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은후가 아이스 카페 모카를 가지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하연만 혼자 쭈뼛거리고 있었던 것뿐이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긴 시간 동안 알고 지냈다고 한들 온라인상의 만남뿐이었으니까.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차이는 꽤 컸다.
게다가 이하연이 예상하던 것과 달리 은후는 너무 잘생겼다. 그것도 엄청 많이. 그래서 은후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슬쩍 게임 이야기를 꺼냈다.
“요새도 열심히 하고 있어?”
“어? 뭐를?”
“게임.”
“그야 뭐. 당연히 열심히 하고 있지.”
“다행이네.”
“그게 다행일 일인가?”
“뭐라도 열심히 하는 게 있다면 다행인 일이지. 취업 준비 스트레스로 게임에 집중 못 하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은후와 이하연의 나이는 동갑이었다. 그리고 이미 대학교를 졸업한 상태였다.
“뭐 할지 아직도 고민 중?”
“그거야, 응.”
은후가 이 무렵의 이하연에 관해 기억을 더듬었다.
남자와 달리 군대에 가지 않았고 휴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스트레이트로 졸업. 졸업과 동시에 행정직 공무원 9급 합격.
‘작년에 때려치웠다고 했던가.’
이유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경직된 조직 문화. 스트레스를 잔뜩 불러오는 민원. 원치 않아도 참여해야만 하는 회식.
‘결정타는 따돌림.’
업무적인 것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회식도 사회생활의 일부라며 이해는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사람과의 트러블은 견디기 힘든 법. 그대로 계속 지내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만두었다고.
“……결국에 이번 최초 레이드 기록 빼앗겼다니까.”
“그럼 세컨드?”
“어. 칭호 아까워 죽겠다.”
“다섯 시간 차이면 딱히 아까울 것도 없을 것 같은데. 50분도 아니고.”
“에이, 그래도 사람 기분이 안 그렇다니까?”
은후는 그렇게 이하연에 관해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생각과 말의 불일치. 하지만 그 대화에 어색함은 없었다. 마법사로서 이런 건 너무 익숙했다.
“하여간 고생 좀 했겠네.”
“재미도 있고 성취감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은 하나도 안 들더라고. 아쉽기는 한데.”
서로의 만남부터 공통된 관심사는 게임. 게임에 관한 이야기로 물꼬를 트자 어느새 이하연은 편하게 수다를 떨게 되었다. 하물며 은후의 경청 태도라거나 리액션도 훌륭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게임 이야기는 슬슬 그만하고. 일단 좀 밖으로 나가서 놀까?”
“갑자기?”
“너 요새 계속 집에 틀어박혀 있었을 거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
“오늘 같은 날 햇볕이라도 좀 쬐어야지. 그리고 운동은 힘들어도 산책이라도 좀 하고. 그러다가 몸 축나는 거 순식간이다?”
잔소리이기는 했으나 은후의 말에는 걱정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이하연은 웃으며 투덜거렸다.
“네가 우리 엄마냐.”
“엄마는 아니지만 친구지.”
이하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참, 부끄러운 소리를 태연하게 잘도 하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니, 마음이 간질간질한 것이 꽤 기분이 좋았다.
* * *
이하연과 은후는 용산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어우.’
이하연은 은연중에 쏟아지는 시선에 태연함을 가장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더하네.’
은후에게 자랑했던 것처럼 이하연은 외모를 타고났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에는 꽤 익숙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꽤 부담스러웠다.
‘사장인 때문이겠지?’
사과깎기개장인. 줄여서 사장인.
이하연이 쓰게 웃었다. 아직 은후라고 이름을 부르기엔 뭔가 어색해서. 상대방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또 여러모로 배려해 주고 있는데 자신은 거리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래서 뭔가 미안했다. 그런데 그런 감정 때문인지 이하연의 미소는 위태로워 보였다.
“뭔 일 있어?”
“어? 아니.”
은후가 검지로 이하연의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웃지 마. 걱정되게.”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두 어린 학생이 서로 속삭였다.
“야야. 저기 봐 봐.”
“어?”
