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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5화 (15/170)

제15화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느 날, 김미나는 마법사를 만났다. 그리고 집에서 하늘을 날아 꽤 거리가 있는 덕진공원에 도착했다.

“여, 여기는 왜 오신 거죠?”

은후가 호칭에 관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님을 치료한 우산 요괴가 태어난 곳이 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우산 요괴를 도와준 정령이 있는 곳이기도 하죠.”

은후는 덕진공원의 수호령과 우산 요괴의 인연에 관해 설명했다. 하루살이에 불과한 요괴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 수호령이었다.

“수호령이요?”

“네.”

은후가 은폐 마법을 유지한 채 느긋하게 걸었다. 김미나가 조심스레 뒤따랐다. 이윽고 폐지 줍는 노인과 술잔을 기울였던 정자 근처에 도착했다. 그러자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공원의 수호령이 뿅, 하고 나타났다.

“왔네?”

은후가 어깨를 으쓱인 뒤 공원의 수호령을 바라봤다. 그러자 수호령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우, 저 여인에겐 내 모습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왜?”

“그냥…… 뭐어. 아이는 언젠가 크는 법이니까? 커 버린 아이는 좀. 그, 으으.”

공원의 수호령이 잠시 김미나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는 말이야. 순수하지.”

“그렇지.”

“하지만 다 커 버린 아이는 순수하지 않아. 사람이 살아가면서 세상의 때를 묻히지 않을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공원의 수호령이 만났던 아이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재회한다면.

“내가 기억한 아이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야. 그것도 운이 좋을 경우나 그렇지, 보통은 약간의 흔적도 없어.”

그러니 공원의 수호령과 아이의 재회는 악몽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는 건 당연한 이치. 그래서 공원의 수호령이 가진 본질은 쓸쓸함투성이였다.

“그래도 쟨 좀 낫다. 예전에 봤던 순수함이 조금은 남아 있으니까.”

근처에서 눈치를 살피던 김미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날 아니?”

“응. 네가 어렸을 때 소중하게 우산을 품고 이곳에 왔을 때 봤지.”

“내가 어렸을 때라니?”

김미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쳐 줘도 초등학생에 불과해 보이는데. 그런 김미나에게 은후가 설명했다.

“얘는 아까 말했던 수호령입니다. 사람이 아니죠.”

“아.”

하도 황당한 일을 계속 겪었기 때문일까. 김미나는 그러려니 납득했다. 그런 김미나에게 공원의 수호령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가 소중하게 여겼던 우산을 여기에서 잃어버렸잖아?”

“그, 네.”

김미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샀던 예쁘고 고급스러운 우산. 그 우산을 공원에서 잃어버렸었다. 사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 장난감을 사 주지 못한 게 한이 맺혔었나 보다. 우리 아버지는 내 아들과 비슷하게 떼를 쓰던 내게 우산을 사 주셨었는데,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런 김미나의 상념은 은후의 말에 끊어졌다.

“그 우산이 요괴가 되었어.”

은후는 공원 수호령이 하는 말을 이어받아 아까 못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김미나가 전후 사정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그럼 제가 치매에서 회복된 게?”

“그럴 겁니다. 치매를 앓으셨다가 그날 기억을 되찾으신 게 맞다면.”

우산 요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날 기억해 달라고, 자신의 존재를. 그게 최후의 말이었습니다. 제가 굳이 어머님을 여기에 모신 이유도 그 때문이죠.”

“아.”

사실 잘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아주 어렸을 적 잃어버린 우산에서 태어난 요괴. 그 요괴가 자신의 치매를 치료하고 사라졌다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무슨 연극 대본이냐며 코웃음 치지 않을까.

“이제 돌아가실까요?”

“네?”

“여기에 모신 이유는 그 때문이니까요.”

“그, 저.”

은후가 공원 수호령에게 말했다.

“금방 다시 올게.”

“응, 기다릴게. 빨리 와야 해?”

은후가 피식 웃고 김미나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오르려던 찰나, 김미나가 외쳤다.

