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전 세계적으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술병에서 무한히 술이 쏟아져 나온다는.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의 전설을 살펴보면 꽤 흔한 이야기였다. 도깨비가 이번에 은후에게 대접한 술이 담긴 호리병이 그런 술병이라고.
“꽤 괜찮제?”
모두가 동의했다.
“흐흐, 이게 힘을 담으면 담을수록 맛도, 양도 좋아진단 말여. 근데 저번에는 영 맛이 별로라 대접을 못 했지.”
벚꽃 향이 참 좋았다.
“한때 내가 잘나갈 때는 일곱 가지 향이 조화롭게 뒤섞여 칠채보주라고도 불렸는데.”
도깨비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개구리가 어깨를 으쓱한 후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시며 은후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수호령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돼?”
“수호령 친구?”
은후가 어깨를 으쓱한 다음 말했다.
“전주의 덕진공원에 있는 인간 아이를 수호하는 정령입니다. 제 친구죠. 일단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거기 귀신 씨.”
“네?”
“그쪽 이야기부터 해 봄이 어떠신가요?”
“저요?”
“네, 사연을 알아야 도울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귀신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꿈을 꾸는 줄로만 알았는데 제가 귀신이 된 것도, 그리고 여러분이 인간이 아닌 것도 현실인가 보군요. 귀신이나 도깨비를 믿지는 않았는데요.”
“저는 인간입니다만?”
“그래요?”
“네, 조금 특별한 재주가 있기는 하지만요.”
“그렇군요.”
하기야 그게 무어 중요할까.
“그래요.”
그리고.
‘도움이라.’
대충 이야기를 들어 봐도 은후가 특별한 힘을 가졌다는 걸 알았다.
‘날 도울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어디 가서 말하지 못하고 가족과 끙끙 앓았던.
“일단, 제 이름은 서연후입니다. 나이는 서른둘이고요. 어렸을 때만 해도 참 행복했죠.”
금실이 좋은 부부.
“형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었는데 모두 사이가 참 좋았어요.”
우애가 넘치는 남매.
“아버지는 개인택시를 하셨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열심히 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는 돈에 걱정이 없었어요.”
할아버지가 꽤 부자였기 때문이다.
“무슨 재벌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이 부자셨어요. 아버지도 저처럼 삼 남매셨는데, 유산을 공평하게 분배받았대요. 상당히 큰 상가 건물 하나, 그리고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안 나지만 땅도 꽤 받으셨고, 하여튼 그랬습니다.”
화목한 가정과 돈에 걱정이 딱히 없는 어린 시절.
“그 행복이 깨진 건 제가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도박에 손을 대셨거든요.”
유산을 까먹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아버지와 제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살던 집까지 담보로 대출을 받으셨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부족해서 일가친척 모두에게 손을 뻗으셨죠.”
한마디로 돈을 빌렸다.
“핑계는 다양했습니다만, 꼬리가 길면 들키는 법이죠. 하여간 나중에는 사채까지 쓰시고 도박을 하셨습니다.”
가족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울며불며 난리 치자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도박에 손을 안 댄다고 하시기도 했는데요.”
하나 결국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고.
“제 명의로도 빚을 내셨고요. 그래서 저는 군대가 편했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었거든요.”
서연후의 20대는 갖은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이자와 원금을 갚고, 중간에 군대에 가고, 그게 전부라고 했다.
“지치더군요.”
그래서 어느 날 보험에 가입했다.
“자살은 대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생명 보험은 좀 다르더라고요. 가입 후 2년이 지나면 자살해도 일반 사망 보험금을 지불한다고 합디다.”
딱 2년에 맞춰 죽기엔 너무 티가 나는 것 같아서 약 3년을 버텼다.
“때가 된 것 같아서 죽었습니다. 보험에 가입하는 순간 뭐랄까, 아니, 그 이전부터 죽어 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멍청하다면 멍청했죠.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차라리 가족과 연을 끊으라고.
혼자서 나와서 살라고.
