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이튿날, 박하나가 개운한 표정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꿈?’
박하나가 핸드폰을 열었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데.’
만났던 사람의 인상이 흐릿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마셨던 맥주의 목 넘김도, 자신을 위로해 주었던 기타 소리도 선명했다.
‘아.’
있었다, 통화 기록이.
‘꿈이 아니었구나.’
뭔가 안도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덕진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어제가 마치 꿈 같았으니까. 일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를 꿈에서 만났던 것처럼.
박하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고 시리얼 봉지를 집고.
‘맛있네.’
기계적으로 먹었던 근래와 달랐다.
‘햇살도 좋은 것 같고.’
커튼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빛.
박하나는 오랜만에 커튼을 걷었다. 그리고 마저 식사한 후 양치를 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그런지 샤워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박하나가 예전과 다르게 기분 좋은 하루를 맞이하고 있던 시간, 은후는 수업이 늦게 있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이르게 학교를 찾았다. 담당 교수 강장원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는 강장원 교수의 연구실. 은후가 연구실 앞에서 가볍게 노크하자 문이 열렸다. 강장원 교수가 문을 연 것. 강장원 교수가 은후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은후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가져온 선물을 내밀었다.
“뭔가요?”
“선물입니다.”
소위 김영란 법이라 불리는 청탁금지법이 제안된 건 2012년. 실제로 시행은 2016년이었기에 이렇게 교수에게 선물을 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강장원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후의 선물을 고맙게 받았다.
“뭘 이런걸.”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숙취 해소나 숙면에 좋은 술이라서요.”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에 강장원 교수가 은후에게 질문하려다가 멈칫했다. 며칠 전 교수들의 술자리에서 특별한 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 잔만 마셔도 숙면을 취할 수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해장이 되는 술이 있다는 말을.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했던 것 같았다. 가격도 엄청 비싸고.
“귀한 술이군요.”
강장원 교수도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기에 은후가 가져온 술에 관한 호기심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흥미가 가는 건 은후의 논문이었다. 그래서 은후의 선물을 조심스레 치워 둔 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은후 군의 논문을 읽고 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어요.”
나름대로 깨어 있는 지식인이라고 자부했는데, 오만이었다.
“감사합니다.”
“전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입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보조적인 선에서 그칠 거예요. 아마 제가 조금만 나쁜 사람이었다면 은후 군 논문, 홀라당 먹어 치웠을 겁니다.”
강장원 교수의 말은 반은 농담이었으나, 반은 진담이었다.
‘다른 심리학과 교수였다면 그랬을 수도.’
홀라당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어떻게든 한발 걸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혹은 주 저자를 본인의 이름으로 올리고자 이런저런 회유와 압박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실제 벌어졌다면 그대로 내버려 두진 않았겠지만. 물론 사전부터 그럴 소지를 없애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은후가 강장원 교수를 선택한 것이다. 담당 교수였기에 명분도 확실했고.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강장원 교수가 주섬주섬 자신이 따로 준비한 논문을 은후에게 내밀었다.
“일단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논문부터 가볍게 살펴봐 주었으면 좋겠군요.”
* * *
강장원 교수와 이야기는 꽤 즐거웠다. 학구적인 코드가 꽤 맞아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강장원 교수는 은후를 자신이 가르쳐야 할 학생으로 보지 않았다.
대등한 입장에서.
나이 차이는 물론 쌓아 올린 업적을 고려하면 강장원의 배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은후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고 경청했다.
‘그런 대화는 참 오랜만이었어.’
서로 간에 치열하면서도 건전한 토론. 그 방향성은 논문의 완성도를 높여 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화를 지켜보던 조용히 지켜보았던 성호가 말을 걸었다.
“이제 끝난 겁니까?”
“네, 아쉽지만 교수님도 일정이 있으시고 저도 수업이 있으니까요.”
성호와 일찍부터 함께하고 있는 이유는 오늘이 승마 실습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위해 연주하고 싶다던 성호의 부탁을 오늘 들어주고자 했다.
“그나저나 꽤 수준급 토론이라고 생각했는데, 음악적 영감은 안 떠올랐나요?”
은후의 농담에 성호가 반쯤 진지하게 대답했다.
“한국말인데도 거의 알아듣지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두 분이 무척 열정적이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분위기랄까. 어젯밤처럼 퍼뜩 영감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언젠가 도움이 되겠죠.”
은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차를 사긴 사야겠는데.’
돈도 있고 면허도 있었다.
‘크게 불편한 건 없지만.’
버스에 탈까 하다 택시를 잡으며 은후가 결심했다.
‘내친김에 오늘 바로 적당한 거로 하나 사자.’
차가 있고 없고 차이는 꽤 컸다.
“은후 학생, 왔어요?”
전주 승마장에 도착하자 직원이 은후를 반겨 주었다. 은후는 현재 전주 승마장에서 인기인이었다. 잘생긴 얼굴은 물론, 스타더스트가 유일하게 자신의 등에 태운 사람이었으니까.
하물며 스타더스트와 함께 달릴 때의 모습은 모두에게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또 처음 스타더스트의 폭주로 인하여 큰 사고를 막아 주기도 했고 말이다.
“저어.”
은후가 직원과 가볍게 잡담을 나눈 후 마구간으로 향하려 할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
“은후 선배님 맞으시죠?”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도희라고 해요.”
“그런데요?”
“그, 감사하다는 말을 저번에 못 드려서요.”
“감사요?”
은후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
스타더스트가 처음 날뛰었을 때. 자신의 옆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은 학생이었다.
