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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63화 (63/170)

제63화

천도복숭아 나무 덕분에 공간이 만들어졌다. 4차원에 있는 공간으로서, 같은 위치이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인식할 수 없는 곳이었다. 크기는 작은 중학교의 운동장 정도.

처음 공간이 만들어진 이후 수호령을 비롯한 낙원의 주민들은 몇 번 들락날락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방금 집이라고 했어?”

“맞아. 집.”

“덕진 공원이 내 집인데?”

“그거야 그렇지만, 마땅히 쉴 곳이 없잖아?”

수호령이 해맑게 웃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저기 정자도 그렇구, 저 위쪽에 벤치도 있고…….”

“그런 의미 말고.”

수호령이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사람들이 사는 집?”

“그래, 그런 집.”

주거 공간.

“내가 말했지?”

“응?”

“너무 미안해 하지 말라고.”

“……응.”

“그래.”

은후가 웃으며 수호령의 머리를 헝클었다. 평소와는 달리 조금 거칠게, 애정을 담아서. 수호령은 그게 무엇이 좋다고 헤실거린 뒤 쪼르르 다른 낙원의 주민이 모인 곳으로 뛰어갔다.

“은후가 집 만들재!”

“집?”

해맑게 웃으며 최근 들어 가장 신난 목소리로 외치는 수호령의 모습에 시바견 루비가 왈왈 짖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인 수호령이 신났기에 절로 기분이 좋아서.

기타 치는 귀신 성호는 그 광경에 피식 웃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가사 없는 허밍으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연후가 은후에게 물었다.

“혹시 새로 생긴 공간에 말입니까?”

“네, 하나씩 차근차근 필요한 것들을 만들 생각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두고 낙원이란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지금 이 생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그런가요?”

“네.”

서연후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인간의 몸이 아니니 딱히 환경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지 않습니까. 쉽게 지치지도 않고요. 아, 그리고 벌레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서연후의 말에 은후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벌레 말입니까?”

“네. 며칠 전에 나무에 기대서 자고 있는데 벌레들이 다가오더군요. 쫓아내려고 했는데 뭐랄까.”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쪽인가.’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후가 가지게 된 능력은.

정령이라면 대개 고유한 능력을 갖기 마련이니. 그게 무엇이 되었든, 구체적인 원인은 모르겠지만 계기는 아마도 일전 천도복숭아 나무가 자라면서 그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연후 씨의 능력일 겁니다. 벌레를 다루는 능력이랄까요.”

“썩 도움이 되는 건 아니겠네요.”

“과연 그럴까요?”

“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벌레를 다루는 능력.

‘일단 본인이 벌레라고 말했단 말이지.’

벌레의 범위는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벌레라 하면 흔히 곤충을 떠올리기 쉽지만 좀 더 범위가 넓었다. 예컨대 거미나 지렁이는 벌레지만 곤충은 아니다.

“좋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거나 쓸모없는 능력은 아닙니다. 제가 보증하죠. 한마디 조언을 해 드리자면 상상력을 동원해 보세요.”

“은후 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서연후가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처음에 이런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자신이 가진 능력이 대체 은후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꽤나 실망했다.

그건 서연후가 은후에게 적잖은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은후 덕분이었으니.

‘게다가 요새는 즐거워.’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생활을 보내다 보면 언젠가 행복이란 단어를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기에 서연후는 은후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힘내자.’

서연후가 은후를 바라봤다.

수호령과 장난치며 시바견 루비와 놀아 주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 * *

은후가 집을 짓는 데 제공한 건 나무였다. 최근에 지어지는 현대의 집은 대부분 철근과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집을 짓는 데는 나무가 쓰였다.

집을 짓는 데에 적합한 나무의 기준은 함수율이다. 함수율은 나무가 수분을 머금고 있는 정도를 의미하는데, 이는 은후에게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마나로 커버하면 되니까.’

그리고 은후는 마음만 먹는다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은 시간 내에 그럴듯한 오두막 정도는 뚝딱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은후는 굳이 자신이 주가 되어 집을 짓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재미가 없지.’

어디까지나 적절히 도와주는 선에서.

그 외에는 수호령을 비롯한 다른 낙원의 주민에게.

그래야 모두가 즐겁지 않겠는가.

“그냥 막연하게 집을 지으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올 테니까 이것들을 참고해 보세요.”

은후가 리어카에서 책 몇 권을 꺼냈다. 전통적으로 나무를 가지고 어떻게 집을 짓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책이었다. 국내에는 마땅한 서적이 없어서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다.

“혹시 여기서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저요.”

서연후의 대답을 뒤따라 수호령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나나! 나도 영어 할 줄 알아!”

“오, 정말?”

수호령의 자신 있는 외침에 다들 깜짝 놀랐다.

“Hello. Nice to meet you! How are you? Fine, thank you!”

그리고 이내 다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수호령이 알고 있는 영어는 처음 영어를 접할 때 배우는 정석적인 인사말이었으니까.

“애들이 말하는 거 듣고 기억해 뒀어!”

엣헴, 하면서 으스대는 포즈를 잡는 수호령의 모습에 다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이거 읽을 수도 있을까?”

“응?”

수호령이 은후로부터 책 한 권을 받고 울상 짓다가 다시 밝게 웃으며 외쳤다.

“꼬부랑 글씨! 아, 그래도! 대충은 알 것 같아.”

“응?”

“제대로 읽을 수는 없지만 말하는 건 알아듣는다고 해야 하나?”

