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구미호와 도깨비는 물론 긴 세월을 살아온 개구리에게도 천도복숭아 나무가 자라나는 건 퍽 신비한 광경이었다. 하물며 근처에 맴도는 강대한 마나의 향연 때문에 더더욱.
“후우.”
은후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여기까지인가.’
천도복숭아 나무는 1미터 남짓까지 자랐다. 원래 은후가 목표로 했던 크기는 1.5미터였지만.
‘더는 무리겠어.’
아무리 천도복숭아 나무가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더 공급한다고 해도 시간을 당기는 건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대체 뭐야?!”
갑자기 호수에서 솟구친 나무에 수호령이 호들갑을 떨었다.
“천도복숭아 나무야.”
“천도복숭아?”
“응. 저번에 개구리랑 먹었던 거 기억나지?”
“응응.”
“그때 얻은 씨앗 중 하나를 여기에 심었어.”
“그럼 나중에 천도복숭아도 먹을 수 있으려나?”
“아마도?”
은후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왜 여기에 천도복숭아 나무를 심었는지 설명했다.
‘수호령도 알고는 있어야 할 테니까.’
은후의 목표, 정령의 낙원.
“이 복숭아나무가 덕진공원의 음기를 흡수할 거야. 그리고 자라나면서 마나를 내뿜을 거고.”
그 마나는 귀신은 물론 수호령이나 개구리와 같은 괴력난신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도깨비 아저씨와 구미호 이모에게도?”
“그렇지. 잘 이해했네.”
그리고.
‘일종의 결계 역할까지.’
아직은 아니지만, 은후는 훗날 덕진공원에 하나의 공간을 창조할 생각이었다. 덕진공원을 베이스로 하여, 괴력난신이 살아갈 수 있는 작은 세계를 말이다.
세계를 나누는 결계를 은후는 복숭아나무로 할 작정이었다. 물론 나무에는 수명도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작다지만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참 많겠어.’
하지만 참 좋은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런 은후의 포부에 다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도깨비, 구미호 부부는 더더욱 그러했다. 은후를 만나기 전까지 죽음을 염두에 두고 받아들이기까지 했었기에.
그래서 욕심이 났다. 은후가 말하는 낙원의 주민이 되고 싶은 욕심이. 그렇다면 지금처럼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낙원이 진짜 낙원이었나.’
덕진공원에 오기 전, 구미호는 내심 은후가 말하는 낙원이 어떤 비유인 줄 알았다. 이처럼 거창하고 장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때는 정말 은후가 간단히 설명해서 그랬다. 게다가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받았다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이 나눠 주는 힘이었다.
‘그런데 천도복숭아 나무라니.’
한때 실재했으나 이제는 사라진 전설 속의 이야기라고만 여겼는데.
구미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일까.’
구미호에게 있어서 은후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중요한 건 좋은 인연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구미호는 은후의 설명이 끝나자 남편인 도깨비와 잠시 의논했다. 그리고 슬쩍 은후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 부부도 나중에 주민으로 받아 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은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은 먼 이야기입니다만.”
연구해야 할 게 많았다. 구해야 할 재료도 그렇고.
“하지만 은후 선생님께서 죽기 전엔 이뤄 내실 생각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은후 선생님입니까?”
“후후.”
구미호가 조그맣게 웃었다.
“크흐.”
옆에서 도깨비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은후에게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하게. 내 꿍쳐 둔 게 좀 많으니 도움이 될 게야. 입주자로서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지.”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마저 마실까요?”
“난 재미있네만.”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길게 보고 가야 하는 일입니다.”
“거참, 그거야 그렇네만.”
도깨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된 것 같자, 수호령이 구미호에게 식혜를 한 잔 새로 받아서 쪼르르 달려왔다.
“은후 식혜 안 마셔 봤지? 진짜 맛있어! 한 번 마셔 봐!”
맛있는 음식. 함께해서 웃을 수 있는 인연들.
왁자지껄한 새벽이었다.
* * *
다음 날 저녁, 오후 7시.
