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처음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공원의 수호령은 눈빛을 반짝이며 개구리에게 다가갔다. 개구리로부터 적대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호감만 가득하니까.’
수호령은 정령이니 두말할 것도 없고 개구리 역시 존재 자체가 대부분 마나로 이루어져 있는 상태였다.
‘실제 육체는 10% 남짓.’
그 정도 육체를 남겨 구성하고 있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1,000년은 정말로 기나긴 세월이었으니까.
이런 존재들은 서로에게 품는 감정에 관하여 정말로 민감했다. 그래서 그런지 개구리와 공원의 수호령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럼 나이가 1,000살이 넘었다는 거야?”
“그렇지. 자세한 나이는 비밀이지만.”
“오오!”
“엣헴.”
개구리가 으스대며 말했다.
“변신도 할 수 있어.”
“변신?”
“보여 줄까?”
“응응!”
개구리가 폴짝 뛰었다. 그리고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 광경에 수호령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인간!”
“인간은 아니지. 그냥 형상이 그런 거지, 본질은 여전히 개구리야.”
“그래서 뭔가 이상해! 보이는 건 분명히 인간인 것 같은데 느껴지는 건 개구리야!”
“아니, 그건 당연한 건데…….”
개구리가 수호령에게 딱히 맞춰 주는 건 아닌 것 같고.
‘정신연령 자체는 크게 차이가 안 나 보이네.’
인간에 비유하자면 서너 살 정도 차이가 나는 형과 동생의 느낌이랄까.
“……그리고 물과 비를 다룰 수 있어.”
“와아! 그것도 보여 줄 수 있어?”
수호령의 요청에 개구리가 잠시 주위를 쓱 둘러봤다.
“저기로 갈까?”
“어디?”
“저기.”
“응응.”
덕진공원 호수 다리 중간에 위치한 전각 위. 그곳에 가서 개구리가 물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호수를 도화지라고 생각해 봐. 연꽃은 장식이고.”
“응.”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그려지는 것은 수호령과 개구리 그리고 은후였다.
“날 잊지는 않았나 보네?”
슬쩍 뒤를 따라온 은후가 짓궂게 물었다.
“에헤이, 친구를 잊을 수가 있나.”
“은후랑 개구리는 친구야?”
“그치, 친구지.”
“나나! 나도! 나도 친구 할래!”
“좋아. 하자, 친구.”
개구리의 흔쾌한 대답에 수호령이 활짝 웃었다. 그러자 개구리 또한 씩 웃으며 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복숭아였다.
“요게 천도복숭아란 건데 말이야, 진짜배기 천상의 복숭아라구.”
“천상? 옥황상제가 사는 곳?”
“아는구나?”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개구리가 꺼낸 복숭아는 세 개.
“몇 개 안 남아서 진짜 진짜 아껴서 먹으려고 했는데. 오늘 같은 날을 기념하기엔 딱 좋겠지? 복숭아나무 아래의 맹세 같은 건 아니지만.”
개구리가 복숭아를 하나씩 나누며 말했다.
“껍질째 먹어. 껍질도 맛있으니까.”
“진짜 맛있어! 치킨보다 맛있어!”
“치킨?”
“치킨 몰라?”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개구리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갔다.
“나중에 같이 먹자! 은후가 사다 줄 거야! 아마……도?”
“왜 말을 흐려.”
“아니, 맨날 얻어먹는 것 같아서 조옴 미안해서 그렇지.”
“그 정도는 얼마든지 말해.”
“나도?”
“그래, 너도.”
개구리가 활짝 웃었다.
‘먹는 것쯤이야.’
당장 손에 쥔 천도복숭아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평생 치킨을 사 줘도 거스름돈이 너무 많이 남을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연구하고 싶은데.’
하긴, 그건 멋이 없었다.
정말로 큰맘 먹고 꺼낸 것 같은데.
그래서 은후가 피식 웃고선 복숭아 한입을 베어 물었다. 그러자 확 하고 입안에서 그득한 마나가 퍼졌다. 거기엔 복숭아 향이 가득했다.
‘하.’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게다가 마나에 이런 향이라니.’
음식에 마나를 불어넣어서 맛을 변하게 하거나 향기를 증폭하거나, 그런 일은 은후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다채로운 향을 풍기게끔 하는 건 무리였다.
‘천상이 그 천상이 아니었나.’
천상의 맛이라 함은 흔히 하늘 위를 뜻하지 않던가. 하지만 은후의 입에는 천 개의 향이 맴돌고 있었다. 대개 이렇게 향이 많이 섞이면 제대로 된 향이 느껴지지 않아 무색무취이기 마련인데.
‘아니면 역겹거나.’