“…….”

글씨를 읽지 못해도 의미는 알 수 있다.

‘과연.’

은후가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능력을 갖춘 정령이 이세계에서도 있었으니까. 그 정령을 부리는 사람과 몇 번 합을 맞추며 의뢰를 수행하기도 했었고.

“하하, 이거 제가 유일하게 여기에서 영어를 못 하는 모양이네요.”

성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잘 못하는걸.”

“모로 가도 서울에만 도착하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글씨를 못 읽어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면 된 거죠.”

“그래?”

“그렇습니다. 노래도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둘 다…….”

성호는 은근히 수호령과 잘 어울렸다. 대화의 주제가 결국 음악으로 흐르기는 하지만 그건 성호의 탄생 근본이 그렇기에 어쩔 수 없었다.

수호령이 그걸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수호령은 언제나 성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었다. 시바견 루비와 수호령이 빨리 친해질 수 있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자, 집중!”

삼천포로 빠지는 둘을 잠시 지켜보던 은후가 손뼉을 친 후 말을 이었다.

“저는 이번 일에서 약간의 도움을 줄지언정 주도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조언과 재료 및 도구를 드리는 정도에 그칠 겁니다.”

“왜?”

수호령의 물음에 은후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낙원을 저 혼자 만들 수는 없으니까. 모든 걸 내가 만들면 그게 모형 정원과 무엇이 다를까?”

“그런가?”

“그런 거야.”

“으움.”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기 있는 이들이 내 애완동물은 아니니까. 난 모두를 존중하고 있어.”

은후의 진지한 말에 수호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알고 있어!”

“그래. 기본적인 재료나 도구는 여기에 둘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더 말하고. 그리고 한마디 조언을 해 주자면.”

“주자면?”

“꼭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어도 돼.”

은후가 현대와 다른 이세계에서 봤던 집 양식을 적절히 예시로 들어 주었다.

“나무 안에 집을 지어?”

“허공에 떠 있어? 집이?”

“버섯을 침대로?”

“어…….”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수호령에게 은후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한 예시는 아마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을 거야. 예컨대 허공에 떠 있는 집은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나중에라면 모를까.”

“나중에?”

“응, 나중에. 천도복숭아 나무가 좀 더 자라면 가능할지도.”

“지금은 아니란 소리네.”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란 의미로 말해 준 거야. 적절한 타협과 함께. 그리고 집 짓는 걸 이번 한 번만 할 건 아니니까.”

수호령이 끙끙대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일단 방은 여섯 개!”

은후.

수호령.

루비.

성호.

서연후.

개구리.

“음음. 그리고 오두막 느낌이었으면 좋겠어. 처음엔 그냥 평범하게 지었으면 좋을 것 같아. 여기 봐 봐. 이 책에서 나오는 그림처럼 오두막 느낌으로?”

수호령이 평범함을 말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지내고 싶기도 했거든.”

소심하고 조그맣게.

“헤헤, 가족이 있었으면 했는데.”

수호령이 빙그르르 돌며 웃었다. 부끄러워 차마 여기 있는 이들이 내 가족이라 말은 하지 못한 채. 다만 웃음에서 전해지는 감정이 제법 진해서.

하물며 여기 있는 이들은 그 감정을 모두 느낄 줄 아는 존재들이었다. 흑마법사인 은후는 물론 정령이 되어 버린 성호와 연후도.

시바견 루비는 그 감정을 구체적으로 몰랐으나 어렴풋이 알았다. 그래서 루비는 수호령에게 다가가 낑낑거리며 수호령 안으로 파고들었다.

‘꽤 큰 집이 될 것 같네.’

수호령이 루비를 쓰다듬는 모습에 은후가 픽 웃었다.

* * *

얼마나 집을 짓기 시작했을까.

개굴개굴.

자리에 없던 개구리가 등장했다.

‘뭐야?’

뚝딱뚝딱 열심히 짓고 있는 낙원의 주민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는 은후. 개구리는 은후에게 다가가 인간 형태로 변신하며 물었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집 짓고 있어.”

“집?”

“그래. 낙원에 허허벌판만 있으면 안 되잖아.”

“그건 그렇지”라며 개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집부터 짓고. 하나씩 하나씩 뭐라도 늘려 가야지. 너도 가서 도와.”

“나도?”

“그래. 너도 낙원의 주민 아냐?”

“뭐.”

개구리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말했다.

“나는 그럼 연못이나 만들까.”

“연못?”

“개구리 집은 연못이 정석인 거 몰라?”

“누가 개구리 아니랄까 봐. 그나저나 수호령이 섭섭해 하겠네. 방도 여섯 개 만든다는데.”

개구리가 움찔했다.

“아니, 그, 그럼, 내 방 안에 연못을 만들면 되겠네!”

“가능하겠어?”

개구리가 으스대며 말했다.

“안 될 건 뭐야? 그런데 은후 너는 안 도와줌?”

“내가 도와주면 너무 금방 끝나. 그럼 즐거움이 없잖아. 내가 아예 집을 지어서 선물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건 나중에. 지금은 최소한으로만 도와주려고.”

“너,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수호령을 참 아끼네.”

“그러지 않았으면 애초에 낙원 따위 만들 생각도 안 했어.”

그때 수호령이 개구리를 발견하고선 외쳤다.

“개굴아! 같이 집 만들자!”

개구리가 은후를 잠깐 바라본 후 피식 웃은 뒤 폴짝거리며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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