“둘이 분위기 미쳤다.”
“사진 찍으면 안 되겠지? 트윈터에 올리면 팔로우 수 장난 아닐 것 같은데. 제목은 지나가다 만난 미친 남녀라고 하고.”
“얘가 다른 의미로 미쳤네. 너 그거 범죄야, 몰카라고.”
“아 씨, 진짜 한다는 게 아니잖아. 상상만 해 본 거임, 상상만. 상상은 자유 몰라?”
“너, 그거 중독이다, 중독. 무슨 도박도 아니고.”
외모가 받쳐 줬기에 두 사람의 대화와 행동은 그것만으로 그림이었다. 근처의 어린 학생이 몰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나저나 산책이라니.’
목적지는 한 정거장 떨어진 이촌역 주변의 국립중앙박물관. 은후가 이하연에게 가자고 한 곳이었다. 그곳에 산책하기 딱 좋은 코스가 있다면서.
‘박물관에 그런 코스가 있었나.’
하기야 그런 장소는 타지 사람이 더 잘 안다고 했던가.
“내리자.”
“어? 어어.”
은후가 멍때리던 이하연의 어깨를 툭 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하연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은후를 뒤따라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 남자가 굳게 결심하고 후다닥 내렸다.
* *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관의 규모는 참 컸고, 그 규모만큼이나 야외 부지도 엄청 넓었다. 그리고 그곳을 방문객들이나 시민들이 즐길 수 있게끔 잘 가꾸어 놓았다.
“와, 나 박물관에 꽤 여러 번 왔었거든? 무슨 체험학습이니 뭐니 학교에서 가라고 해서.”
그런데.
“이런 길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
“오늘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외곽 둘레를 아우르는 오솔길.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씨. 계절상 여름이기는 했으나 며칠 전에 비가 와서 그런지 제법 선선한 편이었다. 한마디로 날씨가 딱 좋았다.
“좋긴 좋다. 그런데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게임은 갑자기 왜 접어? 취직 때문에 그런 거?”
“글쎄, 아마도?”
취직이라.
“그 애매한 대답은 뭐야.”
은후가 픽 웃었다. 딱히 취직 때문에 게임을 접는 건 아니었으니까.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긴 세월과 이세계에서의 경험 때문이리라.
‘내가 게임을 언제까지 했더라.’
취직을 준비하면서도, 결혼하고 나서도 틈틈이, 최대한 시간을 내서. 물론 결혼 후에는 가정생활에 충실한 범위 내에서. 그래서 개인 시간을 쪼개고 밤잠을 줄여 게임 할 시간을 확보했었다.
그건 과거 은후에게 있어서 게임이 취미임과 동시에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련한 그리움의 산물일 뿐.
“그나저나 나오니까…… 음.”
“응? 왜 말을 하다 말아?”
은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하연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은후의 지시에 따랐다. 순식간에 바뀐 은후의 분위기가 무척 무거웠기 때문이다.
‘착각인 줄 알았는데.’
은후가 뒤를 돌아서 떨어진 곳에 있는 쭈뼛거리고 있는 한 남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구시죠?”
“네?”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아, 그.”
“제 착각이 아니라면 아까 지하철역에서부터 따라오신 것 같은데요.”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둘째치고 왜 따라오셨죠?”
남자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며 말했다.
“두 분을 찍고 싶어서 따라왔습니다.”
“찍고 싶다고요?”
“네. 제가 그, 취미로 사진을 하고 있거든요.”
단순한 취미가 아닌 꽤 깊게 파는, 부업으로 이따금 용돈을 벌거나 작품을 출품하기까지 한다고.
“마침 오늘 월차를 내고 사진 촬영을 나왔거든요. 가벼운 마음에 풍경이나 좀 찍을까 했는데 두 분이 우연히 눈에 들어와서요. 원래는 제가 인물을 주로 찍거든요.”
그래서 망설이다가 뒤를 쫓았다고. 하지만 다짜고짜 안면도 없는 이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기엔 망설여져서 따라만 오고 있었다고 변명했다.
‘어이가 좀 없긴 하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외모 탓인가?’