머리맡에서 시끄럽게 울려 대는 휴대폰의 알람을 끄며 은후가 눈을 떴다. 은후는 잠자리를 적당히 정리하고 간단한 세안만 마친 뒤 트레이닝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일몰 시각이었다.
너울너울 떨어지는 주홍 빛깔과 뜨뜻한 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왠지 모르게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잠들 수 있을 듯한 느낌.
‘좀 걸을까.’
오늘은 미루고 미뤘던 양조장 부지를 알아보는 날이었다. 법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관련 서류는 전주 유지 이창석이 알아서 해 주기로 했다. 관련 설비까지도.
‘솔직히 필요 없는데.’
그냥 시중에 파는 적당한 술을 가져와 은후가 제조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대외적인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한 달에 일단 50병.’
용량은 500밀리리터.
은후가 생산하기로 한 술 양이었다. 이처럼 소량 생산을 한 뒤 고가 프리미엄 전략으로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유통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적당히 좀 더 많은 술을 생산하려 했으나 전략을 바꾸었다. 정말로 초고가의 프리미엄 술로 판매하기로. 어차피 술 판매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으니까 말이다.
‘처음에 홍보용으로 재벌이나 고위층 인사에게 술을 뿌리고 경매에 부친다고 했던가.’
그건 이창석이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은후는 신경을 껐다.
나중에 따로 알아보니 이창석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설혹 그 술로 인하여 문제가 생겨도 충분히 대처할 자신이 있었으니.
‘술 제조 비법을 알려 달라고 협박을 한다든가.’
뒷배가 없다면 이세계에서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 대한민국도 좀 덜 하다 뿐이지, 이런 일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까. 예컨대 며칠 전 본 뉴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모 중소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특허를 획득하기 위해 한 대기업이 횡포를 부렸다. 인력을 빼내고 합법과 불법 사이의 경계에서 갖은 훼방을 놓고.
그 결과 중소기업의 사장이 자살했다. 만약 그 사장의 절친한 친구 기자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소리 소문 없이 묻혔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강 자살 사건은 묻혀 버렸고.’
이번에 덕진공원의 주민이 된 서연후.
한강에서 스스로 극단적을 선택한 이의 유가족이 시체를 마주하는 건 병원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고, 그 때문에 기사도 나갔다.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었기에 사람들의 이목도 끌었다.
‘기자들…… 아니지. 그런 놈은 기자도 아니지.’
언제, 어디서 사진을 찍었는지 모르겠다. 또 서연후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기사 내용은 꽤 디테일했다.
도박에 빠진 엄마, 빚에 시달리는 가족, 극단적 선택을 한 둘째 아들.
그 정도만 되어도 주위 사람은 알 수밖에 없었다. 그게 서연후의 가족 이야기라는 걸. 아무리 모자이크를 해도 말이다.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않았건만.
‘쯧.’
은후가 가볍게 혀를 차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은폐 마법을 펼친 후 하늘을 날아올랐다.
‘어디 보자.’
저번에 그래도 몇 군데 점 찍어 뒀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소량의 술만 만들 생각이었기에 굳이 영맥이 흐르는 곳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술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서 그런 장소가 필요했다. 하물며 은후의 목표는 정령들을 위한 낙원을 만드는 일이었으니 무조건 필수였다.
‘여기가 제일 좋겠어.’
전주에 있는 백석 저수지 근처로.
은후는 이창석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꽤 유명한 곳이었지.’
아는 사람은 아는, 일몰 포인트.
노을의 끝 무렵이었다.
‘아쉽네.’
애초에 은후가 자취방을 벗어났을 때부터 노을이 지고 있었기에 그렇다.
‘조만간 시간 나면 다시 또 와 볼까.’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연꽃도 피어 있었다. 덕진공원처럼 많은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시선이 갔다. 이름은 들어 봤지만 귀찮아서 찾지 않은 곳이었던 것 같은데.
‘하기야 그때는.’
이세계에 가기 전에는.
