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김지훈의 가정에서 발생한 어긋남. 분명히 그 어긋남은 아주 작았을 것이다. 사소해서 아주 조금만 노력한다면 순식간에 없어질. 하지만 세월이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있다면.’
김지훈이 참 바르게 자랐다는 것일까, 생각도 나름대로 깊고.
아마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믿었고 어느 순간 방치했겠지. 어련히 알아서 잘하는 아들이니까.
부모님 입장에선 방치는 아니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김지훈의 입장에서 판단하면 그렇게 봐야 했다. 어머니의 생각을 들어 본 은후는 그렇게 판단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아예 삶의 욕구가 없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당장 부모와 김지훈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근본적인 건 부모의 무관심. 마법으로 강제로 한다면 단박에 성과는 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사람의 심리를 완전히 조작하는 것이었다. 단기적으로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지언정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살짝 마음을 환기하거나 의욕을 조금 북돋아 주는 정도.’
딱 그 정도.
그게 은후가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심리 상담에 있어서 마법을 이용하는 건, 어지간히 마음이 병들어서 당장 죽을 정도라면 또 모르겠지만.
‘부모와의 관계 개선은 천천히.’
당장 급한 건 김지훈의 의욕을 북돋아 주는 일이었다.
무언가 하고자 하는.
그게 무엇이든 좋았다.
그러려면.
“일단 좀 씻을까요?”
“네?”
“말을 들어 보니 본인도 뭔가 이 상황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 같은데. 맞죠?”
“그거야 그렇죠.”
김지훈 본인도 내심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평생 이대로 살 수만은 없다는 걸.
“그럼 일단 좀 씻읍시다.”
“왜요?”
“이대로 나가기엔 너무 꾀죄죄하잖아요?”
“그거야 그런데요.”
왜 내가.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하루……라고 했지.’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준 상담사 형의 말에 하루 정도는 잠자코 따르기로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이란 말이야.’
자신이 이렇게 솔직한 속내를 터 놓으면 전부 복에 겨워한다며 욕했는데. 직접 욕은 하지 않아도 표정이나 눈빛으로.
‘좀 속 시원하기도 하고.’
가장 친한 친구 또한 그랬으니까. 그 이후 김지훈은 절대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최근에 방문한 심리 상담 센터에서도 그랬다.
그 때문에 한결 나은 기분이었다. 또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준 은후에게 고마움도 생겼다. 그래서 김지훈은 씻었다. 은후는 그사이 김명희에게 가서 말했다.
“아드님과 잠시 나갔다 올게요.”
“지훈이가 나간다고 했어요?”
“네.”
“아.”
“그리고.”
은후가 잠깐 머뭇거리다 일단 말을 아끼기로 했다. 서로의 어긋남을 바로 당장 전달하는 건 아직 아니었다.
잠시 후.
씻고 나온 김지훈을 바라보며 은후가 말했다.
“확실히 씻고 면도하니까 훨씬 낫네요.”
“그, 큼, 형이 그런 소리 하니까 이상한데요.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은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하자, 김지훈의 표정이 환해졌다.
“형 얼굴이면 막 길 지나가다 보면 헌팅도 당하고 그러지 않아요? 연예인 기획사에서 명함을 받는다거나.”
“헌팅은 당한 적 있는데, 명함은 아직 받아 본 적 없네요.”
“에이, 엔터들이 뭘 모르네요. 형 정도면 얼굴만으로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칭찬 고마워요.”
“근데 형은 말 안 놓아요?”
은후가 피식 웃은 후 김지훈의 옷을 골라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 집은 옷을 바라보니 자신을 꾸미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머리 스타일도 그렇고.’
흔히들 말한다. 남들의 시선은 아무래도 좋다고. 불법이나, 대부분 사회 구성원들이 바라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민폐가 아니라면 패션은 자유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물며 현대에는 발달한 미디어 덕분에 더더욱 남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 또한 중요한 시대였다.