한때 음식에 이런저런 실험을 해 봐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천도복숭아는 아니었다. 정말로 맛이 아름다웠다. 그 외에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보관해서 향이나 맛이 힘이 좀 약해진 것 같기는 한데.”
개구리의 말은 은후를 더 기가 차게 했다.
수호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개구리에게 물었다.
“이, 이게?”
“응, 그것도 꽤 많이. 게다가 보통 인간이 먹으면 무병장수할 수 있고, 무당이나 도사가 먹으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맛있는 과일일 뿐이거든.”
은후는 개구리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잠자코 복숭아를 즐겼다. 마법으로 분석하고 호기심을 채우기엔 좀 그랬으니까. 그래서 그저 툭 한마디 내뱉었다.
“정말로 맛있네. 내가 먹어 본 어떤 음식이랑 비슷해.”
“예전에 천상의 음식을 먹어 본 적 있어?”
“그건 아니고.”
“그럼?”
은후가 애매하게 웃었다.
이세계에서 살아가던 초기, 추운 어느 겨울날.
굶어 죽기 일보 직전 먹었던 따뜻한 허여멀건한 죽, 그 죽 한 그릇을 은후는 지금까지 잊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몰랐지.’
죽어 가던 거지 하나에게 따뜻함을 베푼 마을의 한 포목점 주인 때문에 트롤 퇴치 의뢰를 받았다는 걸. 그 일대를 지배하는 영주에게 밉보였음에도.
‘그때의 맛과 비슷하지는…… 않나.’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이 복숭아가 한 수, 아니, 몇 수 위였다.
“이거 다음에 또 먹을 수 있어?”
“그, 글쎄. 아마도?”
수호령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아껴 먹었다.
오물오물.
개구리의 난감함을 눈치챘기에 복숭아에 관한 질문은 더 하지 않고서. 그런 수호령의 배려 덕분에 개구리도 내심 안심하며 복숭아를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씨앗이 있네.’
키울 수 있으려나.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청명한 하늘.
“그래서 내가 사는 곳은 지장님께서 만들어 주신 곳인데.”
“응응.”
친구가 된 개구리와 수호령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호수에 그려졌던 그림이 연꽃 사이사이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 * *
은후는 수호령과 개구리와 헤어지기 전, 천도복숭아 씨앗을 세 개 얻을 수 있었다. 굳이 씨앗을 받아 가려는 은후에게 개구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씨앗을 심어 봤자 제대로 자랄 수 없을 텐데?”
“심어 봤어?”
“그럼. 그런데 나무는 자라도 열매는 전혀 안 맺히더라고. 그리 오래 살지도 못했고. 한 200년 정도 살았나?”
보통 복숭아나무의 수명은 20년에서 30년.
“천상에서는 시들지 않고 용궁에서는 2,000년 넘게 산다고 들었어.”
“누구에게?”
“스님에게. 유정이라고.”
“유정?”
“응, 사명당이라면 꽤 유명했는데. 사명 대사 모르려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은후가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에서 그 넉 자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알지.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거든.”
“헤에, 세월이 엄청나게 흘렀는데도 여전히 유정의 이름이 전해지는구나. 하여간 유정이 그랬어. 지상의 환경이 좋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그래도 씨앗을 심고 나무가 자라나면 그 일대의 토지가 굉장히 좋아지거든. 그래서 과거 인연을 맺은 인간에게 몇 번 선물로 준 적도 있어.”
개구리가 사명 대사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복숭아 씨앗 덕분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복숭아나무가 갖는 여러 가지 효능들이 있었다.
“근데 그 씨앗은 별 효과가 없을 거야. 아까 말했다시피 지상에 보관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내가 나름대로 노력하기는 했는데 맛과 향을 보존하는 게 다였거든.”
“또 뭔가 아는 거 있으면 알려 줄래?”
“어렵지 않지.”
은후는 복숭아에 관한 개구리의 말을 머리에 잘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연구를 시작했다. 다른 연구 거리도 꽤 쌓여 있지만 당장에 천도복숭아 씨앗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진짜배기 천상에서 온 과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외에 궁금한 건 또 있었다.
‘개구리가 말하는 천상은 정령계와 같은 곳일까.’
그 단서를 잡을 수 있을까. 갈 수는 있을까.
또.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능하다면 어머니에게도 드리고 싶고.’
그게 불가능은 아닐 거란 마법사로서의 직감. 그 때문에 은후는 천도복숭아 씨앗을 연구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더라?’
전화가 올 사람은 어머니 혹은 친구 이하연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임서혁.
예상과 다른 이름에 은후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
동아리 후배였다, 자신을 꽤 잘 따르던.
“여보세요?”
- 형.
