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며칠 후 새벽 3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이윽고 셀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은후가 머무는 자취방 창문이 흔들렸다. 수많은 빗방울이 자신을 알아 달라고 외치는 것처럼 소리도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에는 분명히 해가 뜬 이후부터라고 표시되어 있었는데.
‘하기야 현대의 기술로는 아직 완벽히 날씨를 예측하는 건 힘든 일이니.’
은후가 조용히 눈을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약간의 서늘한 공기와 이불의 따뜻함에 취해 다시 잠들려고 해도 내키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 산책하자고 했던 수호령과의 약속이 떠올라서였을 터.
‘저녁에나 나가 볼까 했는데.’
이 시간도 나쁘진 않으려나.
오히려 수호령에게는 더 마음이 편하지 싶었다. 이런 시간이라면 사람도 없을 시간이니.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은후는 몸을 일으켜 마법으로 몸을 씻어 내고 옷을 걸쳤다.
자취방 문 입구에 기대 있는 우산을 집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갑자기 우산 요괴가 떠올라서. 그리고 다시 우산을 내려놓은 후 자취방을 나섰다.
그냥 왠지 모르게 비를 맞고 싶어서. 그래서 따로 마법도 쓰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걸었음에도 몸이 흠뻑 젖었다. 머리카락에 방울방울 물방울이 맺혔다.
“은후…… 어? 왜 비 맞고 있어?”
덕진 공원에 도착하자 언제나처럼 수호령이 마중 나왔다.
“그냥 왠지 그러고 싶어서.”
“으응, 그런 날이 있지.”
착 가라앉은 은후의 기분이 다소 풀렸다. 뒤에서 눈치 보고 있던 개구리가 슬쩍 앞으로 나서며 은후에게 인사했다.
“은후 도령 오셨구려.”
“그놈의 도령 타령은.”
“나도 나도 오랜만에 비를 맞을까나.”
“그러다 감기 걸린다?”
“귀신은 감기 안 걸리는걸.”
본능적으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수호령은 비가 오는 날이면 대부분 얇은 막을 몸에 둘렀다. 그래서 비를 비끼게끔 했지만 은후의 모습을 바라보고선 비를 맞고 싶어졌다.
“그럼 가 볼까?”
“어디를?”
“산책. 덕진 공원 밖으로.”
“으, 으응.”
천도복숭아 나무 덕분에 쓸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늘어났고, 자연스레 범위도 커졌다. 그걸 수호령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좀 망설여졌다.
혹여라도 덕진 공원에 아이가 와서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쩔까. 그런 걱정이 본능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 시간에 아이가 오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걸. 그리고 오더라도, 와서 사고가 나더라도 자신이 막을 수 있다는 걸. 그럼에도 불안감이 드는 건 처음이라.
“개구리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같이 못 가는 건 아쉽지만.”
은후의 응원과 개구리라는 보험에 수호령이 조심스레 덕진 공원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조금씩.
조금씩.
“나, 편의점에 가 보고 싶어.”
“그럴까?”
덕진 공원 정문에서 다소 떨어진 편의점. 이전 비가 오는 날 산책했을 때 바라만 봤던 곳.
“가자.”
“응.”
은후가 수호령의 손을 잡고 편의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 주위를 살핀 뒤 전 마나를 움직여 자신과 수호령의 몸에 있던 물기를 제거했다.
딸랑.
문을 열면서 나는 종소리.
“오오오오.”
그 소리에 수호령의 눈이 반짝였다.
“밝아!”
우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는 일상이 되어 버린 편의점. 그 편의점이 수호령에게 있어선 너무 신기한 곳이었다.
“이게 볼펜이구나.”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볼펜이라든가.
“과자도 엄청 많네.”
은후가 몇 번 사다 주기는 했지만 미처 못 봤던 과자 봉지들이라던가.
“라면! 이게 라면이지?”
그러고 보니 수호령과 라면을 먹은 적은 없구나. 아침으로는 라면을 먹을까 싶어서 은후가 수호령에게 물었다.