“근데 그게 안 되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죽음을 택했습니다. 사망 보험금이라도 남긴 건 그냥 제 마음 편하려고.”
그리고 내 죽음이.
“어머니에게 좀 충격을 줘서 정신을 차릴 계기가 되었으면 하기도 했고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도깨비가 슬쩍 눈치를 본 다음 은후와 귀신 서연후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편해지고 싶으셨군요.”
“네, 맞아요. 본심은 그거였어요. 그렇다고 살아가면서 냉정히 가족을 등질 자신도 없었고요.”
그냥.
그냥.
“편해지고 싶었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나머지는 다 곁가지 이유였죠. 사망 보험금이니 어머니에게 충격을 주고 싶었다느니. 그것들도 제 마음이 좀 더 편해지려고.”
그래서.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요.”
“아무리 우연이 겹쳤다지만 미련이 있었을 테니까요.”
“미련요? 가족……들에 관한 미련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핫.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네요.”
“굳이 말씀드리자면 이런 거겠죠. 좀 더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 미련.
파탄 난 가정에서 가족을 버리지 못하고 열심히 빚을 갚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과정에서 서연후가 바랐던 소망이 은연중에 계속 쌓여 만들어진 마음의 형태.
“…….”
서연후가 침묵했다.
“그런데 원망은 없으신가 보군요?”
“어머니에 관해서요?
“네.”
“그러게요. 포기해서 그런 것 같은데요.”
기대도 없으니 실망도 없다.
“어머니라고 그러고 싶었을까요. 솔직히 이해는 잘 안 되는데요. 이제 저는 귀신이니까. 남은 건 산 사람의 몫이겠죠.”
서연후가 씁쓸한 눈동자로 환하게 웃었다.
“정말 편하네요.”
정말로.
이후 한동안 말없이 술잔이 오갔다. 서연후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너무 우울했기에 은후를 제외한 모두가 말을 아꼈다.
충고도, 조언도, 위로도, 이미 죽은 귀신에게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은후가 물었다.
“가족들 소식이 궁금하진 않으신 것 같은데. 맞나요?”
“전혀……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만.”
서연후가 잠깐 멈칫한 후 단호하게 말했다.
“네, 맞아요. 알고 싶지 않네요. 괜히 알면 신경 쓰일 것 같거든요. 죽은 후에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해 드릴까요?”
“어떻게라뇨?”
“보통 귀신이 가진 미련이라면 해결하기 쉽죠. 예컨대 서연후 씨의 미련이 가족이었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서연후의 어머니를 도박에서 떼어 놓고 빚을 해결해 주면 되니까.
“하지만 서연후 씨가 가진 미련은 행복한 인생이죠. 그걸 제가 어떻게 해 드리기는 어려워서요.”
“그, 말씀 중에 죄송한데. 왜 저한테 그렇게 신경 써 주세요?”
서연후는 알았다.
대가 없는 호의란 세상에 거의 없다는 걸.
하물며 은후와 자신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게다가 난 귀신이고.’
은후는 엄청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은후는 그런 서연후의 궁금증을 알아차리고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저라고 얻는 게 없을까요?”
“그런가요?”
“네. 그 과정에서 저도 얻는 게 있으니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
은후가 빙그레 웃은 후 말했다.
“모든 일에 대가를 바라고 합리와 원칙을 따지면 너무 재미없지 않습니까.”
“재미요?”
“네.”
“재미요.”
서연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분이시네요.”
“그런 소리 가끔 듣죠. 좋습니다. 이렇게 해 드리죠. 만약 서연후 씨가 원한다면 성불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성불요?”
“네, 그렇다면 서연후 씨가 죽으면서 바랐던 대로 이번 삶은 그대로 끝날 겁니다. 그리고 100% 확신은 못 하지만 추측건대 윤회의 고리로 돌아가실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그 윤회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혹여 귀신으로서 삶을 좀 더 이어 가고 싶다면 도움을 드리죠.”
서연후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성불은 언제든지 가능하나요?”
“네.”
“그 윤회의 고리라는 데 들어가면 지금 기억은 잃겠죠?”
