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이지수와 헤어진 후 은후는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그냥 눈에 띈 지하철역에 내려갔다. 저마다 어디로 향하는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이제 고작 오전 6시.’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으나 꽤 이른 시간. 하지만 역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넘쳤다.
은후는 한동안 지그시 사람들을 바라보다 동선을 계산했다.
‘가평으로 가야 하니까.’
터미널까지 지하철로 이동하고 버스를 타면 되지 싶었다. 다만 지하철로 이동할 때 갈아타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좀 시간이 오래 걸려도 환승은 한 번만.’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좋아.’
은후가 지하철에 탔다. 그리고 이동하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정확히는 그들이 가진 감정의 마나였다.
‘흡수는 적당히.’
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그리고 마나를 모으는 것도 모으는 거지만 중요한 건 분석.’
최근에 갖게 된 확신.
‘이세계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돼.’
어디까지나 이세계에서 얻었던 지식과 경험은 참고용으로, 그리고 현대 지구에 알맞은 지식을 새롭게 정립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마법사로서 더욱 발전할 수 있을 터.
마법사로서 깨달음과 지식에 관한 집착은 없었다. 하지만 향상심은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틈틈이 노력했다. 그 와중에 은후의 눈에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막 지하철에 탄 남자였다. 그 남자의 주위엔 강렬한 감정이 울렁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냥 평범해 보였으나 은후가 바라보기에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어쩔까.’
그냥 무시할까.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참견하는 건 오지랖이었다. 그런 오지랖도 최소한의 인연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예컨대 불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옷깃이라도 스치지 않으면. 하지만 은후가 이처럼 고민하는 까닭은 감정의 색이 너무 검붉어서 그랬다.
‘보통은 자살의 신호니까.’
하지만 그건 색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법. 은후는 조심스레 남자의 감정을 흡수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확신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다만 지금의 심경과 감정이 그렇다는 것일 뿐.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은후는 아주 약간의 도움만 주기로 했다. 바로 지금의 부정적인 감정을 더 흡수하는 것. 그리고 희망이란 감정을 조금 전달하는 것.
‘나는 마나를 좀 더 얻고.’
저 남자는 당장 자살이란 생각과 충동이 없어지고.
‘이 정도면 인간으로서 할 도리는 다했지.’
과거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깊이 반성한 끝에 자살을 시도하는 일은 드물다고.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거의 언제나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자살의 발단이 된다. 여러 매체에서는 흔히 실연이니 불치의 병이니 떠들어 대지만 이와 같은 설명은 그럴듯해 보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날이다.’
절망에 빠진 친구에게 누군가가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한 적이 없는지와 같은 것들. 왜냐하면 그자가 바로 죄인이므로. 그 한마디만으로도 유예 상태에 있었던 모든 절망과 권태가 한꺼번에 밀어닥치기에 충분하다.
은후가 환승하기 위해 터미널에서 내렸다. 은후가 작은 도움을 준 그 남자도 덩달아. 다만 그 남자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조금 전과 달리 자살이란 생각이 없어지고 작은 희망을 품은 상태인, 카뮈가 말했던 유예 상태에서 벗어난 채로.
* * *
가평으로 가는 버스 안. 은후는 아까 지하철에서와 다르게 사람들의 마나를 흡수하거나 하지 않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추억이네.’
자연스레 떠오른 과거.
가평은 은후가 군 복무를 했던 장소였다. 10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기에 희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좋은 추억도 아닌데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겠지.’
마나를 움직여 마법사로서 기억을 더듬는다면 어제 겪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과거를 머릿속에 재생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굳이.’
좋은 일도 아닌데.
아무리 과거가 미화되기 마련이라지만 은후가 겪었던 군대의 일들은 아니었다.
‘쯧.’
은후가 가볍게 속으로 혀를 찼다.
‘이 무렵에 그런 사건도 하나 있었지.’
