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3화 (13/170)

제13화

은후는 이창석의 제안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특별한 술이니만큼 준비가 필요합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창석은 은후에게 있어서 이해관계로 맺어진 이였다. 구두로 전체적인 부분은 협의를 봤으나 아직 디테일한 사항은 협상해야 했다.

‘그러니 굳이 내 패를 먼저 내미는 건 멍청한 짓이지.’

이창석이 섭섭지 않은 보답을 언급했으나, 그걸 고스란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기는 했지만.

“큼. 내가 좀 급했소이다. 그럼 언제쯤……?”

“열흘 뒤면 좋을 것 같군요. 다만 그 전에 계약서는 끝내 두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어르신이란 호칭에 이창석이 잠깐 움찔한 후 은후에게 말했다.

“솔직히, 빙 돌려 말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소이다. 예전엔 즐겼는데, 나이 먹고서는 영.”

“편하게 말씀하시죠.”

“계약서는 먼저 작성해서 초안을 보내 드리리다. 변호사와 검토해 보시면 정말, 매우 후하다고 느끼실게요. 도장을 찍는 건 열흘 뒤에 하면 될 것 같소만. 그런데 그거면 되겠소?”

어차피 자신도 이해득실을 계산하고 투자하는 것인데. 하지만 그게 은후가 딱 바라던 바였다.

‘솔직히 그 이상 바랄 것도 없고.’

아무리 이창석이 무언가를 준다고 해도 은후에게 큰 의미는 없었으니까. 최소한으로 앞으로 차릴 업체에 권력자를 적당히 엮어 놓는 것.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 * *

은후가 이창석과의 약속을 굳이 열흘 뒤로 잡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결국 이창석이 말하는 불면증은 악령으로 비롯되었을 확률이 높았고, 악령이 붙었음에도 겨우 그 정도로 그친 건 수호령의 존재 때문일 테니까.

‘나도 나름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준비하는 자.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무력을 사용함에 있어서 사전 준비가 되어 있고 아니고는 마법사에게 있어서 천지 차이였다.

‘현대의 마나 농도 수준을 보면 강한 악령이 탄생하기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지.’

설혹 강대한 악령이라도 어지간한 수준이라면 이렇다 할 대비 없이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하나 사람 일은 모르는 법.’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했다. 이런 일에 있어서 과함은 모자람보다 나았다.

“후우.”

은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창석과의 만남 이래 일주일. 그 일주일 내내 잠을 줄여 가며 악령과 싸울 준비를 거의 마쳤다.

은후가 준비한 건 각종 스크롤. 그리고 마법 지팡이를 대신할 팔찌였다. 사실 지팡이가 훨씬 익숙하고 만들었을 때 마법 증폭의 정도도 크겠지만, 너무 눈에 띄었다.

‘이제 남은 건 사로잡을 도구만 마무리하면 되겠어.’

현대에서 처음 만나는 악령이었다. 기왕이면 연구 재료로써 사로잡고 싶었다.

‘소멸시켜서 감정 마나를 흡수해도 괜찮겠지만.’

악령에게도 생존 의지는 있었으니. 그러니 진정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야기되는 감정은 매우 짙을 터.

‘그러나 사로잡기만 한다면 악령을 소멸시키는 거야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연구도 하고, 나중에 감정 마나도 얻고.

그게 가장 베스트였다. 물론 여차하면 맞닥뜨린 즉시 소멸시킬 생각도 하고 있었다.

‘지치는군.’

조금 쉴까.

은후가 그렇게 결심한 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리아리하게 내리던 빗소리가 은후를 반겨 주었다.

‘응?’

그때 미묘하게 은후의 감각이 걸리적거렸다.

‘뭐지?’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리어카였다.

리어카가 뿜어내는 마나가 미묘하게 강해졌다. 그 원인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비.’

마법사로서의 직감도 그리 가리키고 있었으나 이론적인 근거 또한 있었다.

‘폐지 줍는 노인으로부터 비롯된 물건이니.’

