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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36화 (36/170)

제36화

갑자기 역 주위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 전체가 하얗게 물드는 느낌.

거리를 항상 환하게 비추던 불빛도,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가 달리는 소리도, 소리소문없이 스며든 안개에 취해 비틀거리는 듯했다.

끼익.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용산역 지하철역 1번 출구에서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다.

“어머, 혹시 손님이신가요?”

“글쎄요. 딱히 이곳을 찾으려던 건 아니었는데요.”

몸 전체가 마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을 보아하니 일단 정령이라고 봐야 할 존재였다.

‘적대감은…… 없나.’

애초에 존재 자체가 마나로 이루어져 있고 실재하는 육체가 없었다. 그래서 뛰어난 마법사, 특히 감정 마나를 다루는 흑마법사 앞에서라면 정령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기는 무슨 가게죠?”

“술집이랄까요.”

여인이 흐릿하게 웃었다.

“이렇게 손님이 온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아직 손님이라고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만.”

“잠깐이라도 들렀다 가시면 안 될까요?”

“…….”

여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주 미약한 기대감과 절박함.

‘그리고 체념.’

이런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

그래. 이세계에서 마법사가 막 된 직후, 은혜를 갚기 위해 트롤 토벌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다.

‘무척 자그마한 마을이었지.’

다만 문제점이 있었다. 마을이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영주에게 밉보였다는 것. 그래서 제대로 된 지원은 없었다. 알아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영주에게 그 마을이 밉보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웬만한 용병들은 의뢰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은후도 일전에 빚진 은혜가 아니었다면 외면했을 것이다.

‘그때 그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그랬지.’

어쩐다.

딱히 은혜를 입은 기억은 없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찝찝한 목소리와 눈빛.

“좋아요.”

“아, 감사합니다.”

결국 은후가 허락했다.

여인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 * *

안으로 들어가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술집이라고 하더니.’

주막이었다. 마치 조선 시대로 타입 슬립한 것 같은. 그래서 영화 촬영 현장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진짜로 손님이 왔디야?”

“네. 제가 말했잖아요. 저희 가게 문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갑자기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은후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나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깨비?’

머리 양쪽에 나 있는 두 개의 뿔.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일본 도깨비의 모습이었다.

“어서 오슈.”

“아, 네.”

“우리 집이 장사를 못 한 지 오래되어서 술은 한 종류밖에 안 남았쇼. 반주도 파전 하나뿐이고. 그거로 괜찮겠소?”

“그럼요.”

도깨비가 전통 막걸리와 파전 하나를 금방 내왔다. 그때 은후는 지하철역 입구에서 솔솔 풍기던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파전 냄새였나.’

하지만 음식 냄새가 어찌 문을 넘어 역 입구 주위에 진하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일까.

“한잔하슈.”

“그럼 감사히.”

마법으로 혹시 모를 위험을 체크한 은후는 막걸리를 한 잔 마셨다.

‘좋네.’

다소 심심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한잔하시렵니까?”

“좋슈.”

홀로 술잔을 기울이기 적적해 음식과 술을 내온 뒤 멀뚱멀뚱 서 있던 도깨비에게 술을 권했다. 도깨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은후의 앞에 철퍼덕 앉았다.

자신을 가게로 안내했던 묘령의 여인도 은근슬쩍 도깨비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한동안 셋은 술잔을 조용히 기울였다. 다만 딱히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래도 불편하지는 않네.’

그저 서로가 술잔을 기울이는 것뿐.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막 잔이네요.”

“술을 더 내오고 싶지만 남은 게 없쇼.”

“그런가요?”

“그렇지.”

“그럼 마지막 잔은 오늘 만남에 대한 건배로.”

그런 은후의 말에 도깨비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담담하기 그지없던 여인의 표정에도 생기가 돌았다.

“건배.”

“흐, 건배!”

서로의 잔이 맞닿으며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두 분은 어떤 분들입니까?”

“나야 뭐 생긴 대로 도깨비고, 임자는 구미호요.”

사람이 아닌 건 만나자마자 알았다. 서로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두 존재가 부부일 거라고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도깨비와 구미호 부부라니. 퍽 특이한 조합이었다.

“여기서 술집을 운영하고 계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뭐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슈? 사람이 아닌 존재도 그렇지.”

구미호가 도깨비의 말을 이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로부터 저희는 잊혀져만 갔어요.”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에 따라 사그라드는 믿음.

요괴의 존재는 사람의 믿음으로부터 기반되는 것이니.

“당연히 힘이 약해졌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날뛸 수도 없게 되었고요.”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이끌어 내려면 모습을 드러내야만 했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했다.

“한때는 날뛰셨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생존의 문제였으니까요.”

개중 제일 쉬운 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도 전 나름 보편적인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착한 구미호였어요. 인간의 기준에서 악인이 아니면 간을 빼 먹거나 죽이지는 않았으니까요. 가볍게 놀래거나 겁을 준 적은 있지만요.”

“흐, 나야 그런 건 상관 안 했소이다만.”

도깨비가 비릿하게 웃었다.

“물론 인간 친구도 있었소. 모든 인간과 적대 관계는 아니었슈.”

인간을 굳이 죽이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는 걸 은후는 알고 있었다. 어쨌건 눈앞에 있는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쾌락을 위해서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쇼.”

“그렇군요.”

담담한 은후의 반응에 도깨비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난하지 않수?”

“저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글쎄요, 굳이? 당장 저를 공격하시는 것도 아닌데요.”

도깨비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오랜만에 온 손님이 말이 좀 통하는 인간이었구려.”

