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물건에 자아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오래된 물건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물론 아닌 경우도. 그 이유는 인간의 감정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임에도 강렬한 감정이 깃들게 된다면, 또는 밋밋한 감정이어도 우연과 환경이 갖춰진다면. 예컨대 영맥의 중심이라면 비교적 쉽게 물건에 자아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번 경우는 긴 세월인가.’
매우 낡디낡은 카메라에서 정령이 탄생하려고 하고 있었다. 무언가 계기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하지만 그 계기가 없다면.’
이 상태 그대로겠지.
‘이세계였다면 좀 다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 카메라에 무슨 사연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은후는 매우 조심스레 김성백에게 물었다.
“이 카메라는 꽤 오래되어 보이는데 최근에도 쓰시는 건가요?”
“아, 이거요.”
김성백이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안 쓴 지는 꽤 오래되었죠. 못해도 십…… 아니, 20년?”
“그런 것치고 관리가 매우 잘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제겐 부적 같은 거라서요.”
부적이라.
확실히.
‘이 정도라면 김성백의 불행을 막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큰 교통사고 한 번 정도. 그러면 탄생하려던 정령이 사라지기야 하겠지만. 그건 이 정령이 김성백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되려 했기에 그렇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 당장 말하기엔 좀 그렇고. 기회가 닿는다면 다음에 카메라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날 모델도 겸사겸사해야겠군요.”
“하하, 이거 들켰나요?”
마음 같아선 빌려서 연구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세계에선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니까.
“약속하신 겁니다?”
“그럼요.”
은후가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했다. 김성백은 다소 의아하기는 했으나 은후와 날짜를 조율해 약속을 잡았다.
* * *
사진 촬영이 끝나고 김성백이 사라졌다. 내심 점심이라도 사 주고 친분을 다지고 싶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 괜히 방해만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은후 씨는 몰라도 하연 씨는 말이지.’
대충 봐도 은후에게 호감이 퍽 있어 보였다.
‘잘되었으면 좋겠네.’
김성백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후 은후가 이하연에게 물었다.
“점심은 뭐 먹을래?”
“그러게.”
이하연에게 있어서 방금 순간은 마치 폭풍이 왔다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사진 촬영 제안이라니. 하물며 그 과정에서 최대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기에 포즈와 표정에 집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꾸미고 나올걸.’
흰 티에 청바지, 며칠 전에 비가 왔으니까 얇은 카디건 한 장. 정말 기본적인 차림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바라보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해 보였지만 본인에게는 아니었다.
“음식은 딱히 가리는 거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응.”
“일식? 양식?”
은후 개인적으로는 한식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첫 만남부터 한식을 먹기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었다.
‘먹기 힘든 음식도 좀 있고.’
은후가 선택지를 제안하자 이하연이 고민했다.
“둘 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 나 양식, 너 일식.”
“응?”
“결정은 가위바위보로. 가위 바위…….”
은후가 이겼다.
“근처에 괜찮은 파스타 집 있다더라.”
“그런 것까지 알아 왔어?”
은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알아 온 건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을 뿐.
‘이 무렵에 용산은 정말 자주 왔으니까.’
이하연과 연인이 되고 싶어서. 당연히 맛집 조사는 필수로 했었고. 그런 은후의 배려에 이하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으, 혼자 착각하면 안 되는데.’
현재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이전의 시대였다. 그래서 맛집을 찾으려면 데스크톱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혹은 신문이나 티브이를 참고해야 했다. 이하연으로서는 은후가 사전에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봤을 거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자.”
“어? 어어.”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 그리고 은후는 능숙하게 이하연을 이끌고 생각해 두었던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가게 이름은 판타. 꽤 구석진 곳에 있었고 골목길을 몇 번이나 지나쳐야 했다.
‘이런 곳에 가게가 있다고?’
이하연으로서는 의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은후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기에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내 도착했을 때.
‘와.’
이하연이 감탄했다.
‘진짜 있네?’
파스타 집이라고 대놓고 알려 주는 간판 그림.
‘이런 곳은 대체 어떻게 알았대?’
게다가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으며 분위기도 좋았다. 맛도 당연히 있었고. 이하연의 취향에 정말 딱 맞아떨어졌다.
“여기 괜찮지?”
“응. 집 근처면 진짜 자주 오겠다.”
“지하철 타면 금방이잖아?”
“그거야 그런데, 귀찮잖아.”
그런 맛만큼 은후와의 대화 또한 좋았다.
* * *
점심을 먹고 오락실에 들려서 간단한 게임과 인형 뽑기 등을 즐기고,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간이 대체 언제 이렇게 됐대.’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더니. 이하연이 새삼스레 놀랬다.
