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달리고 싶은데 달릴 수 없어서 난동을 부리고 마구간을 탈출하기까지 한 말. 그 앞에서 큰 사고가 날 뻔한 은후. 이하연이 듣기엔 그런 이야기였다.
“별일 없었던 거 맞지?”
“그럼. 별일 있었으면 여기서 데이트가 아니라 네가 병문안을 오지 않았을까?”
은후의 너스레에 다소 새하얗게 변했던 이하연의 얼굴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농담도.”
“반은 진담이었다?”
이하연이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위험하잖아.”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이하연이 흠칫했다.
‘데이트?’
어, 그러니까.
‘데이트가 맞기는 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막상 은후의 입에서 직접 언급되자 뭔가 부끄러웠다.
“하여간 금지야. 위험한 일은.”
“그런데 뭐랄까. 알았거든.”
“알아?”
“응. 스타더스트가 내 앞에서 멈출 거라는 걸.”
설령 멈추지 않아도 그렇게 만들 수 있었고.
“말은 지능이 높은 데다가 사람과 깊은 교감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니까, 정말로 위험했다면 피했을 거야. 어느 누가 스스로 다치고 싶어 하겠어?”
수행을 목적으로 자해를 하는 미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런 의미에서 처음에 말을 고를 때 느낌에 집중해 봐.”
“응?”
은후가 주제를 슬쩍 틀었다.
“너도 말 타 봐야지?”
“어…… 그렇겠지?”
“그럼 무슨 말을 타야 할까?”
“나는 그냥 직원이 추천해 주는 말 타려고 했는데. 온순한 말? 아무래도 초보자니까.”
“그러지 말고 여기 마구간 둘러보면서 그냥 괜찮겠다 싶은 말 한번 골라 봐.”
오늘 이 시간 승마장은 한가했다. 게다가 저번에 은후 덕분에 큰 사고를 피할 수도 있는 것도 있었고. 또 스타더스트 전담 직원이 은후가 말에 관해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있다는 말을 퍼트린 덕분에 단둘이 마구간을 구경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하연이 탈 말을 고르는 것까지. 물론 혹시 모를 사고가 있을 수도 있으니 직원들이 멀찌감치서 은후와 이하연을 지켜보고는 있었다. 마구간을 아예 비울 순 없기도 했고.
“그냥 고르면 될까?”
“응. 단순한 직감이면 돼.”
은후와 이하연이 마구간을 거닐었다. 그러다가 이하연은 검은색 말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저 아이.”
“쟤?”
“응. 방금 눈빛이 뭔가 통하는 것 같았는데.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거면 돼.”
이하연이 콕 집은 검은 말 앞에 다가가자 근처에 있던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은후 학생,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스타더스트는 잘 지내고 있죠? 제가 몸조리 잘하고 있으라고 했는데.”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그러더라고요. 확실히 스타더스트랑 은후 학생이 뭔가 통하는 게 있나 봐요.”
“그래서 허락은 받으셨고요?”
“네. 은후 학생이라면 스타더스트를 타고 트랙을 달려도 괜찮습니다. 단, 스타더스트가 은후 학생을 등에 태워야겠죠?”
일전 은후가 승마장에서 스타더스트의 사고를 멈추고 교감한 일은 윗선에 보고가 올라갔다. 그리고 은후가 떠나면서 스타더스트에게 얌전히 몸조리하라고 당부했다는 것까지.
실제로 그 이후 스타더스트는 정말로 얌전히 지냈고, 또 스타더스트의 전담 직원이 열심히 은후를 어필한 덕분에 그런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옆에 분, 여자 친구분이시죠?”
직원의 말에 은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이하연이 손사래 치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요. 그냥 친구예요.”
“그랬어요? 영락없이 커플인 줄 알았는데요. 그래서 저희끼리 나름대로 배려도 해 드렸고요.”
“정말로 친구예요, 아직은.”
“아직이요.”
“네, 아직.”
이하연이 슬그머니 은후의 눈치를 살폈다. 은후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당장에 연애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를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이하연에게 호감이 없지도 않았고. 그 호감이 사랑으로 발전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큼. 하여간 말 타 보실 거죠? 은후 학생은 모르겠지만 옆에 친구분은 초보시고요.”
