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6화 (16/170)

제16화

1957년, 한국동화작가협의회에서 어린이 헌장을 제정했다. 그 내용은 국가와 사회가 어린이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해 대한민국 곳곳에 헌장비가 새워졌다.

덕진공원에 세워진 어린이 헌장비도 그 연장선이었다. 건립된 건 1976년이라고. 그때 은후의 눈앞에서 할아버지처럼 미소 짓고 있는 공원의 수호령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내 공원 수호령의 입가엔 쓸쓸함이 걸렸다.

“내가 태어난 건 한 아버지의 불행 때문이었어.”

헌장비를 세우기 위해 일하던 인부, 그 인부의 아이가 아버지를 보러 놀러 왔다가 사고를 당했다.

“안전사고였지. 아버지를 보고 기쁘게 달려오던 아이가 근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든.”

그리고 바닥에 있던 돌에 머리를 강하게 찍혔다. 급하게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하루 만에 사망. 그렇게 한 가정에 불행이 찾아왔다.

“그때 그 아버지는 무척 슬퍼했으나 제 일을 내팽개치지 않았어. 주위 동료들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끝내 자신이 헌장비를 새우고 싶다고 했지.”

그리고 윗선에 한 가지 요청을 했다. 헌장비를 세울 돌을 바꿔 달라는 것.

“죽은 아들의 피가 묻은 돌로 말이야.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윗선은 그 인부의 요청을 들어주었어.”

인부는 헌장비에 자신의 소망을 담았다.

“부디 이곳에서 어린아이가 다치지 않고 건강히 뛰어놀 수 있기를.”

그리하여 탄생한 게 자신이라고.

“내가 눈을 감기 전까지 그 인부는 이따금 공원을 찾았어.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다시 잠에서 깨어난 지 고작 며칠. 그 며칠 동안 공원의 수호령은 은후와 그 인부를 기다렸다. 하지만 찾아온 건 은후뿐이었다.

“별거 없지?”

“글쎄. 별거 맞는 것 같은데.”

“응?”

“정령…… 그러니까 수호령의 탄생에 필요한 소망과 감정을 그 인부가 발휘했다는 소리니까.”

이세계에서는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현대 지구. 물론 과거였으니 지금보다 자연은 보존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지금보다 대기의 마나 농도도 풍부했을 것이고.

‘하지만 그래 봐야 오십보백보였을 터.’

그 50보도 큰 차이라면 큰 차이겠으나 수호령이 탄생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마나 수치였을 것이다.

아무리 강렬한 감정이, 소망이 기적을 불러일으킨다지만 그것도 환경이 받쳐 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공원의 수호령이 탄생한 건 은후가 판단컨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거로 끝?”

“응, 끝이야. 그래도 좋다.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왜냐하면 공원의 수호령이 접할 수 있는 건 어린아이뿐이었으니. 일정 이상의 나이를 먹는다면 아무리 공원의 수호령이 원한다고 할지라도 말을 걸기는커녕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단순히 지켜볼 수만 있었다.

그러니 이런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말하기에 너무 무거운 이야기인지라 수호령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 깜짝 놀랐다니까? 나이 먹은 김미나가 내 모습을 알아보고 목소리까지 듣다니?”

은후가 픽 웃었다. 수호령이 덩달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넌?”

“나?”

“응. 내 이야기만 하면 공평하지 않잖아. 잘나가는 도사야?”

“도사는 아니야. 마법사지.”

“오오! 마법사!”

수호령의 눈이 반짝 반짝였다.

“불도 날릴 수 있어? 바람은? 아, 하늘은 날았고 물건도 띄웠으니까.”

정신없이 제 할 말만 하는 수호령의 모습은 그 또래와 같았다. 아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것과 천양지차였다.

‘이게 공원의 수호령이 가진 성격이겠지.’

성인의 사고 수준을 가졌음에도 감정과 모습은 어린아이와 비슷한.

“보여 주면 안 돼? 그으, 곤란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많이 힘들면 어쩔 수 없구.”

“딱히 그리 힘든 건 아니야.”

은후가 손가락에 조그마한 불을 피워 냈다.

“오오!”

공원의 수호령이 무척 기뻐했다. 자칫 잘못하면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 같은 모습. 하지만 그게 진심이라는 걸 은후는 알았다.

“날릴 수도 있어?”

“그럼.”

은후가 잠시 고민하다 웃으며 손가락에 피운 불꽃에 마나를 더 불어넣었다. 그리고 하늘로 쏘아 올렸다.

“오, 오오오! 와!”

허공에 퍼지는 불꽃의 향연.