“이따가 라면 끓여 먹을까?”
“응응.”
“한번 골라 봐.”
“무슨 라면을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나려나아.”
수호령의 농담에 은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퍽 진지하게 라면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는 수호령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요거!”
고심 끝에 수호령이 집은 건 신라면이었다.
“신라면은 나도 몇 번 들어 봐서, 한 번은 먹어 보고 싶었어.”
은후가 신라면 다섯 봉지를 집었다. 시바견 루비를 제외한 낙원의 주민들 수를 고려해서 각 한 봉씩. 그에 수호령이 은후에게 물었다.
“루비 건?”
“개에겐 라면은 주면 안 되거든.”
아주 소량이라면 모르겠지만.
“라면에 소금이 엄청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개의 소화기관에 무리가 갈 확률이 커.”
그 외에도 초콜릿이나 양파 등. 개에게 줘서 안 되는 음식에 관해 은후가 수호령에게 설명했다.
“우유도 주면 안 되는 거였구나. 생각 외로 조심해야 할 게 많네.”
“나중에 죽은 뒤 정령이 된다면 상관없겠지만.”
“루비가?”
“그렇지. 성호 때문이라도 그럴 거야.”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은후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성호와도 이야기해 봐야 하는 부분이고. 최종 결정은 루비의 의사에 맡기겠지만.’
은후는 라면과 함께 우산도 하나 같이 계산하려 했다. 계속해서 비를 맞으며 거니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우산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 이유는 은후가 우산에 비가 떨어지며 튈 때 발생하는 소리를 꽤 좋아했기 때문이다. 적당히 쏟아질 때를 제일 선호하지만 오늘처럼 거센 소리가 나는 비도 나쁘지 않았다.
“나도 우산 쓸래!”
수호령의 말에 은후가 우산을 두 개 집었다. 그리고 계산하려 하자 아르바이트생이 은후에게 물었다.
“우산 두 개 맞으세요?”
“네.”
“1+1 행사하는 우산도 있거든요.”
“괜찮습니다.”
호의.
이유는 얼굴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은후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리 내키지 않는 그런 느낌. 은후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편의점을 빠져나오며 방금 산 우산 중 하나에 은폐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수호령에게 건넸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 가 보고 싶다고 그랬지?”
“응응.”
은후가 우산을 폈다.
수호령도 우산을 폈다.
그리고 전북대학교 구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는 길엔 원룸과 조그마한 몇몇 가게가 있었다. 꽃을 파는 데도 있었고 이런저런 소품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수호령은 그런 가게를 하나하나 지나치지 않고 열심히 구경했다. 비록 문을 닫고 있어서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또 어두워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건 뭘까?”
굳이 답을 구하지 않은 질문을 하며 신나 하는 걸 보아하니 그것만으로도 재밌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전북대학교 구 정문에 도착했다.
비가 거세게 내리는 애매한 시간이었음에도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 술에 취한 듯했다. 수호령은 그 광경에도 눈빛을 반짝였다.
“다들 뭔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아.”
“술을 취해서 그런 것 같은데.”
“술, 나도 마셔 보고 싶은데.”
“아직 어려.”
“치이.”
수호령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한 모금도 안 돼?”
은후는 대답 없이 우산을 접으며 쪼그린 뒤 수호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호령은 그런 은후의 손길에 금세 기분이 풀렸다가 흠칫했다.
‘궁금한데.’
매번 이런 식이었다.
‘으.’
나는 언젠가 클 수 있으려나.
‘힘들 것 같은데.’
인간이 아니니까.
‘나중에 개구리한테 슬쩍 부탁해 볼까.’
맛이 참 궁금한데.
중구난방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가던 수호령이 정신을 차린 건 잠시 뒤였다. 은후가 자신의 우산을 리어카에 집어넣은 뒤 수호령의 우산을 가져온 것.
“어?”
“좀 더 둘러봐야지?”
은후가 수호령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학교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호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후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때 큰 소리로 누군가가 길에서 외쳤다.
