
“음.”
도깨비가 자신의 보따리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집들이 선물이우.”
하얀 호랑이 가죽이었다, 제대로 무두질이 된.
“깔개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 물 건너 말로는 카펫이라고 하던가?”
“멋지네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호랑이 카펫에 성호가 적잖이 놀라며 조심스레 기타를 매만졌다. 그리고 수호령을 바라본 뒤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후 은후를 제외한 이들은 침묵 속에 저마다 적당히 휴식을 취했다. 은후의 경우엔 혹시 몰라 수호령을 집중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침 해가 떴다.
“으움.”
수호령도 눈을 떴다.
“은후?”
일어나자마자 보인 건 은후의 얼굴. 그에 수호령이 손을 쫙 뻗었다. 은후가 픽 웃으며 손을 잡아 주었다.
“하암, 졸려어.”
“좀 더 자도 돼.”
“으응. 아니, 아침 먹어야지. 라며언.”
“그럴까?”
“먹고 잤어야 했는데에.”
말이 늘어지는 걸 보아하니 아직 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으우우으으. 뭔가 몸이 이상해.”
그야 그럴 수밖에.
성장했으니까. 마나도, 신체도.
정령의 성장은 계단식이니.
‘본인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적응하는 건 금방이리라.
그렇게 수호령이 몸을 뒤척이다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어?”
호랑이 가죽이 바닥에 깔려 있는 걸 본 것.
“호랑이?!”
“도깨비 삼촌이 선물로 줬어.”
“와!”
“큼큼.”
수호령이 기뻐하는 모습에 도깨비가 헛기침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옆에 있던 구미호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령이 눈빛을 반짝이며 연신 호랑이 카펫을 만지작거리며 구경했다.
“부들부들해!”
게다가 멋도 있었다.
하얀 가죽이어서 다소 어울리지 않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뭐.’
저렇게 좋아하면 됐나.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오두막을 벗어났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리어카에서 저번에 삼계탕을 먹을 때 썼던 큰 냄비와 새벽에 사 두었던 라면 봉지를 꺼냈다.
‘오늘은 마법으로 요리할까?’
고작 라면을 끓이는 데 숯에 불을 붙이기는 번거로웠으니까. 휴대용 버너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사 두지 않았다.
‘다음에 휴대용 요리 도구들도 좀 사 둬야겠어.’
마나를 움직여 허공에 불을 일으키고 그 위에 냄비를 띄우고 생수를 부은 뒤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어느새 오두막에서 벗어난 주민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봤다.
“와와! 뭐 하고 있는 거야?!”
“요리.”
수호령이 눈빛을 반짝이며 은후가 요리하는 걸 구경했다. 라면을 끓이는 것이니 요리라고 부르기도 뭐 했지만.
“저 정도면 예술이네요.”
“그러니까 말이여.”
조선시대 도깨비와 구미호가 바라보기엔 유명한 괴짜 도사가 하는 짓과 비슷해 보여서 참으로 신기했다.
“이곳도 그렇죠.”
“천도복숭아 나무 때문에 그렇겄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빗방울은 낙원의 땅을 적시지 못했다. 그렇다고 비가 내리지 않은 건 또 아니었다. 비가 낙원에도 내리고 있지만 그대로 통과해 버린다고 해야 할까.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단순한 비는 3차원의 물질이었다. 그러니 4차원에 걸쳐 있는 낙원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관측은 가능했으며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건 사실이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건 참 기묘했다.
신비했고, 또 아련하기도 한 느낌이었다.
빗소리 때문에.
“그나저나 라면인가?”
“그러게요. 당신, 마늘 좀 있어요?”
“오늘은 가져온 재료 없제.”
“마늘 좀 넣으면 더 맛있을 텐데.”
구미호가 아쉬운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래도 맛있을 거 같네요.”
“흐흐, 그체. 운치 있는 장소니께. 이런 곳에서 먹는 음식이 맛없는 게 이상하제.”
순수한 맛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먹느냐도 참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도 함께하는 이도 무조건 합격 이상이었다.
“밤이었으면 더 좋았을 턴디.”
도깨비에게 있어서 시간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맛있는 냄새!”
“밥은 안 해?”
그 정도야 뭐.
“그런데 우리 몫도 있을까요?”
“응?”
그러게.
미리 약속을 잡고 온 것이 아닌데.
“그, 그래도 몇 젓가락은 나눠 주지 않을까? 은후 도령이 그리 배려 없는 사람이 아닌디. 령이도 그렇고.”
다소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나름 작게 말한다고 말했지만, 도깨비 구미호 부부의 대화를 은후는 전부 듣고 있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며 수호령에게 말했다.
“면이 슬슬 다 익은 것 같은데, 삼촌이랑 이모 불러 올래?”
“응!”
수호령이 냉큼 도깨비와 구미호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이모! 삼촌! 라면 먹자!”
도깨비의 식성을 고려하면 양이 꽤 모자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밥을 말아 먹으면 되니까. 혹시 몰라 리어카에 햇반을 어느 정도 쟁여 둬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귀찮음을 감수하고 편의점에 다녀와야 했을 터.
은후가 수호령을 시작으로 라면을 종이컵에 담아 나누어 주었다. 리어카에는 납작한 접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리어카에 적당한 그릇도 가져다 둬야겠다 싶었다.
“매, 매워. 그런데 맛있다.”
수호령이 살짝 눈물을 글썽이며 라면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후후, 뜨거워 죽겠구마.”
“그래도 맛있잖아요?”
“글체.”
“그럼 조용히 먹자구요. 그나저나 차라리 뜨거워서 다행이네요. 아니었으면 한 젓가락에 사라졌을 텐데.”
“임자도. 여기서 날 구박해야겄어?”
“흥.”
“아니, 또 뭐 때매 삐졌디야.”
도깨비는 고양이 혀였구나.
쓰잘머리 없는 사실을 하나 알았다.
“뇸뇸.”
개구리는 사람의 형상이 아닌 본 모습으로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워 은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개구리가 라면을 먹어도 되나 싶기는 했지만.
‘애초에 개구리라고 부르기도 뭐 하니.’
사달이 날 거면 다른 음식을 먹을 때 진즉 났을 것이고.
‘음?’
다들 맛있게 라면을 먹고 있는 사이, 루비가 애처롭게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은후가 루비를 불렀다.
“루비야, 이리 온.”
그리고 리어카에 쟁여 두었던 커다란 개 껌을 꺼내어 주었다.
“왕!”
루비가 크게 짖으며 개 껌을 입에 물은 뒤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때 수호령이 라면을 냄비에서 젓가락으로 덜어 가며 은후에게 다가와 말했다.
“은후는 안 먹어?”
“나도 먹어야지.”
은후가 웃으며 자신의 몫을 챙겼다. 그리고 한 젓가락 입에 가져다 대었다.
‘정말 맛있네.’
면도, 뜨거운 국물도.
고작 라면인데.
어느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