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김지훈은 그곳에서 은후와 헤어지기로 했다. 마침 10분 뒤면 간이 정류소에서 익산행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밤도 새웠을 테니 오늘은 좀 들어가서 푹 쉬세요. 그리고 오늘 저랑 함께 다니면서 느꼈던 감정들, 잘 생각해 보시고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봐요.”
“다음이요?”
“네, 괜찮죠?”
“어, 네. 그럼요.”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구체적으로 딱 한 달 뒤에, 어때요?”
“좋아요.”
“그때까지 뭔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도요. 오늘은 다시 한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말 놓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은후가 김지훈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느낀 게 분명히 있을 거야.’
마나까지 이용해 감정을 흔들었으니까. 물론 오늘 경험만으로 단박에 김지훈이 은둔형 외톨이에서 벗어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계기는 충분히 될 터.
‘옆에서 이렇게 몇 번만 도와주면.’
그리고 그 와중에 부모와의 관계도 개선시키고 말이다. 그러면 이번 의뢰는 끝이었다.
‘그나저나 확실해.’
이렇게 인간적으로 교류하며 흡수한 감정 마나는 그 질이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그 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뭐랄까.
‘촉감이나 맛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구체적으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었다.
‘이건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겠어.’
깨달음은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던가.
은후는 이번에 김지훈과의 관계에서 흡수한 감정 마나에서 그런 형언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느꼈다. 아직 깨달음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계속 궁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부디 김지훈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은후가 멀어져 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작게 소망했다.
* * *
며칠 후, 오늘은 모델로서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촬영 시간은 오후 2시.
하지만 은후는 아침 일찍 기차역으로 향했다. 친구 이하연과의 약속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어젯밤 갑자기 이하연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렇게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일 촬영 끝나면 퍼져서 놀 시간 없을 텐데, 좀 일찍 만날래?’
할 말도 조금 있고, 수다도 떨고 싶고, 또 점심 식사도 같이하고 싶다는 이하연의 말에 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다?”
역에 도착하자 이하연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오랜만인가? 연락은 자주 했던 것 같은데.”
“직접 본 건 꽤 됐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리고 나 방송 시작하고 나서 바빠서 그렇게 연락도 자주 못 한 것 같은데.”
이하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가볍게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은후와 이하연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지하철을 탔다. 목적지는 이번 촬영을 할 사진관이 있는 강남역이었다.
“방송은 좀 어때?”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도 시청자 100명은 되는 것 같던데.”
“봤어?”
“그럼, 봤지.”
이하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말이라도 좀 하고 보지.”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쓸까 봐 그랬지. 그때 나름대로 조언해 주고 싶었던 말들은 다 하기도 했고.”
인터넷 방송을 시작하고 나서 은후가 와 주진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별말도 없고, 문자를 보내도 뭔가 시큰둥한 반응이어서 내심 서운했는데.
‘그래도 봤단 말이지.’
덤덤하게만 느껴져서 내심 서운했던 반응도 알고 보니 세심한 배려였다. 그래서 기분이 스르륵 풀렸다.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시청자 1호야.”
“응?”
“닉네임 좀 비슷하지 않든?”
“어?”
그러니까.
‘사과장사꾼.’
제일 처음으로 와 준 시청자라서, 그리고 채팅은 치지 않았지만 꼬박꼬박 찾아와 줘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 기억하고 있는 닉네임이었다.
‘은후의 게임 닉이 사과깎기개장인.’
사과장사꾼.
“‘대항해시대’, 기억 안 나?”
“아!”
그래.
아주 오래전 같이 함께했던 ‘대항해시대’에서 은후의 게임 닉네임이 사과장사꾼이었다.
“상인 캐릭터 만들면 거의 그 닉네임 쓰잖아. 기억 못 하고 있었네?”
“아하하하하.”
“좀 서운한데.”
“에이. 미안, 미안.”
이하연이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진짜 화난 건 아니었기에 은후가 픽 웃었다.