‘언제는 안 그랬냐만은.’
시대 불문, 차원 불문이었다. 남의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 중 하나였으니. 당장 은후가 지냈던 이세계에서도 그랬다.
‘제일 중요한 건.’
외양을 꾸밈으로써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 평범한 사람이라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본능적으로 읽어 내기 마련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나가는 본격적인 외출이니까.’
은후가 말했다.
“잠깐 앉아 봐요. 집에 왁스나 스프레이 없어요?”
“없죠?”
그러면 일단 드라이기로 모양을 잡고.
그러다가 은후가 생각했다.
‘이왕 하는 거.’
은후도 솔직히 패션에 관해 그리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다. 아예 무지한 건 아니었지만.
‘제대로 하는 게 좋겠지.’
자취방 근처에 메이크업 전문 숍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 * *
익산에서 전주까지 버스로 35분 남짓.
가는 길에 김지훈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로 오랜만의 외출이라 왜인지 모르게 주위 광경이 새삼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걸까.’
갑자기 전주라니.
하지만 굳이 김지훈은 은후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같이 다니기로 했으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었다.
‘게다가 좀 편하단 말이야.’
처음 만난 사람인데.
몇 시간 이야기한 게 전부인데.
‘하기야 첫눈에 반하는 사람도 있는데 뭐.’
사실 김지훈은 그런 말 믿지 않았었다. 어느 드라마 속의 이야기라 여겼다. 하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신기한 일들이 많다는 걸.
과거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이런 말도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간주한다고. 게다가 역사 속 기록이나 인터넷의 설들을 읽다 보면 첫눈에 반한다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인터넷 설은 구라도 많아서 다 믿을 순 없지만. 근데 그건 적어도 역사 기록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사실이겠지.’
언젠가 읽었던 역사 속의 실화.
첫눈에 서로가 반한 사랑 이야기.
‘끝은 비극이었는데. 으, 이름이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워낙 오래전 언젠가 스치듯 본 이야기였기에.
그나저나 사랑인가.
‘잘 모르겠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걸까.
제대로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형.”
“네?”
“형은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저요?”
“네.”
“있었죠.”
은후가 흐릿하게 웃었다.
“막 사랑하면 진짜로 그래요? 내 심장을 꺼내 줘도 충분하다든가.”
“뭐어. 그런데 갑자기 웬 사랑 타령이에요?”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사랑.
“그나저나 왜 과거형이에요? 지금은 헤어졌나?”
“그렇게 됐어요.”
헤어지는 일은 물론 이혼이 그리 드물지 않은 시대였다. 당장 뉴스에서도 이혼율이 얼마나 높아졌느니 떠들고 있으니까. 그래서 김지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 씨. 괜히 물어봤네.’
은후는 그런 김지훈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곤 픽 웃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헤어진 건 오래전 일이니까.”
“그, 네.”
김지훈이 상상하는 것과 달리 단순한 헤어짐이 아닌 사별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정말로 오래전 일이었다.
그게 은후는 새삼스러웠다. 이후 은후의 전주 자취방에 근처에 도착하기까지 둘 사이엔 침묵이 자리 잡았다. 다만 김지훈은 그 조용함을 편안함으로 받아들였다. 은후가 일부러 마나를 이용해 김지훈을 배려한 덕분이었다.
“이쪽이에요.”
은후의 자취방은 전북대 근처였다. 그리고 대학가 근처였기 때문일까. 다양한 놀 거리는 물론 어지간한 시설들이 전부 있었다. 지금 가고 있는 메이크업 숍도 개중 하나였다.
“어서 오세요!”
방금 도착한 곳은 은후가 얼핏 듣기로 전주에서 꽤 잘나가는 숍이라고 했다.
“여기 얘 좀 세팅해 주시겠어요?”
“구체적으로 원하는 스타일이 있으실까요?”
“조금 튀어도 괜찮으니 멋지게요. 옷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면 근처에서 쇼핑할 생각도 있고요.”