보디 체인지 이후 쏟아지는 시선과 주위의 칭찬. 그건 은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과거와 다른 이하연의 태도도 그렇고. 아마 그건 전부 외모가 원인일 터. 하지만 사진 촬영이라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나 싶어 마나까지 동원해 최대한 눈앞에 있는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암살자……가 현대에 있을 리는 없겠지.’
이세계였다면 이런 변명은 절대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일단 때려눕히고 봤거나 아예 따돌리고 반응을 살폈을 터.
“저어, 어떻게든 안 될까요? 긴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 아, 공짜로 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모델료도 충분히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한번 말문이 트이자 남자의 입은 쉬질 않았다. 그때 은후의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정령?’
남자의 가방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꿈틀임.
‘아니, 정령은 아니야.’
뭐랄까.
‘탄생하기 직전?’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은후는 남자의 말을 끊은 뒤 말했다.
“일단 일행이 있어서 의견을 좀 물어보고요. 저 혼자 결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남자가 넙죽 소리쳤다. 은후는 남자와 함께 이하연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모델? 어, 뭐, 난 상관없을 것 같은데. 넌 괜찮아?”
“나야 뭐.”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은후와 이하연이 사진사에게 다가갔다.
“저어, 사진사님?”
“네, 네!”
“많은 시간을 뺏기기는 좀 그러니까 딱 한 시간만. 모델료는 괜찮으니까 인터넷에 업로드하지 않고 개인 소장으로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좋은 결과물 중 몇 장은 따로 출력해서 주시고요. 저는 그 조건이면 괜찮아요. 사장, 아니, 으, 은. 큼, 은후 너는?”
은후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사가 잠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게 어딘가 싶어서 고개를 숙였다. 은후가 이하연에게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왠지 익숙하다?”
“대학 생활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모델 일 좀 했었거든. 공무원 준비하면서 그만뒀지만.”
이런 이야기, 했었던 적이 있었나. 긴 시간은 아니라지만 연애도 했었는데.
‘굳이 중요한 건 아니긴 한데.’
은후가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던 사이, 남자가 자신의 소개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게 생각나 아차, 했다. 남자는 품에 있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낸 뒤 두 사람에게 한 장씩 건넸다.
“제 소개도 제대로 안 했네요. 여기 제 명함이고요. 명진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김성백이라고 합니다.”
“의사셨군요?”
“하하. 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여 아프신 일 있으면 저희 병원으로 오세요. 잘해 드리겠습니다.”
“이은후입니다. 대학생입니다.”
“이하연이에요.”
서로 간단한 통성명 후 근처에 있는 용산가족공원으로 향했다. 김성백이 좋은 장소가 생각났다며 두 사람을 이끌었다.
“근처에 조그마한 폭포가 있거든요. 미르 폭포라고 주위 배경도 참 좋습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도 김성백은 틈틈이 셔터를 눌렀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걸어 주시면 됩니다. 연인이신 것 같은데 애정 행각도 좋고요.”
“애인은 아닙니다.”
“아, 이런. 친구분이셨군요. 죄송합니다.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서 착각했네요.”
김성백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은후는 덤덤했고 이하연은 뭔가 부끄러워 그냥 웃고 말았다.
‘표정 좋고!’
두 사람이 그냥 서 있거나 나란히 걷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진 찍을 맛이 났다. 그렇게 김성백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은후는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세웠다.
‘가방 안에는 뭐가 있을까.’
뭔가 계속 반응을 하고 있는데. 계속 집중하고 관찰하지 않으면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로 미약하게, 하지만 확실히 마나가 꿈틀댔다. 그래서 은후는 적당히 타이밍을 봐서 김성백에게 물었다.
“그 큰 가방은 전부 사진 관련 도구인가요?”
“네, 그렇죠. 오랜만에 시간 내서 나왔던 거라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좀 무겁네요.”
“혹시 구경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김성백이 흔쾌히 가방을 은후에게 열어 보여 주었다. 은후는 그때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감각에 잡힌 게 무엇이었는지.
‘카메라?’
아주 낡아 보이는 카메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