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은후는 리어카에 준비해 두었던 계약서를 꺼냈다. 혹여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미리 만들어 두었던 계약서였다. 은후는 마나로 김영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담은 후 말했다.
“피를 적당히 몇 방울 떨어뜨리시면 됩니다.”
“진짜로 가지고 계셨군요. 제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만.”
“귀한 것인가 봅니다?”
“당연하지요. 현대에는 제작 방법이 사라졌으니까요. 교황청에도 몇 장 남지 않은 물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은후는 살짝 당황했다.
‘엄청 귀한 모양인데?’
이세계에서는 꽤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 만큼 파훼 방법도, 안전장치도 또한 다양했다. 은후는 혹시 몰라서 이번 계약서의 안전장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따로 판매는 할 수 없겠어.’
이런 계약서를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매우 난처해질 터이니.
‘하기야.’
약속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참 매력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 계약서에도 한계는 있었다.
‘개인에게 통용되는 것뿐이니까.’
그러나 그게 어디인가.
개인과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와 국가 간의 계약에 있어서 지도자에게, 기업과 기업 간의 계약에 있어서 그 대표에게. 없어서 문제지, 있으면 쓸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좀 아깝군요. 고작 저와의 계약에 낭비하기엔.”
“그걸 판단하는 건 저니까요. 제가 아무래도 그쪽 방면에 지식이 없어서요.”
개인 신상에 관한 비밀 엄수 조건도 들어갔기에 은후는 한결 편하게 김영호에게 자신의 결점을 털어놓았다.
“그래 보이십니다.”
“그에 관련해서는 차차 도움을 받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은후부터.
그게 계약 조건이었다.
“혹 신문에 기사를 실을 수 있겠습니까?”
“지역 신문이라면 충분히. 메이저권은 장담할 수 없지만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간첩 사건을 언급하시지요.”
“간첩이요?”
“네, 사람의 믿음을 빠르게 끌어내려면 미래를 알리는 일이 제일 빠릅니다. 날씨를 바꾸거나 해도 되겠습니다만.”
하지만 단순히 날씨를 바꾸는 건 의미가 없었다. 가뭄에 비를 내리거나 태풍을 물러가게 하거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사건 하나 해결합시다.”
은후는 얼마 전 일어났던 흥해 토막 살인 사건을 언급했다.
“이유는 적당히 가져다 붙이시지요.”
“그런 거야 어렵지 않지요.”
모시는 신이 점지해 주었다고 하면 되는 일이었다.
* * *
김영호와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후 은후는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다음 만남은 보름 후.’
매우 밀도 있는 며칠이었다.
그래서 좀 지쳤다.
‘공원에나 갈까.’
바쁘게 움직였으니 며칠은 느긋하게 쉬자. 그렇다고 집에 콕 박혀있기는 싫었다. 어차피 집에 있어 봤자 마법 연구나 할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기엔 좀이 쑤셨으니.
‘그냥 가기엔 좀 그러니까.’
간단한 선물이라도.
‘뭐가 좋으려나.’
기왕이면 공원의 수호령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그래서 은후는 마트에서 아이스티 분말을 샀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공원의 수호령이 쪼르르 은후를 마중 나왔다. 순수하게 반가움을 표하는 수호령의 모습에 은후의 표정이 풀어졌다.
“일주일도 안 된 거 같은데?”
“나한테는 오랜만인데?”
입술을 삐죽이는 수호령에게 은후가 피식 웃었다. 하기야 친구라곤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이세계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다소 씁쓸한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고 은후가 정령을 만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지. 방법이 없지는 않나?’
의사이면서 취미가 사진이었던 김성백의 카메라. 그 카메라를 이용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사연이 있는 물건일 텐데.’
긴 세월을 함께했다. 또 자신의 부적이라고 말했으니 분명히 소중한 물건일 터.
‘나중에 생각하자.’
당장은 삐진 수호령을 달래 주는 것부터.
“그래서 선물 가져왔어.”
“오! 선물?!”
“응. 선물.”
“뭔데, 뭔데?”
은후는 픽 웃으며 하늘을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 수호령이 쪼르르 뒤따르며 물었다.
