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덕진공원에서 수호령이 하는 일은 단순했다.
공원에 방문하는 아이를 지켜보고 수호하는 것.
수호령이 탄생한 이유이자 존재의의였으니 당연한 일. 스스로 의무감도 있었고 재미도 있다고 했다.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지만 항상 언제나 아이가 공원에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늦은 시각일 때는 더더욱. 그럴 때 수호령은 산책하거나 산책하거나 산책을 했다.
“그리고 꽃 구경도 하고. 호수도 바라보고.”
꽃은 예쁘니까.
호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물결의 변화가 재밌어서.
“또 뭐가 있더라.”
수호령이 배시시 웃었다.
자신이 없을 때 무얼 하냐고 은후가 물었을 때 수호령은 그런 대답을 했었다.
“그래도 요새는 개구리가 자주 놀러와서 좋아.”
오랜 기간 산 세월 때문에 개구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수호령에게 자주 해 준다고.
“그런데 가끔은 쓸쓸한 거 있지.”
몰랐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은후와 개구리를 만났다.
“호수 구경도 예전만큼은 재미가 없더라고.”
항상 은후가 함께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개구리가 최대한 수호령과 함께하고자 했다. 게다가 이번에 덕진공원에 자리를 잡게 된 귀신 서연후가, 그리고 기타 치는 귀신 성호와 시바견 루비가 수호령과 덕진공원에 머물게 되었다.
‘성호는 가끔 나와 움직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무얼 함께 할 것이냐.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수호령은 좋다며 웃었지만, 은후는 그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서연후 또한.
‘루비나 성호는 그렇다 쳐도 말이지.’
성호는 음악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루비는 이따금 같이 놀아 주고, 간식을 주고, 함께 산책하고.
또 뭐가 있으려나.
‘개의 행복에 관해서도 좀 고민해 봐야겠네.’
재밌는 일을 하는 것.
은후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것들은 차차 하나씩 채워 가자.
은후는 여기에 모인 이들이 전부 행복했으면 했다. 정령의 낙원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아무런 걱정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 되기를.
그런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고민하고 사 온 몇 가지 보드게임. 개중에 젠가가 수호령의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었다.
“은후 왔다! 은후도 같이 젠가 하자!”
장례식장에서 기타 연주를 한 뒤 바로 덕진공원에 왔을 때. 수호령은 서연후와 젠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은후가 도착한 걸 알아차리자마자 마중을 나왔다. 그리고 한창 젠가를 하던 곳으로 은후를 이끌었다.
“다음 판부터 같이 할게.”
“좋아!”
젠가. 스와힐리어로 쌓아 올리다.
작은 직육면체 나무가 모여 하나의 기둥을 이루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토막 하나씩 빼서 위로 올리는 게임. 중간에 실수로 토막을 빼내다가 기둥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패배.
“아!”
수호령이 실수했다.
서연후가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이겼군요.’
“쳇쳇. 다음에는 내가 이길 거야! 이번엔 은후도 같이 하는 거지?!”
은후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호 씨도 같이 어떻습니까?”
‘저는 기타를.’
“그러지 마시고 같이 하시죠. 혹시 압니까? 젠가를 하다가 뭔가 음악적 영감이라도 떠오를지.”
‘영감이요?’
“네. 뭐든 경험이지 않습니까?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하면 보통은 즐겁겠죠?”
‘그렇겠죠.’
“즐거운 음악을 만든다면 참고가 될 거고요. 음악에 감정을 담으려면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최고 아닐까요. 단순히 감정만 담는다고 좋은 음악은 아니겠지만요.”
‘그, 알겠습니다.’
은후의 설득에 성호가 넘어갔다.
“오! 성호도 하는 거야? 내가 저번에 그렇게 졸라도 안 하려고 하던데.”
성호가 수호령의 타박에 멋쩍게 웃었다.
