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목요일 오전.
휴대폰 알람음이 은후의 귓가를 때렸다.
‘아침인가.’
천도복숭아 나무가 꽃을 피운 날.
은후는 자취방에 돌아와 쭉 연구에 몰두했다.
‘그 꽃.’
천도복숭아 나무가 피운 꽃을 이용한다면 당장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마법사로서의 판단이 은후를 들뜨게 한 것이다.
‘차원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꽃이라.’
은후는 덕진공원의 4차원에 정령의 낙원을 만들고자 했다. 보통 사람이 인식하고 살아가는 3차원에 만든다면 이래저래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으니까.
‘서로를 위해서.’
인식할 수 없어야 하니까.
게다가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보통의 3차원에 정령들을 위한 낙원을 만든다면 분명히 문제가 발생할 터였다.
‘특수 능력자 부서라고 했던가?’
박수무당 김영호가 말한 정부 조직만 떠올려도 그렇다. 낙원의 규모가 커지면 아무리 은후가 노력해도 존재가 드러나게 될 것이니, 이후엔 뻔했다.
‘어떻게든 개입해 오겠지.’
이용하려고.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선한 의도로 접근한다고 하여도 결국 문제가 될 터였다. 시민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족쇄를 채우려고 한다든가.
‘아무리 안전하다고 외쳐도.’
인간이 아니니까.
서연후와 성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인간이 아니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 정부의 숙명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또 권력자들의 욕망에 휩쓸릴 수도 있고.’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 은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최선은 서로 간에 아예 인식을 못 하는 것.’
최악은 염두에만 두자.
‘그래도 생각은 해 둬야지.’
가능성은 낮지만 최악의 사태에 어떻게 해야 할지 행동 방침 정도는 정해 두지 않으면. 그래야 당황하지 않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테니까.
“후우.”
은후가 기지개를 켰다.
‘몇 가지 재료만 더 구한다면.’
작게나마 4차원에 낙원의 터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운이 좋았어.’
우연히 신갈나무의 존재를 인식한 건.
‘남부시장에서 다양한 식자재를 구해서 조사한 건 내 노력의 결과라지만.’
대부분 쓸모없었으나 몇 가지 식자재는 마법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유의미했다. 비록 신갈나무처럼 테테로 나무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일치한 식자재는 없었지만 말이다.
일정 정도의 오차는 연구를 통해서 조율하고, 너무 큰 오차는 새롭게 연구해서 어떻게든 쓸 수 있도록. 은후는 거기까지만 생각한 뒤 사고를 전환했다.
‘쉴 땐 쉬어야지.’
뭐 하고 쉴까?
원래 이 시간에는 덕진공원에서 낙원의 주민들과 아침 식사를 했다. 하지만 연구 때문에 한동안 아침을 같이 못 먹는다고 했다. 물론 상관없이 그냥 가도 괜찮겠지만.
‘하루 정도는.’
느긋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승마 수업이 2시니까.’
좀 걷자.
잠이 오지는 않으니.
‘좋아.’
은후가 마법으로 샤워를 대신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뒤 자취방을 나섰다.
* * *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걸친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에 항상 서 있는 가로등도 다소 떨어진 곳에서 울려 퍼지는 자동차 소리도 나른한 느낌이었다.
“애매하게 더운데 커피나 마시러 가자.”
“그럴까?”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나눈 대화가 은후의 의식을 간지럽혔다.
‘좀 지쳤나.’
가끔 그렇다.
마법사가 된 이래 급격히 좋아진 신체 능력 덕분에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귀에 이런저런 소리가 꽂힌다. 다만 은후로서는 너무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필요한 정보를 제외하면. 혹은 의식하고 듣는 게 아니라면 뇌에서 자연스레 흘려 버린다.
마법사로서 살아가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었다. 그게 잘 안 되어서 고생하는 마법사도 있었다. 은후는 아니었지만.
하지만 이따금 방금처럼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중요하다고 판단되지 않은 정보가 은후의 뇌리를 파고드는 경우가 있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고?”
“그래. 나도 멍청한 년이지. 1년도 넘었더라. 여자 사람 친구는 무슨.”
“내가 저번에 말했지? 기분 쌔하다고. 그리고 남자 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난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제는 잘 모르겠더라고.”
은후가 속으로 혀를 차며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핫초코 라테를 시켰다. 따뜻한 음료가 어울리는 날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항상 달달하면서도 온도가 높은 음료를 마셨다.
“핫초코 라테 나왔습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오전 10시, 담당 교수와 상담 약속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쯧.’
은후가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 같은 날은 푹 쉬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그런 날이 있다.
아픈 건 아닌데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뭔가 몸이 나른하고 컨디션도 별로인 그런 날. 하지만 그렇다고 약속을 취소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차라리 정말로 아팠다면 또 모르겠지만.
‘강제로 몸을 좀 일깨워야겠어.’
은후가 산책하며 강제로 마나를 몸에 순환시켜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그제야 좀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몸 상태의 경우엔 평소의 70퍼센트 정도인가.’
아까와 다르게 쓸데없는 소리는 걸러지지만, 희미하게 웅얼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은후는 담당 교수 강장원의 연구실 건물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머리를 비우고 핫초코 라테를 홀짝이며 눈을 감았다.
살랑이는 바람, 나른한 햇빛.
시간이 흘러갔다.
잠시 후.
“은후 학생?”
언젠가 들어 봤던 목소리가 은후를 일깨웠다.
“교수님.”
“우리 약속 시간은 10시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그런데 눈이 좀 일찍 떠져서요. 산책하다가 시간이 애매하기도 해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도 좋죠. 오늘 날씨도 딱 적당한 것 같고요. 며칠 전만 해도 너무 더워서 바깥에 있기 힘들었는데.”