그리고 대학교 졸업 이후에도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한 인연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도움도 이래저래 받았었고. 물론 주기도 했다. 그래서 은후는 연구를 방해당했다는 생각을 금세 지우고선 유쾌하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 무슨 일이긴요. 그냥 안부차 전화해 봤죠.
“안부는 무슨.”
- 에헤이, 서운하게 그렇게 또 말한다. 요새 게임도 접속 안 하시고 문자도 잘 안 보시는 것 같아서 전화 함 해 봤죠. 왠지 내일 약속도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아서요.
“약속?”
이 시기에 무슨 약속을 했더라.
아.
“수강 신청?”
- 네네.
원래 더 일찍이 해야 했을 수강 신청. 하지만 학교 내에 무슨 전산 오류 때문에 그 시기가 뒤로 밀렸다.
“내일 PC방에서 같이 하기로 했던가?”
- 기억하고 계시네요.
여덟 시간 뒤였던가.
“알았어. 장소는 맨날 가던 피시방이지?”
- 아뇨.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며칠 전에 새로 피시방 생겼더라고요. 위치는 문자 찍어 드릴게요. 지금 친구들이랑 있는데 확실히 새거가 좋긴 좋은가 봐요. 컴퓨터도 신식이고 인터넷도 엄청 빠르고.
“밤새우게?”
- 그쵸. 형도 할 거 없으면 나오실래요?
“됐어. 게임 접었거든.”
- 에이, 형이 게임을 접어요?
“진짜로 접었어.”
- 헐.
“하여간 그렇게 됐다.”
- 심각한 일이에요?
“딱히 심각한 일은 아닌데.”
- 그, 제가 돈은 못 빌려 드려도 술은 한잔 사 드릴 수 있거든요? 듣는 것도 잘하고. 원래 고민은 어디 털어놓아야 좀 풀린다잖아요.
은후가 유쾌하게 웃으며 그런 게 아니라며 전화를 끊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만나서 해 준다면서. 그리고 휴대폰 알람을 맞춘 뒤 다시 복숭아 씨앗 연구를 시작했다.
‘에이.’
그런데 왠지 모르게 김이 빠졌다.
며칠간 밤을 새워 연구했기 때문일까. 흐름이 끊기니 다시 연구에 몰입하기 어려웠던 것. 물론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릴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은후가 기지개를 켜고 가볍게 씻었다.
‘산책이라도 좀 하다가 PC방으로 갈까.’
마침 비도 내리기 시작했고 말이다.
‘날 비인가.’
돗자리를 칠 때 날실로 쓰는 노끈처럼 가늘게 내리는 비.
‘여름은 여름이구나.’
비가 참 자주 내렸다.
은후는 비가 내리는 날이 좋았다. 그래서 여름을 좋아했다. 마법사가 된 이래 더위나 습도, 그로부터 비롯되는 땀이나 날벌레 따위는 마법으로 커버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그리고.’
마나가 미묘하게 좀 더 풍부해져서.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확실해.’
아주 미약한 차이지만.
‘그래.’
폐지 줍는 노인도, 우산 요괴도, 개구리도.
‘비가 오는 날에 만났지.’
그 미약함이 요괴나 정령들이 입장에선 매우 큰 차이였을 것이다.
‘도깨비 구미호 부부도 그런 말을 했었고.’
비가 오는 날이 활동하기 좀 더 편하다는.
은후가 우산을 쓰고 자취방을 나섰다. 그리고 덕진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어느샌가 1,000년 묵은 개구리가 나타나서 물었다.
개굴개굴.
“우산은 굳이 필요 없지 않아?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있는 것 같던데.”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운치가 없잖아.”
“그건 그래.”
“그런데 넌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비가 오는 날이라면. 그나저나 치킨은 언제 사 줄 거야?”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오늘 어때?”
“좋지!”
가는 길에 맛있는 치킨집 하나가 있었다.
개굴개굴.
개구리가 기쁘게 울었다.
‘응?’
치킨 한 마리를 포장하려던 은후는 그 울음소리에서 미묘함을 느꼈다.
‘짓궂음?’
뭔가 꿍꿍이가 있나.
‘나쁜 의도는 아닌 것 같으니.’
잠시 후 은후가 픽 웃은 후 치킨을 포장해서 나왔다. 그런데 정말로 놀랄 만한 일이 펼쳐졌다.
“짜잔!”
공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수호령이 치킨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어때! 놀랐지?”
“조금.”
은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체 어떻게?
“헤헤, 비가 오는 날에만. 그리고 개구리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나도 나올 수 있게 됐어!”
하지만 그런 호기심보다 기쁜 건 제한적이나마 공원의 수호령이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은후가 활짝 웃으며 우산을 씌워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