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전주 승마장에서 은후가 나오려고 할 때 스타더스트가 투레질하며 불만을 표했다.
‘또 언제 달릴 거야?’
이세계에서 그저 이용만 하려고 계약을 맺었을 때 동물들은 은후의 행동에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다. 너무 두려워서. 하지만 스타더스트와의 계약은 달랐으니.
‘이런 식인가.’
순수하게 전해져오는 동물의 감정이란.
물론 그런 감정을 느낀 적 있었다. 하지만 계약 관계는 아니었다. 사람도 동물이라지만 인간과 그 외 동물은 또 엄연히 달랐으니. 은후는 마법사로서의 생각을 털어 내고 짧게 답했다.
‘조만간.’
마법사로서의 사고나 연구는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어차피 스타더스트의 사후까지 이어질 인연이기도 했고.
‘그래도 살아 있는 육체를 가졌을 때와 영혼 상태에서 전달되는 감정의 차이는…….’
그런 은후의 생각을 이하연의 목소리가 일깨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
나도 마법사는 마법사였구나.
아무리 마법사가 아닌 본연의 삶을 중시하기로 했다지만.
‘마법사인 나 또한 본질.’
억지로 끊어 내지는 말자.
다만 우선순위를 두자.
‘정 신경 쓰인다면 사고 분할을 통해서 해결하고.’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하면서 행동하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
“스타더스트가 너무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나도 조금.”
“하기야.”
이하연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고작 두 번째 만남이라고 했지.’
하지만 만남의 회수가 중요하던가. 그건 아니었다. 만나서 얼마나 밀도 있는 시간을 함께 보냈느냐가 중요했지. 그런 의미에서 이하연은 살짝 스타더스트에게 질투를 느꼈다.
‘나도.’
좀 더, 은후와, 밀도 있는.
‘응?’
밀도.
‘아니.’
이게 아니고.
이하연이 순간 덜컥했다.
‘아우.’
왠지 모르게 얼굴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간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어어, 아니야. 그냥 승마가 처음이라 그랬던 것 같아.”
“무리한 건 아니고?”
“응응. 그럼. 그냥 처음 해 보는 거라서 생소해서 좀 지쳤던 것뿐이야. 그래도 엄청 재밌었고. 또…….”
이하연이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은후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하연은 그 웃음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아까.’
조금은 다르지만.
‘비슷하지?’
스타더스트와 함께 달리고 난 직후 땀을 훔치며 지었던 미소와 닮아서.
“가자.”
“응? 어딜?”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힘들면 전주역으로 가고.”
“아냐. 괜찮아. 멀쩡해.”
“그래?”
은후가 이하연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호감이라.’
어디 러브 코미디 만화 속 주인공과 다르게 은후의 눈치는 둔하지 않았다. 하물며 사람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있는 흑마법사였기에 이하연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할 수도 없었다.
‘전보다 진해졌나.’
우정과 사랑의 중간 즈음에 있던 감정의 균형이 무너졌다.
‘나는 어떨까?’
호감은 분명히 있지만.
‘사랑은 아니야.’
은후가 냉정히 자신의 감정을 살폈다.
‘끊어 내자면 끊어 내지 못할 것도 없고.’
시간을 들여서 부드럽게 거리를 떨어뜨리고 그저 친한 친구 사이로 남을 수 있게끔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이 흘러 사랑이란 감정을 품게 된다면 연인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가.’
은후와 이하연은 침묵을 유지하며 택시를 타고 백석 저수지로 가고 있었다. 은후는 차창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이세계에서 자신의 아내였던 레아를 떠올렸다.
‘복수를 끝마치고.’
현대로 돌아올 거란 상상을 할 수 없었을 때, 그때 그 사랑은 끝이 났었구나.
‘전부 불태웠으니.’
혈혈단신으로 거대한 가문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좌절도 많이 했고, 죽을 고비는 수도 없이 넘겼으며, 당시에 혐오했던 흑마법에도 손을 뻗쳤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이쯤 하면 할 만큼 한 거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신분을 바꾸고 적당히 제국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은후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복수를 끝마쳤을 때 기쁘게 웃었다. 죽을 때조차 그러했다, 생의 염원을 이루었으니. 대체 누가 복수는 허탈하다고 말했는가.
‘너무 기뻐서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는데.’
삶의 막바지에는 실실 웃고 다녀서 광기의 흑마도사 피에로란 웃기지 않은 별칭도 붙었었다. 당시 이세계 어린아이에게 겁을 줄 때 웃는 피에로가 붙잡아 간다는 말까지 돌았었다.
‘나는 빈껍데기였어.’
완전히는 아니어도, 반쯤은.
현대로 돌아와서 한동안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그 여파였다. 아마 가족이란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없었다면 무인도라도 찾지 않았을까.
‘레아, 잊지는 않을게.’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잊겠어.’
다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면 거부하지도 않을게.’
복수는 잊으라고, 그 유언은 들어줄 수 없었지만.
‘잘 살라고 했지.’
기왕이면 잘.
가능하다면 새로운 사랑도 찾을 수 있으면 찾으라고. 당신은 능력 있고 멋진 사람이니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외면했던 말들.
‘그건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과거를 떠올리며 은후가 슬쩍 미소 지었다.
* * *
전주 승마장에 나와서 택시를 잡고 앉자, 이하연은 새삼스레 자신이 지쳤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 거의 운동을 안 하기도 했고 승마를 접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냥 타고만 있었는데.’
그리고 은후와 다르게 가볍게 말을 몰고 걷기만 한 것뿐인데, 그런데 너무 지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그건 은후와 함께라서.