둘만의 불꽃놀이였다.

* * *

은후가 공원의 수호령에게 받은 연잎으로 만든 찻잔. 은후는 그 찻잔을 수호령에게 다시 선물했다.

‘이 찻잔에다 솔잎을 우려내 차로 마시면 꽤 도움이 될 거야.’

‘정말? 어, 그런데 다시 나한테 줘도 돼?’

은후는 미안해 하는 수호령에게 선물이라며 찻잔을 억지로 떠넘겼다. 다른 정령도 아니고 수호령. 그것도 아이를 위한, 하물며 우산 요괴와의 인연을 이어 줬으니. 그 과정에서 얻은 정령의 눈물이 몇십 배는 귀했다.

‘사실 그런 합리적인 이유보다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

‘친구가 된 기념으로 선물.’

‘응? 친구?’

‘그래, 친구.’

‘어, 음. 친구…… 우리 친구야?’

‘하지 말까?’

‘아, 아니야! 친구 해!’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며 수호령은 참 기뻐하더라. 어렵다면 참 어렵지만 쉽다면 또 쉬운 게 친구를 사귀는 일 아니던가.

그렇게 그날 은후에게 정령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리고 전주 유지인 이창석을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은후는 그날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전주지방법원으로 향했다. 그 근처에 변호사 사무실들이 참 많았기 때문이다. 목적은 이창석으로부터 받은 계약서를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대충 좋은 거란 건 알겠지만.’

은후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이런 계약서는, 특히 일정 이상의 금액이 오가는 계약서는 무조건 변호사에게 상담을 받는 게 좋았다. 어떤 계약이든 간에. 이건 과거 은후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지혜였다.

‘난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최소 천 단위 이상의 계약서가 오고 가는 일이라면 당연히 전문가에게 상담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재판을 의뢰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자문이라면 그리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지간히 유명하지 않은 이상 100을 넘는 경우는 드물어. 그 돈으로 수천에서 심하게는 수억을 아낄 수도 있는데. 근데 진짜 세상에 멍청한 사람 많더라. 그 돈을 아까워하더라고.’

‘실제로 내 주위에 친척분 한 분이 그랬는데…… 지어낸 이야기 아니냐고. 후배님, 세상에는 내 가치관으로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법이야.’

은후가 이세계에 가기 전, 막 첫 회사에 입사했을 때 직속 사수로부터 듣게 된 조언. 은후에게 있어서 꽤 인상 깊은 말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은혜를 갚을까.’

지금은 사라진, 은후만 기억하는 미래의 일. 하지만 은후는 그 선배에게 제법 큰 은혜를 입었더랬다.

“계약 조건이 너무 후한데요? 혹시 무슨 함정이나 불공정 조항이 있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럴 일이 없어야겠지만, 훗날 재판으로 다투게 된다면 의뢰자분에게 무척 유리하게 되어 있어요.”

은후가 들른 변호사 사무실은 총 다섯 군데. 그 모두가 비슷한 말을 했다. 한마디로 계약서에 속임수가 없다는 것.

“이건 도장 안 찍으면 바보입니다, 바보. 무조건 하세요.”

계약서 검토도 끝났겠다.

‘뭘 할까.’

시간이 잠시 붕 떴다. 약속은 저녁이었으니까.

‘예전이라면 친구라도 불러냈을 텐데.’

심심하다는 이유로,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 혹은 컴퓨터 온라인 게임을 같이, 혹은 당구나 볼링을. 하지만 너무도 오랜 시간을 이세계에서 보내고 왔다. 그래서 은후에게 있어 과거의 친구들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불러내면 오기야 할 놈이 몇 있긴 하지만.’

아마 어색하기 짝이 없을 터. 그때와 지금의 은후는 너무도 달랐다. 그걸 은후 스스로도 알았다. 게다가 그런 생각에서 귀찮음까지 느꼈다. 왜냐하면 기억을 더듬어야 했기에.

100년도 넘은 너무 먼 과거는 너무 희미해졌고, 그 희미함을 걷으려면 마법사로서 집중해야만 했다. 그건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새로 사귄 친구나 보러 갈까.’

저녁 시간까지 공원에서. 그건 꽤 괜찮은 느낌이었다.

* * *

은후가 덕진공원에 도착 한 건 3시 즈음. 그때부터 세 시간 후, 덕진공원 뒤편 주차장에 은후를 데리러 온 차량이 한 대 도착했다.

“뭐야. 벌써 가는 거야?”

“조만간 또 올게.”

아쉬움을 진득하게 표하던 공원의 수호령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약속?”

“약속.”