군대 하니 자연스레 떠 오른 탈북자 유정화 간첩 사건.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꽤 해괴한 사건이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시간이 5년이었던가.’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조작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간첩이 맞다고 말했다.
누명이면 당연히, 설령 진짜 간첩이 맞다고 쳐도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게 보통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정화는 그러지 않았다.
‘기억력이 좋아진 것도 탈이란 말이야.’
문득문득 이따금 과거의 잔상이 어떤 키워드를 통해 선명해지는 현상. 이건 마법사가 자신의 기억을 강제로 재생시키면 발생하는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딱히 부작용이랄 것도 없긴 한데.’
최근 은후는 현대에 적응하기 위해서, 또 가족이나 친구인 이하연과의 만남을 위해서 계속 과거를 떠올렸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 * *
은후의 정확한 목적지는 가평 터미널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 가덕산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 매우 힘든 장소였다. 그래서 은후는 은폐 마법을 펼치고 모습을 바꾼 뒤 하늘을 날았다.
‘점집?’
가덕산의 중턱, 조그마한 기와집에 걸려 있는 깃발 두 개.
무당의 상징이었다.
보통 하얀 깃발은 점을 볼 수 있을 때, 빨강 깃발은 굿을 할 수 있을 때 대나무에 걸어 놓는다. 최근 은후는 무당이나 도사에 관해 조사를 해 봤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꿈틀거리는 마나도 그렇고.’
은은하게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나.
‘진짜 능력자인가?’
하지만 폐지 줍는 노인이 무당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었는데.
‘음?’
은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앞에 내려왔을 때, 중년의 사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올 걸 미리 알고 계셨나요?”
“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알려 주셨지요. 귀한 분이 해가 떨어지기 전 며칠 이내로 찾아올 거라고 말입니다.”
“그 외에 들으신 게 있나요?”
중년 사내가 허허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심이 어떠실지.”
“……좋습니다.”
무언가 위협을 가하고자 했다면 이렇게 마중 나오진 않았을 터. 그리고 설령 그런 의도가 있다 한들 은후는 자신 있었다. 한 몸 무사히 빠져나올 자신이.
‘긴장만 늦추지 말자.’
하지만 그런 은후에게 중년 사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니 편히 계시지요.”
도움이라.
중년 사내가 안내한 곳은 마당에 있는 테이블이었다. 그곳에는 미리 차와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사실 긴가민가했습니다. 신빨이 떨어진 지 오래되었거든요.”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런 다과상을 준비한 지 일주일째. 사흘만 더 기다리다 포기하려고 했다고.
‘완전한 예지는 아닌가.’
은후는 속으로 현재 상황을 판단하며 자신이 찾아온 본론부터 꺼냈다.
“김영섭 씨에게 빚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네, 확실히 영섭이 형님에겐 빚이 있죠.”
“다량의 채권과 약간의 보석을 처분하고 싶습니다. 되도록 비밀리에요.”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그쪽 방면에서 손을 뗀 지는 좀 되었지만 인맥은 아직 남아 있거든요.”
은후가 차를 마법으로 스캔한 뒤 아무런 위협이 없다는 걸 파악하고 한 잔 마셨다.
“차 맛이 좋군요. 그런데 박수무당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김영섭 씨에겐 그런 말을 못 들었는데요.”
“하하, 그렇죠. 당시에는 무당이 되기 싫어서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영섭이 형님이 아니었으면 진즉 죽었을 겁니다.”
중년 박수무당의 이름은 김영호. 우연히 김영섭을 만나고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친해지게 되었다고.
“형님은 편히 가셨습니까?”
“네. 그런데 김영섭 씨의 존재를 알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알고야 있었지요. 하지만 힘이 부족하여 어떻게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귀신의 존재는 인지했으나 대화는 나눌 수 없었다고.
“제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복수는 마치셨던 상태였기도 했고요. 제가 알아낼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죠.”
“그렇군요.”