“이렇게 날아도 괜찮아? 요새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다른 사람은 날 못 볼 테니까 괜찮아.”
수호령을 만나기 위해 왔으니 당연히 은후는 은폐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혼자 떠드는 미친놈으로 보일 테니까.
“오늘은 전각 지붕 말고 저기로 가자.”
“어디?”
“바로 옆에.”
“좋아!”
호수 다리 중간에 있는 전각 옆. 그곳에 조그마하게 조성된 터가 있었다.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끔.
호수 위의 쉼터.
다만 계절의 특성상 모기나 벌레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좋았기에 사람들이 곧잘 앉아 있는 곳이었다.
‘나무 위에서 마실까.’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있는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 은후는 그 사람들을 피해 쉼터의 가장 높은 나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이스티 분말 통을 꺼냈다.
“그건 뭐야?”
“달달한 음료? 연잎 잔 좀 꺼내 봐.”
“오! 달달한 음료! 아, 맞다. 그거 진짜 도움 많이 되었어. 그거 아니었으면 저번에 한 명 구하고 나도 사라질 뻔했다니까?”
호수에서 오리배를 타다가 빠진 아이, 구명조끼를 입은 상태였으나 죽을 뻔했다고.
“그 조끼 불량이었거든. 그래서 말이야……!”
아이를 구해 주고, 그 과정에서 아이와 대화도 잠시 나누고, 또 아이의 부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런 일이 있었다며 공원의 수호령은 제 일을 자랑했다.
“잘했다, 잘했어.”
다만.
“그래도 사라질 정도로 힘을 쓰면 안 된다?”
“응?”
“네가 계속 사라지지 않아야 쭉 아이들을 돕지. 내가 틈틈이 들러서 네 힘을 보충해 줄 테니까.”
은후가 아이스티 분말에 마나를 듬뿍 담았다.
“그으, 음, 그래도.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아이를 돕기 위함인데.”
은후가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한 아이를 도왔어. 그리고 사라졌다고 하자. 그 뒤에는?”
“뒤에?”
“어떤 아이가 또 사고를 당할 수 있겠지. 그 아이는 누가 도와줄까?”
“……은후가?”
“내가 여기에 우연히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항상 공원에 있는 건 아니잖아?”
공원의 수호령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예시.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으나 수호령의 가치관은 아이에 가까워 단순했다. 지식이나 지능과 별개로. 그래서 은후가 지적한 부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공원의 수호령은 끙끙거리다 결론을 내었다.
“그래도.”
“응?”
“그래도 난 구할 거야. 내가 모르는 미래를 위해 눈앞의 위태로운 아이를 그냥 두고 보고 싶지 않아.”
“그래?”
“응. 그게 내 존재 의의니까.”
그런가.
딱히 시험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친구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바람에서 한 이야기.
‘정말로 수호령은 수호령이구나.’
그것도 선의에 가득 찬.
‘아이 한정이기는 하지만.’
은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더 자주 찾아와야겠네.”
“응?”
“그래야 네가 무리해도 내가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으응. 그렇지! 그래, 그러면 될 거야. 은후 네가 좀 더 자주 찾아와서 나랑 놀아 줘.”
도와 달라는 게 아니라 놀아 달라는 건가.
“겸사겸사 쫌 도와주기도 하고?”
쑥스러운 듯 웃는 수호령에게 은후가 다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연잎으로 만든 잔에 호수의 물을 따랐다. 물론 마법으로 정화한 뒤에. 그리고 아이스티 분말을 탔다.
“한 잔에 이 정도 타면 될 거야. 마셔 볼래?”
“오!”
수호령이 환하게 웃었다.
“맛있어! 엄청나게 달아!”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응! 엄청나게!”
“떨어지면 말해. 또 가져다줄게.”
고작 아이스티에 저리도 기뻐할까. 하기야 사람들의 음식을 저리 먹을 기회가 없었을 터이니.
‘다음에는 뭘 사 올까. 치킨이라도 사 와 볼까.’
그냥 보기만 해도 배부른 느낌이었다.