“으흠, 다음부터는 뭐든 음악에 도움이 된다고 꼬셔야겠어.”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뭡니까?’
“속이는 거보다 낫지 않을까나.”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넉살 좋게 웃는 수호령의 모습에 성호의 입가에 기분 좋은 감정이 걸렸다.
“아싸! 이번엔 2등! 그런데 은후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하늘에 걸린 엷은 달빛.
왁자지껄한 밤이었다.
* * *
며칠 후 오전 7시.
휴대폰 알람음이 은후의 귀를 때렸다.
‘일어날까.’
은후가 눈을 떴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세계에 가기 전 은후는 잠이 참 많은 타입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아침에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텼다.
5분만 더.
5분만 더.
이따금 알람에 맞춰 놓은 시간보다 일찍 눈을 뜨면 더 잘 수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 다시 잠에 빠졌다.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는 기쁨. 곧 일어나야 한다는 불안감도 있기는 했지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더 잘 수 있다는.’
그런 행복감이 더욱 커서.
하지만 지금 은후는 아니었다. 이세계에서의 삶이 은후의 생활 습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것. 굳이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원하는 시간에 거의 오차 없이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알람을 맞춘 건 옛 추억의 향수 때문이었다.
‘현대 문명이 좋기는 해.’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것부터가 그랬다. 이세계에선 귀족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운 사치였다.
‘따뜻한 물을 쓰기 어려워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위생도 개판이었어.’
은후가 마법사가 되기 이전에 이세계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냄새였다. 사람들이 정말로 잘 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냄새 때문에 정말로 고생했었다.
‘그런 고역도 없었지.’
그렇게 은후가 과거를 떠올리며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수건으로 몸과 머리를 닦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마나로 몸에 있는 물기를 날리면 그만인데.’
굳이 그래야 할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려다 마나를 일으켰다. 현대 문명의 그리움보다 귀찮음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 준비해 놓았던 요리 재료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달걀은 이세계와 똑같네.’
목적은 도시락을 싸며 현대에 있는 식자재의 성분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법과 관련하여 써먹을 구석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어.’
얼마 전, 은후가 서연후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 나온 음식 중 하나 육개장. 그때 육개장에 포함된 고사리를 먹으며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었으니.
‘렌피드를 고사리로 대체할 수 있을 줄은.’
100%는 아니지만, 거의 그에 준하게.
렌피드는 마나를 자극하는 일종의 약초였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기호 식품으로서 차로 우려먹거나 여러 실험을 할 때 자주 사용했다. 그래서 이세계에서는 꽤 귀하게 취급되었다.
‘가격도 비쌌고.’
육개장을 먹었을 때, 은후는 렌피드 차를 마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대로 돌아와 지금까지 고사리를 먹은 적이 없어서 몰랐다. 이걸 계기로 은후는 현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각종 식자재도 전부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겸사겸사 마나를 다루는 연습까지.
‘평소에도 안 쓰는 건 아니지만.’
은후가 손을 쓰지 않고 마나만을 이용해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불 또한 가스레인지가 아닌 마나로 생성해서 사용했다. 마나의 제어라든가 유지하는 연습이랄까.
‘혼자 야영할 때 생각나네.’
요리는 꽤 섬세한 작업이니까.
‘다음은 김을 펼치고.’
은후가 만드는 건 김밥이었다.
‘밥을 펼친 다음에.’
우엉과 단무지를 마나로 만든 바람으로 썰고.
‘좋아.’
다 됐다.
다만 고사리처럼 마법에 이용할 만한 재료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은후는 딱히 아쉽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고사리가 운이 좋은 편이겠지.’
은후가 며칠 전 사 온 도시락통에 김밥을 담았다. 이따가 덕진공원에 가서 피크닉을 할 생각이었다. 덕진공원의 수호령을 비롯한 주민들과 함께. 그래서 양을 꽤 많이 만들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시간이 남았네.’
