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21화 (21/170)

제21화

적당한 술.

멋있는 사람.

자신에 관한 진지한 대화.

마지막에는 시답지 않은 가벼운 이야기들. 그래서 이하연은 이 술자리를 끝내기 싫었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는 없는 법. 결국 헤어질 때가 되었다.

“아우, 가기 싫다.”

“그래도 가야지.”

그거야 그런데.

“은후, 너는 가고 싶어?”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눈치가 없는 것이겠지. 은후에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말을 돌려서 대답했다.

“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그건 또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안 볼 생각? 섭섭하게.”

“우, 아니거든? 그나저나 넌 어디서 자려고?”

은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적당히 근처에 모텔 잡으려고. 왜 같이 가게?”

이하연이 아주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사귀기는커녕 고작 썸을 타는 사이.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혼자만의 착각이란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게다가 첫 만남에 모텔이라니. 물론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하연에게는 아니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진짜 같이 가려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은후가 픽 웃으며 택시를 잡아 이하연을 태우며 말했다.

“도착하면 문자 하고.”

“너도.”

은후는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주위를 쓱 살폈다.

‘어떻게 할까.’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하연을 배웅한 뒤 채권을 처분하기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내키지 않아.’

어째서일까.

뭔가 귀찮았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 것일까.’

은후가 자기 자신을 관조했다. 확실히 다소 모자란 느낌이기는 했다. 왜냐하면 은후는 이하연을 배려하여 페이스를 꽤 조절한 상태였기에. 이하연의 주량이 그리 적은 편은 아니긴 했지만 은후로서는 맘껏 마시지 못했달까.

‘좋아.’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예전에 결심한 대로.’

적당히 걷다가 편의점에서 소주와 맥주를 산 다음에, 그러다가 술을 마시다 잠들자.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벗 삼아서. 보통 사람이었다면 낭만을 찾다가 입 돌아갈 일이었으나, 은후에게는 아니었다.

* * *

은후는 편의점에서 술을 산 다음 은폐 마법을 펼쳤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라 야경을 즐기며 술을 마시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은후의 눈에 무언가 밟혔다. 딱히 의식하거나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마법사의 눈에 들어온 서울의 영맥, 바로 한강이었다.

‘저기가 좋겠다.’

인위적인 손길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세계에서 마법사들이나 귀족들이 했던 것에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래서 은후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사람이 꽤 많네.’

퍽 늦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운동을 하거나 돗자리를 깔고 술을 마시거나, 그런 이들이 적잖이 있었다. 개중에 눈에 가장 눈에 띄는 건 한 소녀였다.

홀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관중은 거의 없었다. 시선을 좀 끌기는 했지만, 은후도 원래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쳤을 것이다.

‘이 시간에?’

중학생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나이를 많게 잡아도 고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이런 늦은 시각의 평일에 홀로 버스킹이라니.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은후가 소녀에게 집중하게 된 건 아우라였다. 감정의 파도, 너무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과 퍽 어울렸다.

‘실력은 그저 그렇지만.’

과거와 다르게 대중 매체를 통해 뛰어난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게 참 쉬운 시대였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귀가 상향 평준화된 것. 그러니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 수밖에. 실력 자체는 평범하기 그지없었으니.

하지만 은후는 그 노래가 참 좋았다. 음률에 어우러지는 감정의 향연을 조금 흡수하자 더더욱. 그래서 은후는 은폐 마법을 풀고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소녀의 앞에 자리를 잡고 술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대만을 그리워했네, 그리움만 쌓여.”

시간이 꽤 지났다. 중간에 적당히 쉬어 가며 노래를 부르던 소녀 앞에는 여전히 은후가 앉아 있었다. 가지고 온 술을 다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소녀가 머뭇거리다 다가와서 은후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저어.”

“네?”

“감사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려고요.”

“천만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좋은 노래였어요.”

소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은후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모자 같은 거 없어요?”

“네? 모자요?”

“이런 길거리 공연할 때 큰 모자나 기타 케이스 같은 거 놓아 두지 않나요? 공연비 받아야죠.”

“아.”

소녀가 멋쩍게 웃었다.

“돈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서요.”

소녀도 자신의 실력을 알았다. 하지만 은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관객이 평가하는 거예요. 가수가 아니라.”

“그, 그.”

하물며 행복이란 감정 마나까지 적잖이 모을 수 있었으니. 은후로서는 소녀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녀로서는 은후에게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은후의 말 한마디로 충분했으니까.

“마침 모자 쓰고 있네요. 벗어 보세요.”

“으, 괜찮아요!”

그래서 이를 두고 잠시 실랑이를 했다. 그러다 소녀의 배에서 소리가 울렸다. 배가 고프다는 신호였다.

“……들으셨나요?”

아침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늦은 새벽이어서 이제는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멀리서 자동차와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 외엔 풀벌레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하물며 보디 체인지 이후 은후의 귀는 너무 밝아져서, 그래서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뭐 먹고 싶어요?”

“국밥, 이요.”

“먹으러 갈래요? 공연비로 이 정도는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네!”

소녀가 부끄러움을 감추며 크게 소리쳤다.

* * *

소녀의 나이는 중학교 3학년. 이름은 이수지라고 했다. 꿈은 가수. 그래서 종종 한강이나 홍대 거리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꿈을 키우고 있다고.

‘어디서 본 것 같더니만.’

착각인 줄 알았는데.