“정말로 미안해.”
“그렇게까지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데. 그럼 이따가 카페에서 한턱 쏘든가.”
“그럼. 아니, 점심까지 내가 쏜다.”
“점심까지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그럼 그래라.”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하연이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이라면 모르지만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방송은 좀 어때?”
“아직은 좀 잘 모르겠달까. 가끔 성희롱하는 분탕 때문에 화나기는 하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인터넷 방송인의 숙명……이라고 말하면 좀 거창한가. 그러니까 채팅 관리 잘해. 좀 더 방송 규모 커지면 관리자 꼭 따로 두고.”
“응. 그래서 규칙도 일부러 잘 설정했어. 그런 애들은 바로 블랙 올리고 있고.”
너무 빽빽하지 않으면서도 확고한 기준을 정했다. 너무 규칙이 많으면 그것대로 지키기 힘들 테니까. 한마디로 적정한 수준으로 말이다.
“네 아이디에도 권한 부여해 놓을 테니까 방송 들어오면 좀 도와줘.”
“그 정도야. 그런데 내가 좀 바빠서 자주 들어가지는 못한다?”
바쁘다, 고.
‘뭐 때문에 바쁠까.’
저번에 말한 사업 때문일까.
‘아니면.’
궁금했다.
지레짐작이 아닌 확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하연이 은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번에 말한 사업?”
“그것도 있고. 논문 좀 쓰고 있어서.”
“졸업 논문?”
“응.”
“학부 논문이면 별거 없을 텐데. 솔직히 거의 복붙이잖아.”
“이왕 쓰는 거 제대로 쓰고 싶어서.”
게임과 심리를 관련 지어서, 그 외에 마법에 관련해서 쓰고 있는 논문도 상당했고.
솔직히 바쁜 이유는 대부분 마법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은후는 이하연의 지레짐작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나저나 논문까지 각 잡고 쓴다니 대단하네. 사업 준비로도 머리가 아플 텐데.”
“딱히? 사업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기도 한 데다가 대부분 준비는 사업 파트너가 해 주고 있어서.”
“그 투자자?”
“그렇지.”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거라니까. 솔직히 보통 사람이면 석박사도 아니고 학부 졸업 논문인데 각 잡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없지는 않을걸?”
“극소수겠지. 요새 대학교가 무슨 학문의 전당도 아닌데.”
취업과 인맥 형성을 위한 일종의 관문 역할이지.
“까놓고 말해서 석박사도 그렇지 않나? 진지하게 학문적 연구를 위해 석박사 과정 밟는 사람 진짜 드물걸.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거야.”
이하연이 냉소적으로 말하며 은후를 칭찬했다.
“학부 졸업 논문을 순수하게 학구적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심혈을 기울인다는 거잖아?”
그거야 그런데.
‘조금 쑥스럽기는 하네.’
은후에게 있어서 논문이란 당연히 그러한 느낌이었으니까. 세상에 발표하지 않아도, 홀로 간직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 이야기는 됐고. 그나저나 고민 상담할 거 있다며.”
“아, 그거. 나 얼공 어떻게 할까?”
이하연은 아직 캠은 켜지 않고 방송하고 있었다.
“하게?”
“잘 모르겠어. 근데 솔직히, 어, 음.”
이하연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좀 예쁘……잖아.”
“처음엔 반하지 말라면서 그렇게 당당하더니, 왜 이렇게 소심하게 말해?”
“아니.”
“예쁜 거 맞아.”
“어, 응. 땡큐.”
“그래서?”
“그래 가지고. 캠 켜면 시청자가 좀 많이 늘지 않을까 싶은데. 솔직히 방송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 알지만 좀 조급해지더라고.”
“캠 켜고 얼굴 공개하면 당연히 늘겠지. 그런데 저번에 말한 거 기억나지?”
익명의 불특정 다수에게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발생하는 리스크.