“네.”
“여기 이 말로요?”
“그러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때.
“야야야야!”
조금 떨어진 곳, 스타더스트가 머무는 마구간에서 다소 소란이 일었다. 스타더스트가 은후에게 질투한 것이다. 왜 자신을 찾지 않고 다른 말 앞에서 그러고 있냐면서.
“저 온 거 알아차렸나 보네요. 저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잠시 다녀올게요. 친구에게 기초적인 것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 알겠습니다.”
스타더스트의 전담 직원이 먼저 달려가려다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전담 직원은 난데, 그리고 본 세월이 얼마인데.
‘나보다 은후 학생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굳이 자신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전담은 아니더라도 다른 직원도 스타더스트 옆에 있었고. 이윽고 직원의 예상대로 은후가 스타더스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소란이 바로 멈췄다.
“저기, 그, 학생? 학생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어떻게 하실래요?”
“뭘요?”
“기초적인 거, 저에게 배우시겠어요? 아니면 은후 학생에게 배우시겠어요? 은후 학생은 모르겠지만 학생은 티 꽤 나는데.”
직원의 말에 이하연이 당황했다.
“티요?”
“네. 좋아하죠?”
“어어. 그게요. 아……마도요?”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분명히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이하연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게 좋을걸요? 제가 은후 학생과 이야기해 본 건 몇 시간 채 되지 않지만요. 뭔가 분위기가 묘하달까, 초탈한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네.”
“그런 비슷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는데 분위기가 똑 닮았어요. 그런 사람은 주위에서 내버려 두지를 않더라고요. 게다가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겼고. 그쵸?”
“네.”
“그러니까요.”
“네.”
“제삼자가 더는 뭐라고 할 건 아닌 것 같고. 하여간 가르쳐 드려요? 기초적인 부분들.”
이하연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은후에게 배울게요.”
“좋아요.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요. 그냥 옛날 생각나서 오지랖 한 번 부려 봤어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거든요. 혹시나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요.”
* * *
이하연이 고른 말의 이름은 까망이라고 했다. 순하고 사람 태우기를 좋아하는 말이라고.
“뭔가 이름이 너무 비교되지 않아?”
“그건 좀 그렇지?”
은후가 픽 웃으며 스타더스트를 바라보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스타더스트가 투레질하며 은후의 손을 혀로 핥으며 온몸으로 감정을 표출했다.
언제 달리냐고.
은후가 픽 웃으며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몸은 풀어야지. 산책 좀 하다가 달리자.”
스타더스트가 어쩔 수 없이 봐준다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 광경을 이하연이 신기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뭔가 진짜 말이 통하는 것 같아 보여.”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래. 그나저나 나보다는 전문가에게 배우는 게 좋지 않겠어?”
“으응, 그래도. 아니다, 일단 너한테 배우고 전문가에게도 배울게. 그럼 됐지?”
“그렇다면야.”
은후가 어깨를 으쓱한 후 말을 타는 법에 관해 기초적인 걸 설명했다.
“솔직히 기술적인 걸 떠나서 제일 중요한 건 편해야 한다는 거야.”
“편해?”
“응. 올라타는 순간 말이 알거든. 예컨대 지금 내 등에 타고 있는 사람이 긴장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 기수가 긴장하면 말도 신경 쓰이겠지? 불편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잠시 트랙을 산책하며 기초적인 걸 은후가 이하연에게 알려 줬다. 이후 직원을 불러 따로 교육을 받았다.
‘과연.’
현대에서 승마의 기초는 이렇게 알려 주는구나.
새로운 지식을 하나 알게 되었다.
‘이세계에선 귀족들이나 받는 교육인데.’
체계적이고 이론이 있으며 논리가 동반되었다.
‘평민들은.’
정말로 주먹구구식이었다. 그냥 타면 어떻게든 될 놈은 된다는 근성론도 만연했다. 하기야 말을 타 볼 기회가 있는 평민은 어느 정도 출세한 이들이었다. 애초에 평민이면 말을 탈 기회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도 했다.
“그럼 가볍게 타 볼까요?”
아무리 은후가 옆에 있다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단순히 구경하는 것이 아니기에 단둘이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래서 직원 둘이 따라붙어서 케어해 주기로 했다. 개중 한 명은 스타더스트의 전담 직원이었다.