“은…….”
뭔가 말이라도 할까 싶어서 은후를 바라보며 말을 하려던 이하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차창 바깥으로 눈동자를 던진 은후의 모습은 우수에 차 있어 보였기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던 까닭은 은후의 표정이 아련하기 그지없어서. 그래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분위기에 운전하던 택시 기사가 다시 한번 운전석 위에 있는 거울을 힐끔 바라본 뒤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참 잘 어울리는 커플로 보이는데 뭔가 일이 있었나 싶었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입을 다물고 얌전히 운전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
그저 멍하니 은후를 바라보던 이하연이 웃었다.
‘웃었네.’
은후가 웃어서.
“뭔가 고민 있어?”
“어?”
“심각하게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
“조금.”
“그래도 다행이다. 웃는 거 보니.”
“그러게.”
크게 싸운 건 아니었나.
택시 기사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를 멈춘 뒤 말했다.
“손님들, 도착했습니다.”
“여기 카드요.”
은후가 행동하기 전 이하연이 잽싸게 계산한 후 먼저 내렸다. 은후가 속으로 픽 웃으며 차량에서 내렸다. 은후는 일전 백석 저수지에 왔을 때를 떠올리며 노을을 감상하기 좋은 포인트로 이하연을 이끌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덥기 그지없었던 날씨가 참으로 선선했다. 한마디로 나들이하기 딱 좋은 느낌. 이하연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하지만 조심스럽게 은후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고민이었는지 물어봐도 돼?”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개인적인 고민이어서.”
무슨 고민이었을까. 하지만 마지막에 웃는 걸 돌이켜 보면 심각한 고민이어도 결론은 좋게 난 것 같아서. 그래서 망설이다가 나름 굳게 마음먹고 물은 것인데.
“조금 서운하다. 나도 친구로서 고민 같이 들어 주고 싶은데.”
은후가 흐릿하게 웃었다.
“미안. 지금은 좀. 언젠가 말할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
대체 무슨 고민일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딱 여기까지. 이 이상 파고들고자 한다면 무례였다. 그게 아무리 친구라는 명분을 가져다 대어도 본인이 말하기 싫다면 그걸 존중하는 게 친구니까.
“방금 말한 대로 말할 수 있을 때가 온다면 말해 주기. 약속?”
평소와 다르게 살짝 애교 섞인 행동과 목소리에 은후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그나저나 넌?”
“나?”
“응.”
“고민 있는 것 같은데. 말하기 어려운 거면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하연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검지로 빙빙 꼬면서 답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고민이라.
“뭔가 방송이 쉽지만은 않더라고. 아, 물론 내가 방송을 쉽게 보고 시작한 건 아니야. 네 조언도 있었으니까.”
다만 예기치 못한 부분들.
“방송 때문에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말이지.”
자신의 하소연에 공감해 주지 못하는 부분이라든가.
“그건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이상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일 테니까. 방송 이야기하다가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랑 좀 멀어진 일도 있긴 했는데.”
그건 애초에 일방통행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냥 사람 하나 걸렀다고 치면 되고. 근데 정신적으로 좀 힘들더라고.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왜 사람들이 취미가 직업이 되면 괴로워하나 했는데, 이제 좀 알겠더라.”
“그런데 재미도 있지 않아?”
“응? 그건 뭐.”
“원래 직업이란 게 그래. 하지만 하연이 넌 의외로 행운아일걸?”
“행운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취미와 직업을 분리하느냐, 혹은 같은 길을 걸어가며 모든 걸 감당하느냐, 그건 각자 개인의 선택이겠지. 하지만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대다수야.”
게다가 보통은 후자를 바라기 마련이었다.
“아무래도 업이니까 괴로움은 어쩔 수 없는 거지. 하연이 너도 사회생활 해 봐서 알잖아? 기간이 그리 길진 않았어도.”
“알지.”
“그때와 비교해서 어때?”
“그때…….”
공무원을 했던 시절, 느닷없이 겪게 된 따돌림. 계속 버티다간 괴로워서, 못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러네, 참. 사람이 간사하다더니. 그때 시절에 비하면 당연히 좋지, 안 좋을 수가 있나.”
“그렇지? 뻔한 말이지만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행복하지 않아? 게임 하면서 방송할 때.”
행복이라.
“너랑 내가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어. 서로 게임을 너무 좋아했으니까. 즐거워서 어쩔 줄 몰랐잖아?”
그 또한 행복의 한 모습이니.
“방송하다 보면 힘들 거야. 왜 힘들지 않겠어. 하지만 즐거운 일도 분명히 있을 거야. 물론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네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의 감정을 품을 정도라면 그만둬야겠지만 그건 아니지 않아?”
이하연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몇몇 승려와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대다수 사람이 원하는 건 행복일 거야. 누군가는 그 행복을 명예나 권력에서 찾을 수도 있겠고, 또 누군가는 가족에서, 또 누군가는 돈에서 찾겠지.”
행복의 형태는 다양한 법이니.
“그 행복, 방송에서 찾아보는 건 어때? 그러면 스트레스도 조금쯤은……. 즐겁……진 않겠지만.”
그래도.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으려나. 그러면 한결 나을 거고.”
예기치 못한 은후의 진지한 말에 이하연이 생각에 잠겼다.
‘행복.’
적어도 최근에 떠올리지 않았던 단어.
사람들은 행복을 손에 쥐길 원한다. 하지만 막상 행복에 관하여 고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건 이하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은후의 말이 뭔가 새삼스러웠다.
‘난 행복한가?’
어느새 지고 있는 말간 노을을 바라보며 이하연이 스스로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