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그날 밤, 은후는 비단 천 나침반을 들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걷는 것보다 나는 게 편하고 빠르지.’
이럴 때면 새삼스레 부유 마법을 죽자 살자 익힌 보람이 있었다.
‘생각만큼 선호되는 마법은 아니었으니까.’
은후처럼 자유자재로 부유 마법을 쓰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들일 정도라면 보통의 마법사는 대개 다른 마법을 익히기 마련이었고 말이다.
‘나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복수를 위해서.
‘생각해서 뭐 하나.’
은후가 머리를 휘휘 내저으며 떠오르려던 과거의 기억을 뇌리 저편 너머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 비단 천 나침반을 확인하며 남쪽으로 날아갔다.
‘분명히 나침반이 가리키는 인연이나 보물이 가늘게 떨린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날아가다 보면 언젠가 발견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나침반에는 거리가 표시되지 않았다. 그래서 은후는 이 탐색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염려했다.
‘풍경은 좋네.’
기분도 좋고. 며칠 전 용산역에서 하늘을 날았을 때처럼.
비록 시간은 달랐지만 이렇게 한밤중에 하늘을 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괜찮을지도.’
보름달이었다. 거기에 구름이 살짝 끼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환하지도 그리 적지도 않은, 한마디로 적절한 빛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하늘을 날고 있는 내 기준에서의 이야기지만.’
지상에서 바라보기엔 보름달치고 광량이 적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지상에서 쬐는 가느다란 달빛도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으니.
‘좋다.’
정말로.
그렇게 얼마나 날았을까.
비단 천의 나침반은 여전했다.
‘시간이 좀 늦었는데.’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속도를 높이면 좀 더 탐색해도 되겠지만.’
굳이 빠르게 날고 싶지 않았다. 보름달의 풍취를 느끼려면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 할 테니까.
‘내일 탐색에 속도를 높이자.’
오늘은 느긋하게.
‘술이나 한잔.’
용산역에서 하늘을 날 때 술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후, 은후는 리어카에 술과 잔을 구비해 두었다.
‘안주는 필요 없으려나.’
멋진 하늘과 달이 있으니.
‘마셔 볼까.’
좋구나.
은후가 마시고 있는 술의 이름은 풍정사계-하(夏)였다. 그 이름답게 네 계절을 상징하는 술로서 종류가 넷이었다. 개중 하(夏)는 과하주에 해당했다.
약주에 소주를 섞어 빚는 술로서 여름을 날 수 있다고 하여 과하주. 약주의 달콤함과 소주의 씁쓸함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며 은후의 혀를 적셨다.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을 보낼까.’
음주인 상태로 하늘을 나는 것도 좀 그러니까. 엄청나게 위급하다거나 꼭 필요한 일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이런 날도 필요한 법이지.’
어느 이름 모를 산속, 은후가 술을 느긋하게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 * *
다음 날, 은후는 아침 해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당연히 은폐 마법도 함께 펼쳤기에 사람들의 눈에 띄는 불상사는 없었다.
‘배고프네.’
어쩐다. 식당을 찾아 식사라도 할까. 아니면 좀 더 날까.
‘속도를 좀 높여…… 어?’
그때, 비단 천이 변했다.
글씨가 반쯤 돌아온 것이다. 이는 이 근처 어딘가에 보물 혹은 인연이 있다는 의미였다.
‘절?’
은후가 땅을 내려다봤을 때 비친 건 절이었다.
‘금산사? 모악산이었나.’
미륵전에 걸린 플래카드에 금산사 미륵 강탄재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은후는 이 절이 어떤 곳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 어머니랑 왔었는데.’
은후가 군대에 가기 직전이었다.
은후의 어머니는 아들이 군대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금산사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때 은후도 함께였다.
군대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평소에 찾지 않은 절을 찾고 기도를 올린 것이다. 겸사겸사 어머니와 나들이도 겸해서.
‘참 오래전 일이네.’
잠깐 옛 추억에 잠겼다. 그러다가 은후는 피식 웃고는 금산사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나침반이 정확히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다.
‘글씨가 원래대로 돌아왔어.’
이곳이라는 의미였다.
‘석등.’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이 석등에 보물이 있단 소리일까?’
석등 자체가 보물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은은하게 마나가 어려 있기는 했지만.
‘잘 모르겠어. 도깨비가 설명한 나침반의 기능이 맞다면 나와 수호령에게 도움이 되는 보물 또는 인연이 여기에 있다는 소린데.’
이모저모 살펴도 잘 모르겠다. 혹시나 싶어 은후가 비단 천 나침반을 다시 살펴보니 천에는 다시 원래대로 글씨가 돌아와 있었다. 제 역할은 다 했다는 듯.
은후는 좀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석등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주위를 쓱 살핀 후 은폐 마법을 풀었다. 모든 신경을 석등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이른 아침에 손님이 계셨군요.”
은후가 석등 앞에 얼마나 서 있었을까. 멀찍이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이지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스님이었다, 인자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인자하다는 표현은 얼굴에 쓰기 마련이지만 은후는 자연스레 스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런 비유가 떠올랐다.
“석등에 꽤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집중해서 바라보시는 것이. 어디 사학과라도 다니시는지요?”
“심리상담학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대답에 스님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거참, 혹 그게 어떤 석등이신지는 아시고 보시는 건지요?”
“아니요. 그저 눈에 계속 밟혀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안내판은…… 아이쿠, 안내판은 보수한다고 잠시 치웠지요.”
“역사가 깊은 석등인가요? 꽤 오래되어 보이는데요.”