게다가 또 하나.

리어카로부터 뿜어지는 마나에서 미묘한 이끌림의 길이 느껴졌다.

‘그 장소에 가면 뭔가 또 변화가 있으려나?’

노인과 처음 만났던 곳. 노인은 그곳을 중심으로 멀리 떠날 수 없다고, 또 가장 힘이 나는 곳이라고도 말했었다. 리어카의 마나는 그곳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가 보자.’

집 근처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었기에 은후의 결심과 행동은 빨랐다.

* * *

은후는 가는 도중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뿜어내는 마나의 농도가 달라지고 있어.’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는 걸.

‘그나저나 좋은 곳에 가셨으려나.’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이세계에서도 사후는 미스터리였다.

‘신관들은 현대에서 말하는 천국의 존재를 믿었지만.’

글쎄, 마법사들은 저마다 주장하는 바가 달랐으니. 어떤 학파에서는 영혼이 곧장 윤회의 고리에 들어간다고 했고, 또 어떤 학파에서는 정령과 같은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은 이상 마나로 돌아간다고 했다.

은후의 경우에는 어떠한 이론을 지지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한 상태였다.

‘그래도 후회는 없으셨을 터이니.’

그거면 된 거 아니겠나.

폐지 줍는 노인에 관해 떠올리던 은후는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다.

‘거참.’

이곳에서 가장 리어카의 변화가 심하리라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좀 더 먼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덕진공원.’

이유는 잘 모르겠다.

‘굳이 꼽자면 노인이 나와 술자리를 가졌던 곳.’

하나 그 이유만으로 그럴 수 있을까.

‘일단 가 보자.’

은후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느긋하게 주위 경치와 빗소리를 감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리어카의 변화로부터 비롯된 호기심에 이끌려 외출을 했다. 그러나 직전 은후의 목표는 쉬는 것이었으니.

‘일단 쉬는 것부터.’

이미 리어카는 자신에게 종속되었으니까. 언제라도 호기심을 풀 기회는 있었다. 굳이 오늘이 아니면 어떤가.

은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과거 가졌던 마법사로서의 마음가짐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집착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적당하게. 악령과의 준비와 다르게 이런 건 과하면 아니 되는 법.

‘현대에서 마법사로서의 삶도 마찬가지.’

자유롭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문득 노인과 함께 즐겼던 술자리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가는 도중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샀다.

“혹시 술잔은 없나요?”

“네, 없어요.”

술잔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안타깝게도 편의점에서 술잔은 팔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나오기는 귀찮았다.

‘마법으로 만들까.’

호수에 연꽃이 널려 있었으니까. 연꽃에 적당히 마나를 두르면 그만일 터. 은후가 그렇게 결심한 후 덕진공원의 정자에 도착했을 때.

‘응?’

은후의 시야에 긴 머리의 한 여인이 비쳤다.

‘정령?’

폐지 줍는 노인과 같은, 현대에서 말하는 귀신이라는 존재일까.

‘……아니야.’

미묘하게 달랐다.

무어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귀신은 아닌 것 같았다.

‘귀신은 사람이 죽어서 탄생하는 존재니까.’

정령은 맞는 것 같은데.

은후가 호기심에 주위를 쓱 둘러본 후 물었다.

“여기서 뭐 해요?”

“기……다리고 있어.”

“누구를?”

“……내 주인을. 그런데 오지 않아.”

은후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우산은 안 쓰고 있어요?”

“내가 나를 어떻게 써?”

그러자 요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난 나를 못 써.”

이후 한참 대화를 나누었으나, 제대로 된 대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은후의 곁에 누군가 쑥 하고 다가왔다. 은후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며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그때 은후에게 다가온 존재가 외쳤다.

“자, 잠깐! 난 공격할 마음 없어!”

어린아이였다.

사람이 아닌 정령으로 보이는.

* * *

오해는 곧 풀렸다.

“쒸,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

“은밀하게 다가온 놈 잘못이지.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잖아?”