“당연히.”
서연후가 잠깐 머뭇거린 후 입을 열었다.
“그러면 좀 더 삶을 이어 가도 될까요? 귀신에게 삶이라니, 그것도 좀 웃긴 것 같기는 한데요.”
“얼마든지요.”
“아까 들어 보니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 같은데 괜찮나요?”
“그럼요. 애초에 도와 드리지 않으려고 했다면 이런 제안은 하지도 않았겠죠.”
“……감사합니다.”
자신이 모르는 신기한 세상이 있었다.
은후와 같은 재주를 지닌 자, 도깨비, 구미호, 말을 하는 개구리, 그리고 공원의 수호령이라고 했던가.
‘궁금하네.’
그러한 호기심.
더불어 이 기억으로 조금이나마 행복한 삶을.
‘그런 삶을 조금이라도 살고 싶어.’
그 바람이, 서연후에게 귀신으로라도 삶을 이어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끔 했다.
“여섯 번째 주민이 되겠군요.”
“주민이라뇨?”
“제가 정령들을 위한 낙원을 만들려고 하거든요.”
“낙원요?”
“네, 지금 주민은 저를 포함해서 총 다섯입니다.”
은후 자신, 공원의 수호령, 물과 비를 다루는 개구리, 기타 치는 귀신 성호, 시바견 루비.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개구리가 은후에게 물었다.
“뭐야, 언제 내가 주민이 됐어?”
“그래서 싫어? 싫으면 빼 주고.”
“아니, 싫다는 건 아닌데.”
“그럼 됐네.”
이후 은후가 자신이 구상하는 정령의 낙원에 관해 설명했다.
“거창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별거 아니라면 또 별거 아닙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아닌 이들을 위한 일종의 마을을 만들려고 하거든요.”
은후의 겸손에 도깨비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크, 충분히 거창한 일일세.”
“실제로 그럴 능력도 있으신 분 같은데 대단한 거죠.”
“감사합니다. 그래서 두 분께 조그마한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뇨?”
“제가 만들고자 하는 낙원에 가끔 술집을 열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냥 드리는 부탁은 아닙니다.”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힘을 주겠다고 은후가 약속했다.
“정말인감? 거, 첨 듣는 소린데.”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도깨비와 구미호의 눈엔 의구심이 가득했다. 은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친김에 아예 시범을 보여 드리죠.”
은후가 감정 마나를 움직여 도깨비와 구미호 부부에게 좀 나누어 주었다.
“어떠신가요?”
도깨비가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침묵했다. 구미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런 게 가능하군요.”
“네.”
단순한 힘이라면 모르겠다.
“요괴에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나눠 준다는 말 들어 본 적도, 겪어 본 적도 없어요. 그런 힘이 있는 기물이 있다는 소문은 몇 번 들어 봤지만요.”
은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로 증명이 되었군요.”
“정말로 낙원을 만드실 수 있겠어요.”
“저런, 아까 칭찬은 빈말이셨나요?”
“그렇죠. 솔직히 믿지도 않았고요. 믿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괜히 초치기 싫어서 긍정했던 것뿐.”
구미호가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말했다.
“정말로 만들 수도 있으시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잠깐이라도 함께 가 보시겠습니까? 터가 될 곳에요.”
구미호가 남편 도깨비를 바라봤다.
도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대신에 거 방금처럼 힘 좀 나눠 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가죠.”
“으잉?”
“기다리고 있는 정령이 있거든요.”
“화끈하구마. 그래도 잠깐만 기다리게. 챙길 건 좀 챙겨야지.”
개구리도 다시 전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좀 시간이 남나.’
은후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잠시 나갔다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어디 가게?”
개구리의 질문에 은후가 빙긋 웃은 후 등을 돌렸다.
은후가 밖으로 나서는 까닭은 귀신 서연후의 가족 근황을 확인하고 정신적인 케어를 위함이었으니.
‘함께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아무리 죽음 이후 귀신으로서의 삶에 집중한다고 하였으나, 아예 미련 한 줌 없는 건 아닌 것 같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