이후 김영호는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풀어 말했다. 신내림이라는 운명이 싫어 세상을 나와 떠돌아다녔고, 돈을 잔뜩 벌고 싶어 돈세탁에 손을 담갔다고 말이다.
“신내림이 싫다고 말하면서 제가 모시는 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더랍니다.”
신이 말하길, 돈을 씻는 일을 하면 큰돈을 벌게 될 거다, 하지만 그 때문에 큰 불행이 닥치리라, 고.
“그때 자신을 찾게 될 거라고도 했죠.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거든요.”
김영호가 여기에서 무당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랬다.
“제가 모시는 신은 성수 장군이십니다. 이 일대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되니 자연스레 힘을 잃게 되셨고요.”
그러다 결국 자신의 최후를 알아차렸다고. 그 최후를 피할 수 있는 길은 김영호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은후에게까지 이어졌고 말이다.
그 설명에 은후는 내심 감탄했다. 예지란 이세계에서 제법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힘이었다. 개 중에 가장 큰 예지의 주체는 신. 하나 신 또한 완벽히 미래를 내다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예지에 자신의 삶을 맡겼다는 말이지.’
아마 도저히 그 외에 살아남을 길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감정이 들기에 충분했다. 불확실성에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니.
“그래서 제게 무슨 도움을?”
“사람들이 제가 모시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야 할 이유는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정보요?”
“네, 정확히는 저와 같은 무당이나 혹은 도사, 신통력이 있는 스님에 관해서요.”
말인즉슨, 능력자들의 세상에 관한 정보를 주겠다는 의미였다.
“제가 모시는 신께선 정보와 미래를 다루십니다.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재물이나 귀물 혹은 힘 따위를 말했다면 은후는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 제공은 은후에게 있어서 충분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부족하십니까?”
“글쎄요. 하지만 급한 건 제가 아니지요?”
은후의 말에 김영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원하신다면 힘을 찾은 후에 자신을 드러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든지 보고 관찰하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김영호의 말은 딱 거기까지였다. 더 줄 수 있는 건 없다고.
“그런데 김영호 씨께선 절박하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솔직히 제게는 그렇습니다. 목숨을 구해 준 빚이 있으니 신을 따르고는 있습니다만.”
반대로 신이 없어진다면 자신의 운명은 자유가 될 것이니, 이 정도만 해도 할 도리는 다했다고 여겼다.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요. 단, 그 전에 계약서부터 작성하고요.”
“계약서요?”
“첫 만남에 제가 김영호 씨나 성수 장군을 믿을 순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상관은 없습니다만. 계약서로 믿음을 살 수 있습니까?”
그야 물론.
“보통 계약서가 아니니 말입니다.”
“진실의 서약서라도 가지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에서 뜻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와주실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뭐.
‘간단한 일이지.’
미래의 일.
현대에서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귀신과 얽힌 일보다는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서일 터.
‘얼마 후 있을 간첩 사건이라던가.’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은후가 마나를 끌어내 과거를 더듬었다.
‘아.’
그래, 그런 일도 있었다.
‘토막 살인 사건.’
얼마 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하연읍에서 일어난. TV에서 뉴스를 봤었다. 미래에도 쭉 미제 사건으로 남은 일이었다.
‘이 사건을 해결해 주거나.’
전쟁도 있었다.
‘남오세티야 전쟁.’
미래의 정보 중 적당히 몇 가지, 그리고 사람의 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건 해결. 이 정도만 해도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끌어내기엔 충분할 터였다.
‘그리고 이번에 목돈이 마련되면 전쟁 정보를 이용해 돈도 좀 벌어 놓아야겠어.’
현대 사회에서 이런 사고는 곧 돈을 벌 기회이기도 하니까. 특히 전쟁이라면 더더욱.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남의 불행을 이용해 돈을 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후가 그 전쟁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그 정보를 통해서 돈을 번다면.’
기부도 하고, 직접 봉사 활동도 좀 하자.
그 와중에 감정 마나도 흡수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