“저어! 잠시만요!”

“무슨 일이신지?”

“그 우산, 우산을 잃어버린 곳이 생각났어요. 그곳에 잠시 갔다 가면 안 될까요?”

어차피 집에서 멀지 않은 곳. 하지만 김미나는 왠지 모르게 알았다. 이후로 눈앞에 있는 이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그 우산 요괴가 절 도와주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 어. 선생님?께서 힘을 써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 이전에 수호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전부 없었던 일이잖아요?”

그러니.

“좀 더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우산 요괴를 추모하고 싶어요. 같이요.”

김미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우산 요괴의 탄생은 잘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는 인과 관계가 명확했다.

‘솔직히 아직도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니야.’

하나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우산 요괴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것. 그것도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의 인생까지 구원받은 것이었다.

“사실 지금 이대로 집에 가도 오늘 있었던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러겠죠.”

하지만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어요. 우산 요괴의 이야기를. 그리고 오늘을요.”

은후가 공원의 수호령을 바라봤다. 공원의 수호령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네가 기억하는 곳이 맞다면. 틀리면 그대로 돌아가 줘.”

김미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 김미나는 좀 의아함을 느꼈다.

‘한 명도 안 보이네.’

아무리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지만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덕진공원은 새벽에도 운동이나 산책 등으로 사람이 꽤 찾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마법사라고 했지. 뭔가 마법을 쓴 걸까.’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가는 곳이 정확하냐지.

“여기, 여기였어요.”

은후가 공원의 수호령을 지긋이 바라봤다. 공원의 수호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혔네.”

그리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기쁘긴 한 모양이었다. 은후는 피식 웃고는 리어카에 넣어 두었던 술과 잔을 꺼냈다.

굳이 김미나가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은후는 개인적으로 우산 요괴를 추모하고자 했으니까. 그래서 리어카에 미리 술과 잔을 넣어 두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네.”

“앗! 나도!”

“술은 애가 마시는 거 아니다.”

“애 아닌걸! 내가 태어난 연도는 1976년이란 말이야!”

은후가 픽 웃었다.

“그래도 본질은 결국 애지.”

“우씨.”

“아이의 수호령이잖아? 아이 형상을 한. 그러니 어린애 맞아.”

“아니, 으.”

“어린애가 술 마시는 거 아니다.”

은후와 수호령의 투덕거림에 김미나가 풋, 하고 웃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들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 * *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신비로운 일. 집에 도착한 김미나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들린 술잔이 방금 겪은 일이 현실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술잔은 은후가 일부러 회수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김미나가 겪은 일이 진짜라는 걸 자각할 수 있도록.

“아들 자니?”

“…….”

김미나는 아들의 모습을 한번 확인한 뒤에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술잔을 식탁에 올려놓고 조금 전까지의 일을 회상했다.

‘감사한 일이지.’

또 재미도 있었다. 특히 하늘을 나는 일은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일일 터.

‘다시 한번 하늘을 날 수는 없으려나.’

처음에 하늘을 날았을 때는 너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에는 그래도 좀 괜찮았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다소 있었다.

비행기도 아니고 맨몸으로 높은 상공을 떠다니는 일은 재밌었다. 물론 그런 재미 외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우산 요괴의 이야기.

기억 속에서 잊혔던 우산에서 태어난 요괴의 선물. 그리고 마지막에 우산 요괴를 위해 기울이던 술잔까지.

‘꼭 기억할게요.’

죽을 때까지 평생. 김미나가 속으로 다짐했다. 이로써 우산 요괴가 은후에게 남겼던 유언이 이루어졌다.

* * *

김미나를 데려다주고 온 은후에게 공원의 수호령이 물었다.

“그런데 아무 조치 안 해도 돼?”

“뭘?”

“너. 너에 관해서 알려지면 좀 골치 아파질 텐데.”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너와 내 존재감을 흐릿하게 했으니까. 아마 며칠 후면 우산 요괴는 기억해도 너나 나에 관해서는 애매해질걸?”

“오, 그런 재주도 있어?”