* * *
공원에서 수호령과 휴식을 취한 며칠 뒤, 은후는 어머니의 가게를 찾았다. 은후가 가게에 나타나자 손님들이 먼저 반겨 주었다.
“선생님, 오셨네요?”
“별일 없으셨죠?”
은후가 나타나자 너도나도 말을 걸어 왔다. 은후는 한동안 그렇게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준비해 온 물건을 꺼냈다.
“한 잔 드셔 보시겠어요?”
알코올이 없는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그러니 술이 아닌 평범한 음료수라 봐도 무방했다. 물론 은후가 특별하게 맛을 좋게 만든.
와인이지만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에 손님들 모두가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들 마시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맛 진짜 좋다.”
“그러니까요. 그리고 잔이 좀 아쉽네요. 이만한 와인에 요런 잔이라니.”
은후가 가져온 스파클링 와인을 두고 너도나도 떠들던 도중, 시술을 마친 은후의 어머니가 김명희와 함께 나타났다.
“아들 왔어?”
“네.”
“그런데 웬 와인?”
“시제품으로 평가 한번 받아 보려고요.”
얼마 전 은후는 어머니께 담금주 사업체를 차린다고 말을 이미 해 두었다. 은후의 어머니는 사업이라는 말에 고민하기는 했으나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부쩍 똑 부러진 태도를 보이는 아들. 게다가 어디 빚을 지고 사업체를 차리지 않는다고 했기에, 또 직접 마셔 보니 무척 맛이 좋아서 팔리지 않기도 어렵다는 판단도 들어서.
“이거 파는 술이에요?”
은후가 한 손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아마 빠르면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 초부터 판매할 예정이에요.”
은후의 말에 너도나도 미리 예약할 수 없냐고 물어왔다. 은후는 곧 오픈할 홈페이지를 기대해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그나저나 서울은 잘 다녀왔어?”
“네.”
“친구는 잘 만났고?”
“그럼요.”
은후의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어떤 친구야?”
“게임에서 만난 친구예요.”
요즈음에는 아니었으나 과거 은후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로 그렇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서로 우울하고 힘들어서, 그리고 나중에는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그래서 은후의 어머니는 아들 인간관계에 관해 잘 몰랐다.
“게임?”
“네. 그러니까…….”
딱히 비밀도 아니었기에 은후가 이하연과의 관계에 털어놓았다.
게임에서 1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 심지어 중간에 군대로 인하여 연락이 끊어졌다가 재회한. 그런 은후의 이야기에 어머니는 물론 주위 손님들도 모두 신기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세대 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당연한 은후와 다른 시대에 젊음을 보낸 이들의 차이였다. 그래서 대부분 인터넷이나 게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확실히 우리 때랑 다르다니까? 친구를 인터넷으로 만나고. 내 아들은 심지어 게임에서 만난 애랑 연애도 한다고 했어. 처음에는 황당해서, 원.”
“게임에서 만난 사람이랑?”
“그렇다니까.”
“그리고 요새는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잖아. 화질은 그렇게 좋진 않아도.”
핸드폰 때문에 세상이 점점 바뀌는 시대였다. 스마트폰이 나오면 더더욱 그 속도는 가속화되겠지. 그렇게 은후의 친구에서 다른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려던 때, 은후의 어머니가 물었다.
“우리 아들은 사진 안 찍었어?”
“사진요?”
“응, 그 친구랑.”
“그게요.”
딱히 이 또한 비밀은 아니니까.
“핸드폰으로 찍은 건 아니고 우연히 사진이 취미인 분을 만나서요.”
김성백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은후가 풀어 놓았다. 그러자 다들 놀라워했다.
“하기야 우리 선생님 외모가 장난 아니긴 해. 그렇지?”
“그럼, 그럼.”
갑자기 성형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확연히 바뀐 은후의 외모. 은후는 적당히 웃으며 어물쩍 넘어갔다. 그때 한 손님이 물었다.
“그럼 사진은 받으셨어요?”
“아, 네. 이메일로요. 인화된 건 다음에 받기로 했고요.”
그 대답에 자연스레 다들 눈빛을 빛냈다. 한번 볼 수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