“슬슬 들어갈래?”
“으으, 그러게.”
이하연이 머뭇거렸다. 왠지 모르게 좀 아쉬워서. 그런 이하연에게 은후가 물었다.
“아니면 가볍게 술 한 잔?”
“그럴까?”
이하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은후가 굳이 이하연에게 술을 마시자고 한 이유는 그녀의 고민을 풀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취직이라.’
직접적으로 도움은 줄 수 없겠지만.
‘이런 일은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았다.
“여기도 미리 알아 온 거야?”
“그렇지?”
“이거 내가 너무 신경 쓰게 만든 것 같은데.”
“그러면 어때.”
“뭔가 미안하잖아.”
“그럼 다음에는 네가 코스 짜 봐.”
“다음에?”
은후가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뭐야. 오늘 보고 이제 평생 안 볼 생각이었어?”
“어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됐네. 이번엔 내가 올라왔으니까 다음에는 네가 언제 시간 나면 전주 놀러 와.”
“진짜 놀러 간다?”
“그래. 진짜 놀러 와라. 그리고 오늘 보면 알겠지만, 원래 타지 사람이 맛집이나 관광지는 더 잘 아는 법이야.”
은후와 이하연이 들어온 곳은 룸 형식으로 된 꽤 고급스러운 술집이었다. 일반적인 맥주나 소주가 아닌 와인이나 칵테일, 양주 등을 주로 파는. 그래서 이하연은 메뉴판을 보고 흠칫한 뒤에 말했다.
“여기 꽤 비싸지 않아? 다른 데도 괜찮은데.”
“내가 살 테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최근에 돈 좀 벌어서 이 정도는 충분해.”
이하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게 아닌데. 그리고 나랑 같은 취준생 아니었어?”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거든.”
“응?”
“그래서 차라도 한 대 뽑을까 싶다.”
“응?”
폐지 줍는 노인에게 받은 채권과 보석, 대충 시세를 알아보니 모두 정리한다면 최소 몇억. 그래서 은후의 통장은 꽤 넉넉해질 예정이었다.
“불법적인 일은 아니니까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도덕적이지 않은 일도 아니야.”
“아니, 그게 뭔가 이상하잖아. 취직도 안 한 대학생이 차라니. 차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기회 되면 말해 줄게.”
“괜히 궁금하게.”
“좀 더 친해지면.”
이하연이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친한 거 아니었어? 1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처음 만난 건 오늘이니까.”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잖아.”
“그럼 일단 술이나 시켜. 정 궁금하면 마시면서 이야기해 줄게.”
은후의 말에 이하연이 메뉴판을 유심히 바라보다 말했다.
“잘 모르겠어. 칵테일은 별로 안 당기는데. 혹시 추천하는 거 없어?”
“그럼 내 마음대로 시킨다?”
은후가 시킨 건 세일러 제리라는 럼이었다.
“아마 꽤 마음에 들 거야.”
“무슨 술인데?”
“토피랑 계피 향이 나는 럼. 바닐라 향도 조금 나고.”
술은 금방 나왔다.
“마시는 방법은 스트레이트나 얼음으로 온 더 록. 또 콜라나 우유 타면 진짜 맛있어.”
“콜라랑 우유?”
“응. 참고로 우유는 따뜻하게 해서.”
“오, 진짜 특이하다.”
처음에는 스트레이트로, 다음에는 얼음을 타 온 더 록으로, 이후 콜라랑 우유까지. 한동안 이하연은 술을 즐겼다.
“럼은 처음 마셔 보는데 진짜 좋다. 완전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
당연히 마음에 들 수밖에.
“그래서?”
“뭘?”
“돈 말이야, 돈. 무슨 대학생이 차야?”
“그러게.”
은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투자를 좀 받았어.”
폐지 줍는 노인과 얽힌 이야기는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은후는 이창석 이야기를 핑계로 댔다.
“투자?”
“응. 조그마한 사업체를 하나 차리기로 했거든. 차도 그래서 산다고 한 거야.”
실제로 필요하기도 했다. 평소에 날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갑자기 웬 사업이야?”
“취직하기엔 내 능력이 좀 아깝더라고. 나중에 택배로 보내 줄게. 아니면 다음에 만나면 주고.”
은후는 자신이 차릴 사업체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담금주라니.’
1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심 좀 서운했다. 그런 이하연에게 은후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취미로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어. 몇 개월? 그런데 내가 그쪽에 좀 재주가 있더라고. 게임 그만둔다고 한 것도 사업 때문에 그렇고.”
“으으, 그래?”