이번에는 은후가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환하게 웃으며 수호령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한동안 세차게 손을 흔든 다음 쪼르르 다른 곳으로 달려 나가며 외쳤다.

“배웅하고 있으면 붙잡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은후가 픽 웃은 후 근처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은폐 마법을 해제한 후에 자신을 마중 나온 차량으로 다가갔다.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일전에 한 번 봤던 이창석의 개인 운전사였다. 운전사는 뒷문을 연 다음, 은후가 타는 걸 확인하고 공손히 문을 닫았다.

이후 조용한 시간이 흘러갔다. 전주 외곽에 있는 이창석의 자택에 도착하기까지 은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하시네.’

운전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차량에 탑승하는 게 너무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한 번 경험이 있었기에 묵묵히 운전사는 운전에 집중했다.

“도착했습니다.”

운전사가 문을 열어 주자 은후가 내렸다. 그런 은후를 이창석이 마중해 주었다.

“오셨소?”

“굳이 이렇게 나와 계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그래도 객이 오는데 주인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하물며 내가 초대한 객인데.”

은후가 살며시 웃은 후 이창석의 집을 쓱 훑어봤다.

‘과연.’

멋졌다.

하지만 은후가 느끼는 멋짐은 마법사로서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탄을 감추지 않는 은후에게 이창석이 씩 웃으며 물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집이 좀 멋지지요?”

“자랑하실 만합니다. 정말 좋은 곳에 자리 잡으셨습니다.”

이창석은 은후가 집의 외양이 아닌 터를 말하자 다소 이상함을 느꼈지만, 곧 그러려니 했다. 정말로 좋은 위치는 맞았으니까.

“내 아버지가 생전 지은 집인데, 당시 풍수지리로 유명한 스님을 모셨다고 그러더이다.”

“범상치 않으신 스님이셨나 봅니다.”

“그런데 땅도 볼 줄 아시오?”

“그런 쪽에 조금 재주가 있습니다.”

자연 곳곳에 마나는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그 흐름이 땅에서 이따금 뭉치는 곳이 있었으니, 그런 곳을 영맥이라 했다.

물론 그런 곳이 전부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과하면 지진이라거나 산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 하지만 은후가 보기에 이창석의 집 위치는 딱 적당했다.

‘하물며 집의 배치가 일종의 마법진을 이루고 있어.’

매우 효율적으로.

은후의 걸음이 느려졌다. 현대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마법진. 이세계에서 배운 것과 비슷하면서 다른 구조. 그래서 은후는 호기심을 강하게 느꼈다.

‘이게 진법이려나.’

도사가 부린다는.

폐지 줍는 노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창석은 자신의 집을 좋게 봐주는 은후를 한동안 지켜보다 씩 웃으며 가벼운 농담에 진심을 섞어서 말했다.

“나이가 창창한데 술을 빚고 땅을 본다, 라. 거, 본인이 특이한 건 아시는지 모르겠소.”

“집도 좀 봅니다. 집 설계는 누가 했는지 아시나요?”

“아까 말했던 스님이 했다고 들었소.”

“그렇군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주위에 시선을 돌린 은후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응?’

흔히 치즈냥이라 불리는 고양이였다. 그제야 은후의 시야에 건물 주위에 숨어 있는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꽤 많은데?’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진법.’

거기에 다수의 고양이 중 한 마리도 은후에게 공격할 의도를 품지 않았으니까. 더불어 처음 보는 진법에 한눈이 팔려서.

‘딱히 문제 될 건 아니었어.’

감각이 무뎌졌다. 현대의 평화로움 때문에. 이를 좋아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자책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은후가 속으로 픽 웃었다. 그때 이창석이 은후에게 입을 열며 무릎을 굽혔다.

“귀엽지 않소?”

그리고 치즈냥이의 등을 쓰다듬어 줬다.

“고양이를 상당히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좋아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아이들을 진즉 내쫓았겠지요.”

치즈냥이는 이창석의 손길에 그릉그릉거리며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았다. 이창석은 그런 치즈냥이를 계속 쓰다듬으며 한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비석?’

자세히 살펴보니 묘비였다. 사람이 아닌 고양이를 위한 묘비.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창석의 눈동자엔 아련함이 가득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항상 근엄하기만 할 것 같았다. 방금 치즈냥이를 쓰다듬어 줄 때조차 굳은 표정이었으니까. 그래서 은후는 섣불리 저 묘비에 관해 물을 수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야옹.

이 자리에서 은후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수호령.’

일전에 은후가 봤던 이창석에게 붙어 있는 그 고양이 수호령이 숨겼던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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