이름을 듣고 은후는 알 수 있었다. 왜 기시감이 들었는지. 그건 미래에 그녀가 정말 유명한 가수가 되기 때문이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큰 팬덤이 생길 정도로.

미래에는 그렇게 유명한 가수였기에 자연스레 은후도 그녀의 노래를 접할 수 있었다.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그리고 은후가 한창 이혼을 앞두고 힘들어했을 때 그녀가 부른 한 노래에 위로를 받았더랬다.

‘거의 두 달 넘게 들었던가?’

하나의 노래를, 계속해서 반복 재생하면서.

그런 기억이 있었더랬다.

“어우, 이렇게 배부르게 먹은 건 오랜만이에요. 감사합니다.”

“집에서 밥 안 줘요?”

“아, 하하.”

“농담이었는데 진짜 안 주나 보네.”

“그르게요.”

은후가 피식 웃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그런데 그 나이면 시도 때도 없이 한창 배고플 텐데.”

“그. 음.”

이수지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은후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가 고민을 털어놓게끔 했다.

‘말해도 될까?’

어차피 오늘 보고 언제 다시 볼 수 있는 사이일지 몰랐다. 게다가 밥까지 사 준 데다가 아까 자신의 노래를 제일 오랜 시간 동안 들어 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이지수의 마음을 알아차린 은후가 등을 살짝 떠밀어 주었다.

“좀 털어놓으면 편해질 수도 있어요. 정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참고로 심리 상담 전공이라.”

“심리 상담이요?”

“네, 그러니 남 이야기 들어 주는 게 일이에요.”

“아하.”

이지수가 잠시 고민하다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나이 또래가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감정의 파도가 은후에게 전해졌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고아라서요. 부모님이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다행히 삼촌이 거둬 주셨는데 천덕꾸러기 신세랄까요. 그리고 밥은 주시긴 주세요.”

다만 부실할 뿐.

“위에 오빠가 한 명 있는데 삼촌이랑 사이가 안 좋거든요. 가수가 되고 싶은 것도 그래서였어요.”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였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남겨진 남매. 친척들이 그래도 보육원에 보내는 건 아니지 않으냐며 의논 끝에 두 남매를 반쯤 강제로 떠맡게 된 삼촌.

“그러다가 우연히 마음에 확 꽂히는 노래를 들었어요. 딱 제 상황을 위로하는 것 같았죠.”

그때 소녀는 생각했다.

나도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삼촌이나 다른 친구들, 선생님도 가수는 아무나 하냐며 뭐라고 해요. 그런데 포기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하고, 싸구려 기타를 하나 사서 무작정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래도 고등학교는 가서 생각하라고, 하다못해 가수가 아닌 아이돌을 노리고 엔터테인먼트에 지원하라고 하셨는데요.”

이지수는 그렇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이런저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은후는 이지수의 말을 그저 묵묵히 들어 주었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요?”

“제가 가수가 되고 싶다는 거요. 다들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하던데.”

“그건 모르는 거죠.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말해 줄 수 있어요. 꿈을 꾸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예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로또도 사야 당첨이 되는 법 아니던가.

“와.”

이지수가 내심 놀랐다.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자기 주위에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모두가 현실을 바라보라고 말했다. 응원이나 위로는커녕 조소 혹은 무관심만이 있었다.

“될 수 있을까요, 가수.”

“제 생각에는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중에 해외에서도 엄청 유명해지는 가수가요.”

이지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말이라지만 너무 과장되지 않은가. 하지만 은후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농담 같아요?”

“그럼요?”

“난 진담인데.”

“너무 터무니없잖아요. 제가 아무리 현실을 안 본다지만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어떻게 할까.

‘약간의 도움. 그리고 살짝 등을 떠밀어 주는 정도.’

마법사로서 행복이란 감정 마나를 흡수했다. 이미 없어져 버린, 은후만 기억하고 있는 시간 속이라지만 그녀의 노래를 통해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또한 그녀의 성공은 확실했다.

‘이런 이유로.’

그리고 예전에 우산 요괴를 도왔을 때처럼, 그냥 그러고 싶기도 해서.

“그럼 날 믿어요.”

“네?”

은후가 마나를 일으켰다.

“내 눈이 꽤 정확하거든요. 밥값을 포함한 생활비 정도는 내가 데뷔하거나 소속사를 찾을 때까지 줄게요. 일종의 투자?”

딱 이 정도.

더불어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망설이지 않게끔.

“밥……값이요?”

“네. 그러니까 굶고 다니지 말아요.”

이지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성공해서 몇 배로 갚아요. 기왕이면 조그마한 빌딩이라도 한 채 사 주면 좋겠네.”

“작은 빌딩이라도 몇 배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데 제가 실패하면요?”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그게 뭐예요. 그리고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쌓이면 그 돈도 꽤 클 텐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뭘 믿고 돈을 줘요?”

“내 안목.”

“틀릴 수도 있잖아요.”

“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제가 사람 잘못 본 탓인데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와, 이상해요.”

정말로.

“너무…… 너무 이상해.”

하지만 왜일까.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건.

그건 이지수라는 한 사람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정해 줘서, 그것도 너무 크게.

‘진짜로, 진짜로 이상한 사람.’

그리고.

‘고마운 사람.’

이 와중에 이지수는 생각했다. 방금 겪었던 일을 꼭 노래로 만들어 부르자고. 그래서 나중에 성공해서 방송에 나가서 꼭 이야기해야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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