“인간이란 종 전체를 적대하고 있다면 말이 좀 달라지겠습니다만. 인간 친구도 있다고 하셨으니.”

구미호가 도깨비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오랜만에 온 손님에게 무슨 무례예요.”

“아니, 아니. 그래도 말이 통하는 인간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녀? 거, 아닌 것 같지만 요괴라면 전부 죽여야 한다는 부류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제가 나타났을 때 바로 공격했겠죠.”

“으흠. 그거야 임자 말이 맞는데.”

구미호가 도깨비를 째려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간 시간이 흐를수록 요괴의 힘은 약해졌고 인간의 힘은 강대해졌어요. 지금에 와서는 존재 자체를 걱정해야 할 시대가 되었고요.”

구미호가 눈을 가늘게 만들며 말을 이었다.

“이 부분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네요.”

“말씀하신 건 이 시대의 능력자들에겐 상식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가요.”

세월이 무상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었는데.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요괴의 존재가 사람들의 믿음에 기반한다는 건 꽤 큰 비밀이었고요.”

100년 전. 그즈음 술집을 차렸다고 했다. 요괴 부부가 운영하는 술집이라고 하면 꽤 유명했다고.

“가끔 영능에 소질이 있는 일반인들도 오고. 무당이나 도사들도 오고. 스님들도 오고. 그러다가 일본 강점기라고 하던가요? 왜국이 조선을 쳐들어와서 지배하던 때요.”

“네.”

“그때 저희는 조선인 편에 섰어요. 꽤 도움을 주었죠. 그래서 해방 이후엔 편했어요. 조선인들은 저희를 위협하지 않았거든요. 이용하려는 작자들은 꽤 있었지만.”

“내 방망이로 머리를 두들겨 팬 놈들도 상당하지.”

“그 성질은 몇백 년이 지나도 안 바뀌네요.”

“내가 도깨비인 이상 바뀔 수가 있나? 성급하고 내기 좋아하고.”

“장난기도 많죠.”

도깨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래서 싫어?”

“흥. 싫다고는 안 했어요. 싫었으면 결혼도 안 했죠. 중간에 싫어졌으면 진즉 떠났을 거고요. 그래도 누군지 좀 봐 가면서 그래요. 오늘은 성질 좀 죽인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거, 분위기가 예전 인간 우두머리였던 구 선생이랑 비슷해서 말이지.”

서로 티격태격 꽁냥거리는 모습에 은후는 속으로 픽 웃다가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구 선생?’

설마.

“김구 선생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백범을 말하는 거라면 맞쇼. 애초에 그 양반 아니었으면 우리가 술집을 차릴 생각도 못 했을걸. 보통 인간은 아니었어, 큭큭.”

대한 독립을 위해 도움을 주고 있으니 요괴라도 마땅히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사실 나는 조선인이든 왜놈들이든 아무래도 좋았거든. 태생도 한반도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일본에서 말하는 오니(귀신)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반도에서 사람들의 인식대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 임자 아니었으면 굳이 조선인 편에 서지 않았을 거야. 그 이야기를 듣더니 구 선생이 이렇게 말하더군. 아내를 참 잘 두었다고. 그 덕분에 도깨비 친구가 생겼다고 말이야.”

그렇게 자리를 잡고 가게를 운영하고.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잊히지 않도록 애쓰고.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 노력도 거의 소용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무당이니 도사니, 그런 인간들도 거의 사라졌응께.”

“영능에 소질이 있는 인간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비축해 둔 힘이 있어서 버티고는 있지만요.”

“그래서 저를?”

“네. 저희 가게를 인지한 거로 보였으니까요. 그러니 이따금 놀러 오시면 안 될까요? 기왕이면 친구분들도 함께 오시면 좋겠는데요.”

“생각난다면 이따금 그러겠습니다.”

그런 은후의 말에 구미호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어, 정확히 언제쯤?”

“글쎄요?”

“그.”

“제가 두 분을 인지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게 아닌지?”

은후의 말에 구미호가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도깨비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하여간 임자는. 이런 사람들한테는 그냥 대놓고 말하는 게 좋다니께. 거, 인간 선생.”

인간 선생이라니.

“진짜 예전에나 볼 수 있었던 진짜 능력자인 것 같은데 도움 좀 주시구려. 당신 같은 이들이 여기 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거든.”

“그렇습니까?”

“그렇지. 이 술집이 보통 술집이 아니거든. 이 술집 지을 때 능력 있는 인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 그래서 여기에 인간들이 오면 뭐라고 해야 하지? 하여간 자세한 원리는 기억이 안 나는데 머무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힘이 된다고.”

특히 은후처럼 강대한 능력자라면 더더욱.

‘그런 비밀이 숨어 있었나. 딱히 내 마나를 빼앗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건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는데.

“거, 그리고 꿍쳐 둔 것도 좀 주지. 인간은 재물을 좋아하지 않나? 그런데 보아하니 금전운은 가득해서 금괴 같은 건 필요 없어 보이고.”

“그걸 아십니까?”

“내가 그래도 한때 진짜 잘나가던 도깨비였는데 알고말고. 아마 한반도에 남은 유일한 도깨비가 나일걸?”

도깨비가 주섬주섬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구 선생이 나에게 줬던 글씨여. 아마 인간에겐 그 가치가 무지막지할 게여.”

빛이 다소 바랜 비단 천이었다.

쓰여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한 독립을 도와준 도깨비 친우에게 감사를.’

“일종의 나침반이여.”

비단 천에서 풍기는 마나.

아티팩트인 것은 알겠다.

‘그런데 나침반이라.’

은후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비단 천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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