“응. 그나저나 넌?”
“나?”
“어. 취업하긴 해야 하는데 진로를 못 결정했다며.”
“그거야 그렇지.”
사실 공무원도 딱히 원해서 한 건 아니었다. 집에서 결정해 준 직업이었다. 다행히 공부 머리는 어느 정도 있어서 학교에 다니는 도중에 합격했지만.
“사회생활이 참 쉽지 않더라. 그런데 어딘가 취직하게 되면 그런 게 필수잖아?”
참 싫다고.
“그렇다고 프리랜서로 혼자 일하기엔 내가 재주가 없고, 게다가 프리랜서라고 해도 사회생활을 안 해도 되는 건 또 아니더라고.”
“능력만 있다면 그래도 좀 낫지. 상사 눈치 보느라 퇴근 늦게 하는 일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말만 자유지, 강제나 다름없는 회식이나 야유회에도 안 가도 되고.”
그런 사회생활을 주제로 이하연과 은후는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다. 그건 은후가 과거 사회생활을 해 봤기에 공감하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취직도 안 해 본 애가 되게 잘 안다?”
“듣는 게 좀 있으니까. 그나저나 게임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고?”
“응. 인터넷 방송이라도 해 볼까 해. 그래서 요새 좀 고민이 많네. 그렇다고 내가 프로 게이머가 될 수는 없잖아.”
“나쁘진…… 않은데. 생각 잘해.”
“응?”
“좋아하는 일이 취미가 아닌 직업이 되면 마냥 좋은 게 아니거든.”
은후가 한 가지 예시를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영화 평론가가 있어. 영화가 좋아서 그걸 직업으로 삼은 거지. 처음엔 진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평론가라는 직업으로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힘든 일이니까.
“그렇다고 전업으로 삼기엔 모자란 돈벌이라 부업으로 했어. 그런데 가면 갈수록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야.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를 보기 싫어질 정도로.”
“왜?”
“여기저기서 은근슬쩍 들어오는 청탁, 인맥 관리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일감이 들어오지도 않고. 뭐,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대. 세상에서 돈 벌기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평론하려면 영화를 마냥 순수하게 즐길 수 없다는 거야. 감독의 의도를 읽어야 하고 장면에 이유를 부여해야 하고. 한마디로 분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지.”
그 순간부터 순수하게 영화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고.
“네가 방송하면 비슷한 상황에 분명 맞닥뜨릴 거야. 예컨대 하기 싫은 게임이어도 유행하는 거면 억지로라도 해야 할 수도 있을걸?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다면 모를까.”
혹은.
“다양한 게임이 아니라 하나의 게임, 예컨대 지금 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그 게임은 그만두기도 힘들 거야. 하기 싫거나 재미없어도 계속해야만 하겠지.”
대부분 그 게임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일 테니까.
“그 외에 문제점도 있어. 얼굴을 드러내고 한다면 시달릴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있을 거고.”
자연스레 따라올 얼굴 평가. 또 자칫 잘못하면 악질적인 사람이 붙어 범죄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스토커라든가, 혹은 악플과 유언비어에 시달릴 수도 있었고.
실제로 최근에 모 인터넷 방송인이 악플과 잘못된 소문 때문에 자살한 일까지 있었다. 이처럼 방송이란 게 보기와 달리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나는 좀 쉽게 생각했는데.”
이하연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니 다시 생각해 봐야 하려나?”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응?”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너라면.”
실제로 이하연은 훗날 대기업이라 불릴 정도로 방송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 사실을 은후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을 뿐.
‘자살도 그렇지.’
다행히 미수로 그쳤지만. 인터넷에서 그 기사를 접했을 때 얼마나 깜짝 놀랐던가. 그리고 나중에 이하연이 밝히길.
‘악플 때문에 연예인들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접할 때 이해를 못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알겠더라고요. 제가 방송 시작할 때 충분히 이런 부분을 생각하고 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었죠.’
사소한 말실수로부터 야기된 유언비어와 비난이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하게끔 했다고. 사람의 이목을 모으면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말실수도 확대 재생산이 되어 버리니까. 하물며 대규모 시청자를 보유한 스트리머라면 더더욱.
“나는 나 말리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야. 대신에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지. 미리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일을 시작하는 거랑 아닌 거랑은 차이가 크게 날 거거든.”
한동안 그렇게 은후가 인터넷 방송에 관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 이하연은 그런 은후에게 퍽 감동을 먹었다. 자기 일에 이 정도로 관심을 두고 진지하게 말해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진짜 멋있네.’
이러다가 자신이 말했던 것과 반대로, 역으로 반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