“어, 알겠습니다. 코스는 어떤 거로 하시겠어요? 가격표는 저기 적혀 있어요.”
은후가 가격표를 흘끗 바라본 후 물었다.
“원장님이 제일 잘하시는 거죠?”
“그럼요.”
“그럼 원장님께. 코스는 헤어까지 포함해서요.”
“알겠습니다. 마침 원장님 한가하시거든요. 바로 말씀드릴게요.”
직원이 은후의 얼굴을 흘끗 바라본 후 안쪽으로 달려가 외쳤다.
“원장님! 손님이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직원의 외침에 숍 로비로 나왔다. 그리고 은후를 바라본 후 나지막이 속으로 감탄했다.
‘와.’
꾸미는 맛이 날 것 같은데.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원장님, 원장님.”
“응?”
“손님은 이분. 조금 튀어도 괜찮으니 멋지게 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 외에는?”
“필요하다면 헤어랑 메이크업에 맞추어 옷도 바로 쇼핑하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무슨 촬영이나 면접 가는 건 아니고 단순히 기분 전환이라고 하셨고요.”
원장이 고개를 끄덕인 후 김지훈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쪽 분이 너무 멋지셔서 순간적으로 눈이 팔렸네요.”
“감사합니다.”
은후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손님 이쪽으로.”
“어, 네.”
지금까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동자만 또르르 굴리던 김지훈이 숍 원장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김지훈의 스타일을 고민하던 원장이 은후를 불러 옷에 관해 말했다.
“옷까지 사서 맞춘다고 하셨으니 제대로 꾸미려고 작정하고 오신 거 맞죠?”
“네.”
“그런데 그쪽 분은 꾸미실 생각 없나요?”
“네.”
굳이.
“아쉽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같이 꾸미시는 게 어때요? 그럼 공짜로 해 드릴게요.”
“네?”
“그쪽 분이 워낙 제 스타일이라. 아, 오해하시지는 마시고요. 이성적으로 뭐 그런 게 아니라 직업적으로 말하는 거예요. 조금만 손대면 인물이 확 살아날 것 같거든요. 그나저나 여기 이쪽 분은 처음이죠? 이렇게 제대로 꾸미는 거요.”
눈치만 살피던 김지훈이 소심하게 답했다.
“처, 처음이죠. 보통 이런 곳에 평범한 사람은 안 오지 않나요?”
“에이, 그건 또 아니죠. 특별한 사람만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 그래도 보통은 뭔가 일이 있어서 찾아오는 게 일반적이긴 해요.”
면접이라든가, 혼주를 서야 한다든가.
“아니면 졸업식? 돌잔치 가야 한다고 오시는 분도 가끔 계시고. 이유는 다양해요. 게다가 요새는 그래도 화장에 관한 인식이 바뀌어서 필요한 날이면 남성분들도 곧잘 오세요.”
“아하.”
“가끔 손님처럼 단순한 기분 전환으로 오시기도 하고. 드물기는 하지만요.”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아까 공짜라고 하셨죠?”
“네.”
“형, 형도 받아요.”
“제가요?”
“네. 공짜라잖아요. 아까 가격표 보니까 꽤 비싸던데요.”
“그래도 저희 숍은 나름 양심적이에요, 정찰제니까. 가격 아예 안 써 두고 시가로 받는 데도 많아요. 하여간 손님만 허락하시면 무료로 해 드릴게요.”
원장이 눈빛을 빛냈다.
‘꾸며 보고 싶단 말이지.’
본격적으로.
김지훈이 원장의 말을 받아 은후에게 주장했다.
“말도 안 하고 여기로 데리고 오셨잖아요. 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 같아서 조용히 있었는데요, 솔직히 좀 부담스러워요. 그렇다고 제 돈을 내면서까지 이렇게 꾸미고 싶지도 않고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알겠습니다.”
은후가 원장의 제안을 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