‘은후 학생을 믿기는 하지만.’
실제로 말을 타는 걸 본 적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과연.
‘태울까?’
스타더스트가, 국내 한정이라지만 꽤 유명한 기수가 와도 거부했는데.
‘왠지 태울 것 같기는 한데.’
그리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여차.”
은후가 스타더스트에 한 번에 훌쩍 올라탔다. 그 과정이 정말로 깔끔해 엄청 멋져 보였다.
“오!”
이하연을 비롯하여 옆에 있던 직원조차 감탄했다.
“하연 학생도 타 보죠.”
“네!”
이하연은 낑낑거리며 까망이에게 올라탔다.
“이거, 쉽지 않네요.”
“단순히 말 위에 몸을 싣는 것뿐이지만 초보자에겐 어렵죠. 은후 학생처럼 타는 모습을 보여 주려면 베테랑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에 익숙해져야 하고요. 자, 힘 빼세요. 처음에는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하셔야 해요. 지금 되게 긴장하고 있거든요?”
직원이 은후를 가리키며 말했다.
“차이점이 느껴지세요?”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스타더스트가 얼른 달리고 싶다고 투레질했다. 그런 스타더스트를 은후가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스타더스트가 마음이 좀 급한가 보네요. 먼저 트랙 가볍게 걸어갈게요. 하연아, 괜찮지?”
“어, 난 괜찮아!”
은후가 이하연에게 가볍게 웃어 준 후 스타더스트의 몸을 발로 가볍게 찼다. 스타더스트가 걷기 시작했다.
“저기 은후 학생이 타는 걸 보시면…….”
직원의 설명과 이하연을 뒤로하고 스타더스트가 걸었다. 은후는 스타더스트의 조급함을 진정시키며 트랙을 한 바퀴 돈 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달려도 돼?’
‘한 바퀴만 더.’
‘딱 한 바퀴다?’
‘그래, 한 바퀴.’
이런 느낌의 대화를 감정으로 교류한 후, 은후가 이하연에게 말했다.
“한 바퀴 같이 걸어 볼까?”
“어, 응. 괜찮을 것 같아.”
여름이 사라지고 가을이 자기 차례라며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 그래서 그런지 딱 적당한 날씨였다.
‘좋다.’
이하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광활하진 않지만 널찍한 풍경.
푸른 하늘.
선선한 공기.
그리고 옆에는 좋아하는 사람.
‘솔직히 은후가 없어도.’
그냥 이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렸을 것 같은데. 그런데 호감이 있는 이까지 함께였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하연의 몸이 절로 풀렸고, 까망이가 그걸 바로 알아차렸다.
“좋아요.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금방 배우는데요?”
직원의 말에 은후가 말을 이었다.
“여기 직원분 말이 빈말이 아닌 게, 중간부터 급격하게 좋아졌어. 재능 있는데?”
이하연이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트랙을 한 바퀴 돈 후.
“달려도 될까요? 요놈 슬슬 참기 힘든 모양이네요.”
“그럼요.”
은후의 말에 직원이 허락했다.
“가자.”
스타더스트가 땅을 박찼다.
그때부터 은후는 스타더스트의 육체 상태를 고려해 마나로 보조했다. 이대로 있는 힘껏 달리다간 정말로 스타더스트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죽을 수 있는 가능성도 그렇지만.’
마나로 보조하지 않으면, 스타더스트의 바람처럼 힘껏 달릴 수 없을 터이니.
세월의 흐름 때문에 당연하지 않게 된 것들. 여전히 마음만 먹는다면 서슴없이 달릴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예컨대 공기를 가로지를 때의 느낌이 다를 터였다.
육체가 늙어서, 그래서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지니. 인지하지 못해야 할 무게인데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 스타더스트는 아니었다. 은후의 보조 덕분에 예전처럼 상쾌했다.
땅에서 올라오는 진동 또한 그러했다. 어느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부담스럽게 다가오던 울림이 과거와 같이 짜릿했다. 그래서 스타더스트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스타더스트가 은후와 함께 달리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허.”
스타더스트를 데려온 전주 승마장의 후원자와 관계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