강장원 교수가 은후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저도 마침 선약이 취소되어서 시간이 비었는데 지금부터 상담 괜찮을까요?”
“저야 좋습니다.”
“혹 말하기 어렵다거나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인가요?”
“아니요.”
“그럼 여기도 좋겠네요. 어때요?”
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담하고자 하는 바를 말했다.
“제대로 논문을 쓰고 싶다고요.”
“네, 가능하다면 제대로 된 저널에도 제출하고 싶어서요.”
강장원 교수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혹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 있으세요?”
“아니요.”
강장원 교수가 조심스레 은후에게 말했다.
“현실적으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 있다면 좋은 경험이라도 되겠지만요.”
물론 그러지 않아도 좋은 경험이 아닌 건 아니었다. 다만 힘은 힘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쓰며 실질적으로 얻는 게 거의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학자의 길을 걷지 않은 이상 졸업 이후에 논문을 쓸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냉정하게 취업에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고요. 그리고 은후 학생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요.”
학부생의 졸업 논문은 거의 과제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본 이후에도 그러고 싶다면 내 힘껏 도와줄게요.”
강장원 교수는 그런 바보를 싫어하지 않았다.
꿈과 낭만이 있지 않은가.
학부생이 저널에 자신의 논문을 게재하여 인정받고 싶다는 목표를 갖는 건.
“알겠습니다.”
은후는 강장원 교수의 조언에 익히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 온 인쇄물을 꺼내 들었다.
“혹시 이거, 한 번만 봐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작성하고 있는 논문 초고입니다. 읽어 보시고 냉정하게 평가해 주시면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조언해 주실 게 있으시면 해 주시고요.”
강장원 교수가 대견하다는 듯 은후를 바라보며 인쇄물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헤어진 후 연구실로 돌아와 은후의 논문 초고를 읽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시간도 비었으니.’
게다가 조금 두근두근하기도 했다. 수준은 크게 기대되지 않지만 한 학생이 자신의 꿈을 가지고 쓴 논문이지 않은가. 대학원에 뜻이 없는 학생이 졸업 논문을 위하여 상담까지 하고, 따로 초고까지 준비해 온다는 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거의 안 하지.’
꽤 긴 세월을 교수로 살아왔지만 이런 일은 딱 한 번. 이번이 두 번째 겪는 일이었다.
‘제목이 특이한데.’
게임에서 비롯되는 인정 욕구와 심리의 상관관계.
‘젊은이답네.’
게임이라.
‘음?’
그런데 영어였다, 한글이 아니라.
영어에 워낙 익숙한 강장원이었기에 자연스레 읽은 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후가 실수했거나 멋을 부리고 싶어서 그런 줄 알고서. 하지만 제목뿐만이 아니라 내용도 모조리 영어로 작성되어 있었으니.
‘해외에서 오래 살다 왔나?’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장원 교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더불어 진지하게 각을 잡고 한 줄, 한 줄 정성 들여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가볍게 훑어보려던 생각은 어느 순간 싹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교수님, 안 계세요?”
심리학과 조교가 강장원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강장원은 자신을 방해하는 소리에 미간을 잠깐 찌푸린 뒤 표정을 고치고 답했다.
“있네.”
“실례합니다.”
“무슨 일인가?”
“수업 시간인데 오시지 않으셔서요. 전화를 드렸는데도 안 받으셔서 무슨 일 있으신 게 아닌가 하고요.”
강장원 교수가 아차, 하면서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아직 반도 못 읽었는데.
강장원 교수가 시계와 은후의 논문 초고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교에게 말했다.
“이번은 공강으로…… 후, 아니지.”
학자로서의 욕망이 들끓지만, 그래도 수업은 학생과의 약속이지 않은가. 먼저 고지한 것도 아니고.
“금방 갈 테니 학생들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아, 그리고 오늘, 이후 수업은 다 공강 처리 부탁하네.”
“오늘 수업 전부요?”
“그래. 내 좀 바쁜 일이 있어서.”
“그, 알겠습니다.”
조교는 평소와 다르게 퍽 초조해 보이는 강장원 교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급하신 일 있으신가 보네. 원래 저런 분이 아니신데. 다행히 어디 아프신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교가 떠난 후 강장원 교수가 못내 아쉬운 듯 은후의 초고를 바라본 뒤 서랍에 고이 넣었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한 뒤 수업하러 길을 나섰다.
* * *
그 시각, 은후는 전주 승마장에 있었다.
오늘은 실습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두 번의 수업 중 한 번은 이론, 다른 한 번은 실습이었다. 그리고 첫 실습답게 지도 교수가 각종 주의 사항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도 말했지만, 말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때로는 정말 난폭해지기도 합니다. 의외로 겁이 정말로 많거든요. 놀랄 경(驚)이라는 한자에 말 마(馬) 자가 들어가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열심히 달리다가도 작은 돌부리에 부딪힐 것 같아서 멈추는 예도 있었다.
“치거나 밟거나 뛰어도 되는데 말이죠. 물론 너무 겁을 먹을 필요는 없어요. 여러분들이 겁을 먹고 접근하면 말이 바로 알아차릴 거거든요. 그러면 서로 불편하겠죠? 자, 잔소리는 이쯤하고 말을 보러 가죠.”
그렇게 교수와 학생들이 말을 보려고 마구간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야! 잡아!”
“아니!”
마구간에서 난리가 났다. 말 한 마리가 난동을 부리며 마구간을 탈출한 것. 그리고 마침 마구간에 들어온 교수와 학생에게 돌진했다.
“다들 피해요!”
“미친!”
각종 비명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한 건 은후뿐이었다. 그리고 은후와 돌진하는 말의 눈빛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