“그렇지요. 고려 시대에 지어졌으니. 나라에서도 보물로 인정해 주었지요. 용도는 부처님과 조사 스님께 등불을 공양하기 위한 석등이고요.”
대개 금당이나 부도전 앞에 자리 잡는다고.
“나름 전설도 전해져 내려오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다지 유명한 이야기는 아니어서 인터넷에도 올라가 있지 않더군요.”
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님이 말을 이었다.
“이무기가 1,000년을 수행하면 용이 된다는 말은 한 번쯤 들어 보셨지요?”
“네.”
“이 석등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용이 되고 싶은 개구리가 있었다고 합디다.”
“개구리요?”
“네, 개구리요.”
개구리가 용이라.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개구리는 용이 될 수 없었다고 하지요. 1,000년을 수행했는데도요. 하지만 긴 세월을 수행한 덕분에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합니다.”
물과 비를 다루는.
“용이 되는 것에 실패한 개구리는 극히 난폭해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피해도 끼쳤고요.”
물길을 비틀어 농사를 망치거나, 혹은 시도 때도 없이 비를 내리는 등.
“기분이 좋으면 좋아서, 기분이 나쁘면 나빠서, 그냥 내키는 대로 비를 내려서 이 일대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걸 보다 못한 보살이 개구리를 훈계했다고.
“어떤 보살님이 나서셨는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훈계로만 끝낸 건 그 개구리가 생명을 해하지는 않아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개구리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보살이 이 석등 안쪽에 머물 곳을 만들어 주었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지요. 네가 용이 되지 못한 까닭은 욕망에 너무 집착하고 있어서라고요.”
개구리는 보살의 말에서 희망을 품었다.
“그 집착을 버리면 용이 될 수 있을 터이니 이곳에서 덕을 쌓으며 수행을 하라는 보살의 제안을 개구리는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석등은 등불을 공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구리의 쉼터이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에 가끔 석등을 통해 개구리의 쉼터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얕은 호수가 있는데 들어가면 항상 밤하늘의 풍경이 펼쳐져 있어서 별과 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금산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인데 스승님께서도 처음엔 믿지 않으셨다고 했지요.”
“나중에는 믿으셨다는 말씀입니까?”
“네. 실제로 제 스승님께서 개구리의 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스님은 스승님이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된 자신에게 재미로 들려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닙니다.”
스님은 뭔가 좀 더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내젓고 입을 열었다.
“제 이야기가 지루하시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재밌었습니다.”
또 도움도 되었고 말이다.
‘개구리.’
아마 나침반이 가리킨 인연이지 않을까.
‘그나저나 1,000년 넘게 수행한 개구리라.’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까.
있으니 나침반이 이곳을 가리켰겠지 싶었다.
“그나저나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입니다.”
“그럼 함께 어떠신지요? 이것도 인연인데. 물론 맛은 좀 심심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시장이 반찬인데요.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요.”
은후의 답변에 스님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실까요?”
은후가 스님을 뒤따르며 마지막으로 흘끗 석등을 바라봤다.
‘비가 오는 날이라.’
오늘은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은데.
* * *
절에서 먹는 밥은 신선하고 심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까 은후가 말했던 대로 시장이 반찬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정도 더 굶고 먹었으면.’
좀 과장해서 천상의 맛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굶주림은 사람의 입맛을 돋우기 마련이었다. 은후에게 있어서 요 며칠은 그런 나날들이었다.
며칠 이내에 비가 올 터이니 오랜만에 산에서 마법 수련을 한 것이다. 물만 마시고 굶으면서. 그 과정은 몸의 감각을 좀 더 날카롭게 해 주었다.
‘며칠 이내에 비가 올 테니까.’
딱히 예정된 일정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이곳에서 시간을 죽치기도 그래서. 그래서 마법 수련을 했다. 그동안 연구한 것들로부터 얻은 깨달음도 정리하면서.
물론 자취방으로 돌아갔다가 와도 되겠지만 그래 봐야 마법 연구 말고 딱히 할 것도 없을 터. 그리고 이따금 이렇게 환경을 바꾸는 것도 마법에 도움이 될 터이니.
그 예상은 적중했다.
‘아주 조금.’
살짝, 은후의 마법 실력이 진보했다.
미세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이 쌓이고 쌓여 경지가 오르는 법이었다.
“후우.”
은후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러자 은후 근처에 머물렀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서 날아갔다. 새들은 조금 전까지 자연과 동화된 상태의 은후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슬슬 내리려나.’
비가.
은후가 은폐 마법을 쓴 뒤 다시 금산사의 석등으로 향했다.
잠시 후, 비가 내기 시작했다.
툭. 툭. 툭.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이윽고 셀 수 없이 빗방울들이 땅에 쏟아졌다. 그러자 석등에 어렸던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개굴개굴.
그리고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통 일반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마나를 인식하고 느끼지 못하면.’
들을 수 없는 소리.
개굴개굴.
석등에서 미약한 빛이 어렸다. 이 또한 마나를 다뤄야만 볼 수 있는 빛이었다.
“개굴?”
그 빛에서 작은 강아지 크기만 한 개구리가 나타났다. 은후가 개구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개구리가 울었다.
“개굴개굴.”
개구리 울음소리에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내 모습이 보이냐는.
내 목소리가 들리냐는.
“보이고 들려.”
은후가 답했다.
“개굴!”
개구리가 답했다.
지화자!
개구리가 기뻐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비가 좀 더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은후가 예기치 못한 사태에 살짝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