“라면 먹을래! 비 오는 날에는 라면이지!”
“야, 이 미친놈아! 안 닥쳐!”
“라면! 라면!”
“하.”
누군가 술주정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수호령이 잠깐 고민하다 은후에게 말했다.
“다음에.”
“응?”
“이 안쪽은 다음에 올래. 나도 라면 먹고 싶어.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내가 도와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온 것 같아서.”
“덕진 공원에?”
“응.”
왠지 모르게, 라.
긴가민가하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수호령이 덕진 공원에서 하는 일은 전부 물리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다. 아이가 넘어질 것 같아서, 아이가 물에 빠질 것 같아서 등. 그래서 명확했는데 이번엔 아닌 모양이었다.
“빨리 가야 할 것 같아?”
“그건 아니구. 으으, 갑갑해.”
수호령이 은후의 손을 놓고 통통 튀어 나갔다. 그리고 쪼르르 덕진 공원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얼마 가지 않고 다시 돌아와 은후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빨리!”
은후가 피식 웃고 수호령의 보조에 맞추어 뛰었다.
* * *
전북대학교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임선유는 갑갑한 마음에 덕진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갈까 고민했다. 새벽임을 확인하고 다시 잠들고자 했음에도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서.
그 이유는 아마 임신 때문이리라. 원했던 임신이었고 고대한 만큼 기대도 컸으나 불안감은 그 이상이었다. 그 이유는 남편이 피치 못할 출장으로 집에 없어서이지 않을까 싶었다.
임선유는 거세게 내리는 비를 보고 망설이긴 했으나 결국 우산을 쓰고 덕진 공원으로 나왔다.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은 적적함과 귀를 가득 메우는 빗소리가 답답함을 다소 지워 주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진짜로 잘 낳아야 할 텐데.’
몇 년 전, 계획에 없던 임신을 했었다. 문제는 임신 순번제. 다른 간호사와 상의 및 협의 후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임신 및 출산을 하는 일. 직종이 간호사였기에 겪게 된 폐단.
처음에는 임신 순번제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일하다 보니 알았다. 한 명만 빠져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너무 바쁘다는 걸. 간호사가 하는 일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거 외로 정말 많았다.
같이 일하던 동료 간호사 한 명이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뒤 퇴사. 그때 임신 순번제가 왜 생기게 되었는지 임선유는 뼈저리게 느꼈다.
아파도 못 쉬고, 휴가는 당연히 꿈도 꿀 수 없고.
자연스레 욕이 나오고 그 사람이 미워졌더라.
‘좋은 생각, 좋은 생각.’
다행히 임선유는 첫 임신 때 운이 좋았다. 원래 임신 순번이었던 친한 선배가 양보해 준 것. 그러나 뒷말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쟤가 나이트(밤 근무)를 못 해 내 근무표가 망했다느니, 쟤 때문에 휴가가 잘렸다느니. 그로부터 비롯된 스트레스에 결국 유산했다. 그 경험 때문에 임선유는 불안했다.
‘이번에는 꼭.’
그런 임선유를 수호령과 모습을 감춘 은후가 바라봤다.
“저 사람이야?”
“으응.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도와줘야 할 것 같아. 그대로 내버려 두면 태어나지 못하고 사라질 것 같거든.”
수호령이 조심스레 임선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임선유의 배에 손을 조심스레 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
임선유가 흠칫했다.
‘뭐지?’
뭔가 갑자기 좀 더 따뜻해진 것 같은데.
기분도 좀 더 나아진 것 같고.
‘오길 잘했다.’
만삭이 되기 전에 한 번 더 올까.
그때는 남편과 함께 맑은 날에.
‘나중에 얘가 좀 크면 나들이도 오면 좋겠고.’
수호령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임선유를 잠깐 바라본 뒤 은후에게 달려왔다.
“나, 잘했지?”
“그럼.”
은후가 빙그레 웃었다.
점점 줄어드는 빗방울 소리가 유독 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