“정말로 잘 생각해. 아마 별의별 메시지도 엄청나게 쏟아질걸? 지금도 그렇지 않아?”
“아, 그건 그렇지. 아직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는데.”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느니, 게임을 하는 여성이 취향이어서 사적으로 알고 지내고 싶다느니, 이런 쪽지는 애교였다.
“에휴.”
차마 말로 담기도 힘든 성희롱이나 자신의 성기 사진을 보내는 미친놈도 있었으니까.
“얼굴 공개하면 시청자도 팍 늘겠지만, 그런 쪽지는 더 팍팍 늘 거다. 그런데 그건 빙산의 일각일 거고.”
예컨대 살이 조금만 찌기라도 하면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사람이라면 상처 입을 만한 말들을 아무렇게 할 수도 있었고. 또 표정 관리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방송하는 사람이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며 뭐라 할 시청자들도 있을 터였다.
“물론 커버 쳐 주는 시청자들이 더 많을 거야. 하지만 알지?”
백 마디 칭찬보다 한 마디 욕설과 비난이 만드는 마음의 생채기가 더욱 오래간다는 걸.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우울증이나 대인 기피증이 찾아오기 십상이었다.
“나중에 방송으로 성공했다는 말이라도 듣게 되면 바깥에 돌아다니기도 부담스러울 거고. 그러니까 진짜로 잘 생각해. 뭐, 그렇다고 결사반대까지는 아니야. 얼굴 공개를 통해 얻을 장점도 꽤 클 테니까.”
“으, 어렵다. 진짜로.”
인터넷 개인 방송.
얼핏 보기에는 참 쉬워 보이는 일이었다. 물론 진지하게 알아보고 나서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지만.
‘근데 막상 해 보니까 또 다르단 말이지.’
그래도 일단 골치 아픈 일은 여기까지만 생각할까.
“일단 달콤한 것 좀 먹자. 빙수 어때?”
“빙수 괜찮지. 근데 점심 식사는?”
“디저트 배는 따로 있지. 아니면 일단 커피 마시고 점심 먹고 나서?”
“상관은 없는데.”
* * *
두 사람은 그렇게 점심까지 즐겁게 데이트한 후 김경훈의 사진관을 찾았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어? 혹시?”
딱히 꾸미지 않았음에도 빛이 나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직접 사진을 보진 못했지만, 오늘 오기로 한 모델에 관한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이은후 씨랑 이하연 씨 되시나요?”
“네, 맞습니다.”
“아! 어서 오세요. 일찍 오셨네요?”
“일찍 오기는요. 그런데 이것 좀 어디 놓을 데 없을까요?”
은후와 이하연은 양손에 커피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기왕 일할 거 점수 좀 따자는 생각으로 은후가 준비한 것이었다.
“혹시 저희 주시려고 가져온 건가요?”
“그럼요. 이 많은 걸 둘이 어떻게 다 먹는다고요.”
은후의 말에 직원이 꺄르르 웃으며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일단 여기 앉아 계시고요. 커피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세요.”
잠시 후, 김경훈이 사진관 로비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김경훈이라고 합니다.”
“이은후입니다.”
“이하연이에요.”
“이거, 사진보다 두 분 모두 실물이 훨씬 낫네요.”
은후가 감사하다며 가볍게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에요. 그나저나 웬 커피를 이렇게 사 오셨어요. 저희가 사 드려도 시원찮은데.”
“그래도 오늘 함께 일할 사이잖아요.”
사소하다면 사소한 배려. 하지만 그런 배려가 첫인상을 크게 결정하는 법이었다.
‘인성도 좋네.’
김경훈이 내심 감탄했다.
올해 대학교 졸업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물며 먼저 굽히고 들어간 건 자신 쪽 아니던가.
‘생각했던 대로 핏도 둘 다 딱 좋고.’
오늘 작품 하나 제대로 나오지 싶었다. 이런 기분 좋은 예감은 어지간해서는 틀린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