“마법사니까. 그리고 설령 기억해도 누가 믿기나 할까.”

아무리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라지만, 또 도사나 무당과 같은 능력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요괴가 치매를 치료했다, 라.’

믿기나 할까. 하물며 은후가 김미나를 찾아간 요괴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서였으니. 그러니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혹여 그로 인해 무언가 문제가 생겨도 은후는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그나저나 할 말이 있다며?”

“아. 그전에 일단 선물. 요기.”

수호령이 낡은 연잎을 건넸다.

“헤헤. 좀 별로일까?”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수호령에게 은후가 고개를 저었다.

“훌륭해.”

“응?”

“세월을 머금으며 버틴 식물의 흔적은 깊은 마나를 머금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괜찮겠어?”

“뭐가?”

“이걸 내게 주면 넌 얼마 못 버틸 것 같은데.”

한마디로 사라질 거란 소리였다.

“아, 그래도 몇 년쯤은 괜찮을지도? 아까 만났던 걔가 나를 인지했으니까.”

그 인지로부터 비롯된 믿음이 수호령의 힘이 될 터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기분은 좋다아.”

“몇 년이나 버틸 수 있겠어?”

“딱히 힘을 쓰지 않고 존재만 하는 거라면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응?”

“여기에서 아이가 위험한 일에 빠진다면?”

공원의 수호령이 희미하게 웃었다.

“구하겠지. 힘을 쓸 수 있다면.”

그래, 그렇다.

그게 공원의 수호령이 태어난 목적이며 존재 의의이니.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 우산 요괴처럼 나도 날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거든.”

“얼마든지. 그 전에.”

“응?”

“잠깐 기다려.”

은후가 방금 수호령에게 받은 연잎으로 찻잔을 만들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소나무에서 솔잎을 땄다.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할까. 술은 몰라도 차는 괜찮겠지.”

“좋아!”

은후가 발걸음을 옮겼다. 짧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차를 우리려면 어딘가 자리 잡을 필요성이 있었다.

‘마나로 허공에 띄워도 상관은 없지만.’

뭔가 멋이 없지 않은가.

‘정자로 갈까.’

일전 폐지 줍는 노인과 술잔을 기울였던 곳. 하지만 공원의 수호령은 거기보다 좋은 장소가 있다며 은후를 이끌었다.

“저기! 저기로 올라가자!”

“어디?”

“저기 건물 꼭대기!”

덕진공원에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었다. 연지교라고 하는. 그리고 그 중간에 3층으로 된 한옥 스타일의 건물이 있었다.

“저 위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공원이 한눈에 들어오거든.”

은후가 픽 웃고는 훌쩍 건물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기와 형식으로 경사가 있기는 했지만 앉아 있는 데는 큰 지장은 없었다. 다만 차를 우리기엔 찻잔이 기울어져 결국 은후는 마나를 움직였다.

“오! 둥둥 떠 있어!”

존재 자체가 놀라움인 수호령이 호들갑 떠는 게 퍽 웃겼다.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흐르고 차가 우러났다.

연잎으로 만든 찻잔에 우러난 솔잎. 그 연잎은 수호령이 건넨 귀한 물건이었고, 솔잎을 우려내는 데 은후가 특별히 마나를 담아 신경 썼다. 수호령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게끔.

‘내가 쓸 게 아니라 수호령에게 줄 거라면 딱히 가공하지 않고 최대한 원형을 살리는 편이 좋을 테니까.’

다른 용도로 연잎을 써도 괜찮겠지만. 굳이 찻잔으로 만든 뒤 신경 쓰고 차를 우려낸 이유는 간단했다. 은후의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었기에.

“도움이 좀 될 거야. 마셔 봐.”

“응!”

공원의 수호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맛있어! 솔잎차라기에 쓸 줄 알았는데! 어? 그리고, 음, 으으으으음.”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수호령의 모습에 은후가 미소 지었다. 이후 은후는 묵묵히 수호령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한동안 안개 낀 건물의 지붕 위에서 느긋하게 풍경과 차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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