은후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이윽고 완전히 노을이 사라졌고 은후는 하늘을 다시 날았다.
* * *
며칠 후, 개강을 앞둔 은후는 정장을 챙겨 입었다. 지금은 귀신이 되어 덕진공원에 머물고 있는 서연후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날짜와 위치는 기사로 떠서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되었다.
‘나 참.’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은후가 가볍게 혀를 찼다.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그런 것까지 기사로 내보낸다니.
특허 관련 대기업 횡포 건에 대중들의 이목이 쏠려 사건이 묻혔음에도 기사가 올라왔다. 마지막까지 단물을 빨아먹기 위함일 것이다.
‘저기.’
기타 치는 귀신 성호가 은후에게 말을 걸었다.
‘네?’
‘가서 제가 기타를 쳐도 될까요?’
장례식장에 가는 길.
은후는 혼자가 아니었다.
장례직장에서 진혼곡을 연주하기 위함이었다.
‘유족들의 허락이 있다면요.’
은후가 성호에게 했던 약속.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기타를 연주할 수 있도록, 그리고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했으니. 게다가 나쁜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유족들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고, 그래야 한다면 연주를 통해 감정 케어도 어느 정도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은후는 마나로 자신의 의지를 확실하게 전달했다.
‘내키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그런 건 아니지만요. 저야 어디든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칠 수 있으면 상관은 없는데요.’
‘그럼 되었습니다. 물론 신나는 음악은 안 됩니다. 또 희망을 노래해서도 안 되겠죠.’
유족들을 달래고, 또 죽은 이를 위로하는 그러한 곡을.
‘정작 본인은 자신의 장례식에는 참여하기는 싫다고 덕진공원에서 수호령이랑 놀고 있겠지만.’
성호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좀 그래서 그래요.’
‘뭐가요?’
‘연후요. 정말로 안타까운 사연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저는 크게 감흥이 없다고 해야 하나요. 귀신이 되어서 그런 걸까요? 그런 제가 진혼곡을 연주해도 될까 싶어서요.’
은후가 픽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음악과 관련 지어서 생각해 보세요.’
‘음악요?’
‘네.’
‘…….’
음악이라는 집념.
그래서 성호는 음악을 빼면 모든 일에 감정의 동요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기에 음악과 관련 짓는다면 감정이 격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잠시 후, 은후가 성호와 함께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은후는 부의록에 서명 후 조의금을 냈다. 그리고 분향과 헌화를 한 뒤 고인과 상주에게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연후 친구분이신가요?”
서연후의 형 서연석이 은후에게 물었다.
“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 차려 드릴까요?”
“제가 연후랑 약속한 게 있습니다. 제가 기타를 좀 치는데, 장례식장에서 진혼곡을 쳐 달라고 하더군요. 그걸 지켜도 될까요?”
“기타요?”
“네.”
“연후가 그랬어요?”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가족과 상의 좀 하고 오겠습니다. 식사 좀 하고 계시겠어요?”
은후가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예기치 못한 사람과 재회했다.
“은후 맞지?”
“하연이?”
이하연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반갑다고 말하기 좀 그런 곳이네.”
“그러니까. 연후 형이랑 아는 사이였어?”
“한 다리 건너서? 안면이 없는 건 아닌데.”
“그럼?”
“영은이 언니랑 친해서.”
이하연은 서연후의 동생 서영은과 친분이 있었다.
“그나저나 세상 참 좁다. 은후 네가 연후 오빠랑 아는 사이였을 줄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서연석이 나타나 은후에게 말했다.
“가족들과 상의해 봤는데 꼭 부탁드립니다. 그런 말이라도 되도록 들어주고 싶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아는 사이신가요?”
“네, 친구거든요.”
“아하, 그럼 식사 편하게 하세요.”
서연석이 떠난 후 이하연이 물었다.
“무슨 부탁이었는데?”
“장례식장에서 기타를 좀. 연후 형이 부탁했었거든.”
“기타? 기타도 칠 줄 알았어?”
“조금.”
이하연의 눈이 크게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