“별거 아니었어요.”
“아니요. 선배님 아니었으면 아마 저 크게 다쳤을 거예요. 좀 더 일찍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없죠.”
“그래도요.”
고집스러운 눈동자에 은후는 픽 웃고 말았다.
“저어, 말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나중에 친해지면 놓을게요. 그나저나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수업까진 시간이 꽤 남았는데요.”
“저번 일을 계기로 좀 더 진지하게 말을 배워 보고 싶어서요.”
“좋은 자세네요.”
은후가 빙그레 웃었다. 보통 사람에겐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하물며 어린 학생이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김도희는 그 사건을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이후 소소한 잡담을 이어 갔다. 은후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살짝 확인하고 김도희에게 양해를 구했다.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다고. 김도희는 은후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명분이 없어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와요”
마구간에 들어가자 스타더스트의 전담 직원이 은후에게 인사했다.
“스타더스트 보러 왔어요?”
“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은후 학생 부탁이라면 어지간한 건 뭐. 아, 그렇다고 보증은 안 됩니다?”
“스타더스트는 보증이라도 서 줄걸요?”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직원의 너스레에 은후는 농담으로 받은 후 스타더스트에게 향하며 말했다.
“여기서 기타 연주를 좀 하고 싶은데요.”
“뒤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어서 뭔가 했더니 기타 케이스였나 보네요. 그런데 여기서 기타 연주를요?”
“네, 말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거든요.”
“스트레스를 풀어 주기 위한 연주를 하시겠단 말씀이세요?”
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타더스트에게 인사했다.
“안녕.”
스타더스트가 기다렸다는 듯 은후에게 다가와 얼굴을 비볐다.
“하여간. 나는 거들떠도 안 보더니.”
그 광경에 직원이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 정도 부탁은 제 선에서도 대답해 드릴 수 있겠네요. 얼마든지요.”
직원의 허락을 받은 은후는 바로 기타를 꺼내 들어 곧바로 연주를 시작하려 했다. 그런 은후를 스타더스트가 투레질했다. 언제 달리느냐고.
‘하여간 급해서는.’
하기야 스타더스트 입장에선 일주일 만이었다. 그사이 다른 사람을 등에 태웠다는 이야기가 없으니 달리는 것도 일주일 만일 터.
‘잠시 후에.’
은후는 스타더스트를 달래며 물었다. 스타더스트가 머무는 공간 안쪽으로 들어가도 되겠냐고. 직원은 잠시 고민하다 허락했다.
‘그 정도야, 뭐.’
지금까지 은후와 스타더스트가 어울리는 걸 직접 봤기에 허락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은후는 스타더스트가 머무는 공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타더스트에게 몸을 기대며 기타를 연주했다.
성호는 말들을 관객으로 삼기로 한 뒤부터 쭉 고민했다. 과연 말들을 위해 어떤 연주를 할지. 그에 관해 은후가 조언했다.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 말들이 많은 것 같으니 그에 초점을 두라고.
‘부디.’
내 연주를 듣는 순간만이라도.
말들의 심신이 안정되었으면.
그런 소망을 담아 곡을 만들었다.
* * *
김도희는 은후의 뒤를 조심스레 뒤따랐다. 상황 봐서 말을 걸어 좀 더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 하지만 아쉽게도 마구간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은후 선배는 들어갔는데 저는 안 되나요? 같은 수업을 받는 학생인데요.”
그런 김도희의 말에 입구에 있던 직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왜요?”
“규정이라서요. 혹시 안에서 무슨 사고라도 나면 저희가 곤란해져요.”
“은후 선배는요?”
“그 학생은 좀 특별하죠. 학생도 스타더스트가 날뛰는 거 멈추는 거 봤죠?”
“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봤다.
“게다가 유일하게 스타더스트가 자신의 등을 허락한 게 은후 학생이에요. 승마 실력도 진짜 좋고요. 말에 관련된 지식도 출중하고. 그런데 학생은 아니죠?”
직원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은후 학생은 어지간한 기수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승마 실력을 갖췄어요. 만약 학생이 비슷한 실력이라면 제가 위에다 말씀드려 볼게요. 그게 아니라면 나중에 와요. 수업 시간 때 마구간 견학 기회가 있을 거예요.”
김도희의 승마 실력은 초보였다. 말을 실제로 접해 본 것도 수업에서 처음이었고. 그래서 직원의 말에 더 억지를 부리지 못했다.
‘그나저나 은후 선배 승마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가.’
직원의 칭찬이 너무 거창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마구간 안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은후 선배 기타도 진짜 잘 친다고 했지.’
덕진 공원에서 사람들을 홀렸다고 했다는 소문이 학교에 쫙 퍼졌다. 정말로 대단한 연주였다고. 하지만 으레 소문이 그러하듯 과장이 꽤 곁들어진 거라고 여겼는데.
‘잘 치긴 잘 치네.’
하지만 역시 소문은 과장이었나 싶었다.
그때 직원이 김도희에게 말했다.
“슬쩍 보는 건 괜찮아요.”
“네?”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안 되지만 구경은 괜찮아요.”
“아, 감사합니다.”
직원이 이런 말을 한 건 김도희가 계속해서 마구간 앞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은후를 따라온 것 같아 보여서. 그리고 아까 너무 매몰차게 말한 것 같기도 했고.
김도희가 직원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마구간 입구에 다가가 시선을 던졌다.
‘어?’
그리고 깜짝 놀랐다.
‘울어?’
몇몇 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