오늘 들어야 할 교양 수업 시간은 오전 10시.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10분. 학교로 가기엔 이르고 그렇다고 마법 연구를 하자니 별로 내키지 않았다.
‘마법으로 세탁이라도 해야 하나.’
그런데 그것도 뭔가 귀찮아서 세탁은 문명의 힘을 쓰기로 했다. 은후는 빨랫거리를 세탁기에 넣은 후 자취방을 나섰다. 그리고 근처 자주 가는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하고 천천히 거리를 거닐었다.
일부러 느긋하게, 사람들을 구경하며.
대학가 근처답게 학생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다만 종종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 보디 체인지 이후 잘생겨진 얼굴 때문인 건 은후도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오늘은 왠지 모르게 뭔가 거슬렸다. 그래서 은후는 적당히 주위를 살핀 후 은폐 마법을 썼다. 그리고 수업을 째기로 했다.
‘어차피 첫날에 출석만 부르고 말 테니까.’
필수 교양도 아니었다. 그러니 F만 안 맞으면 되었다.
‘시험하고 실습만 안 빠지면 되지.’
은후가 신청한 교양은 승마였다.
1학기에는 필기 시험, 2학기에는 실기 시험이라고 했다.
은후가 승마 교양을 선택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교양 하나를 선택해 학점을 채워야 하긴 하겠는데 만만해 보이는 걸 고른 것. 말을 타는 건 이세계에서 질리도록 해 본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은후다!”
은후는 학교가 아닌 덕진공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은후가 도착하자마자 마중 나온 건 역시나 수호령이었다.
“별일 없었지?”
“응응.”
이르다면 이른 오전, 10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사람들이 꽤 많이 왔어.”
“많이?”
“응. 유치원에서 왔다고 하던데.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어.”
“소풍이라도 나왔나 보네.”
“그런가 봐.”
수호령이 은후와 함께 발걸음을 맞추며 열심히 조잘댔다. 다만 말을 하면서도 잠깐잠깐 멈추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 아이들을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덕진공원 내에서 아이에 한정한다면 수호령의 감각은 은후보다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유독 오늘 신경을 쓰고 있는 건 아마 아이들이 많이 방문해서 그런 것이리라.
“휴우.”
“무슨 일 있어?”
“방금은 어떤 아이가 넘어질 뻔해 가지구 그거 돕느라. 그리고 이거 다 은후 덕분이야.”
“나?”
“응. 원래라면 고작 넘어지는 거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조그마한 상처에 그칠 뿐이니까.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 사고까지 모조리 신경 쓴다면 정작 도와야 할 아이를 돕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조그마한 일까지 신경 써도 딱히 문제가 없게 되었다.
“헤헤.”
수호령이 싱글벙글 웃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이지만 아이를 도왔다는 기쁨에.
“그 아이가 그러더라구. 빨리 엄마가 싸 준 김밥 먹고 싶다고.”
김밥이라.
“우리도 먹을까?”
“응?”
“김밥.”
“은후가 사 오게?”
“사 온 건 아니고.”
은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침 오늘 아침에 김밥을 쌌거든. 같이 먹으려고.”
“나랑?”
“그럼 누구겠어.”
“…….”
수호령이 헤실거리며 은후의 손을 잡고 벽진 폭포 쪽으로 이끌었다. 벽진 폭포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은후를 맞이해 주었다.
‘은후 씨 오셨군요.’
‘왔어요?’
개굴개굴.
‘하이.’
은후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개구리에게 물었다.
“하이?”
‘굿 모닝이라고 하는 편이 좋았으려나?’
영어를 하는 개구리라.
‘아니,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갑자기 웬 영어란 말인가.
‘뭐.’
아무렴 어떤가.
은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들 김밥 어때요?”
‘오!’
‘김밥 좋죠.’
‘김밥인가요. 저는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잘됐네요.’
여름의 끝자락.
아직도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