“으.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넌 누구? 정체를 밝혀 줬으면 좋겠는데.”

은후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은후가 이처럼 날카롭게 반응한 이유는 눈앞의 존재가 사람으로 비롯된 정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습은 사람이지만.’

뭐랄까.

사람이 정령이 되었다면 특유의 기척이 있기 마련이었다. 예컨대 폐지 줍는 노인처럼.

또 하나.

조금 전 대화를 시도했던 여인처럼 존재감이 희미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어느 정도 힘이 있다는 의미였다.

‘제일 결정적인 건 가치관이 상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

아닐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랬다. 그래서 서로 오해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했다.

예컨대 사람이 아닌 정령의 호의는 때때로 인간에게 악몽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난 이 공원의 수호자야. 너에게 일단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왔어.”

“감사? 내가 딱히 널 도운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계속 잠들어 있었을 거거든. 그리고 그대로 사라졌겠지.”

“우연에 불과해.”

은후는 대충 원인을 짐작했다. 노인과 술자리를 가지며 썼던 마법. 그 마법의 여파에서 비롯된 마나의 파동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었다.

“응. 하지만 그래도 내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인걸?”

“그래서 단순히 인사를 하려고 왔다?”

“그, 인사 외에도 좀 부탁을, 헤헤.”

어린아이가 멋쩍게 웃었다. 은후는 그제야 긴장감을 살짝 놓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정령, 혹은 악령이 아니라면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까. 그들의 습성이 그랬다. 이는 폐지 줍는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한 바였다.

“그런가.”

“응. 그래서 말인데 내 부탁을 좀 들어줄 수 있을까?”

“일단 들어 보고.”

“당연히 들어 봐야지. 그런데 쟤는 좀 급하거든?”

어린아이가 여전히 비를 맞으며 우산을 들고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쟨 아마 비가 그치면 사라질 거야. 우산 요괴가 그래. 혹시 우산 요괴는 알까?”

은후가 고개를 저었다.

“쓰지 않게 된, 혹은 버려진 우산이 이따금 어떠한 이유로 요괴가 되는 경우가 있어. 그렇게 태어난 존재를 우산 요괴라고 해.”

“저런 존재를 요괴라고 하는가 봐?”

일단 눈앞의 어린아이 정령이 위험하지 않은 존재라고 파악한 은후가 호기심에 질문을 던졌다.

“응. 나는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우산 요괴의 가장 큰 커다란 특징은 하루살이라고 했다.

“태어나면 하루 만에 사라지거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산 요괴들이 그래.”

“저 요괴는 짐작이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건 내가 힘을 좀 써서 말이야. 예전에 나도 한때 잘나갔던 때가 있어서.”

그때 잠들게 해서 사라지지 않게끔 했다고.

“내 능력 중 하나. 어지간한 요괴라면 잠들게 할 수 있다 이 말씀!”

엣헴 하면서 으스대는 표정이 꼭 진짜 어린아이 같았다.

“이유는? 그냥 그러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 요괴의 소망은 주인이 되는 아이와 재회였거든. 들어주고 싶었어. 나는 아이의 수호자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 공원에 있는 어린아이의 수호자라고.

“내가 태어난 이유와 목적은 오로지 그것뿐이야. 딱히 저 우산 요괴를 도운 건 그 목적에 합치되는 건 아니지만. 변덕이었달까, 비슷한 연장선상이라고 하면 너무 억지일까나.”

그런가.

눈앞의 어린아이는 좋은 정령이었다. 마법사의 관점으로 굳이 정의하자면 어린아이를 위한 공원의 수호령이었다.

“하여간! 내가 당장 힘이 없어서 그러는데, 쟤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아, 그냥 도와 달라는 건 아니야. 내 부탁을 들어주면 선물 줄게.”

“네가 도울 순 없고?”

“으응, 내 힘은 이 공원에 한정되니까, 벗어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쟤 주인이 다시 오는 걸 기다리다가 잠에서 깨어나게 해 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쟤 주인은 오지 않고, 내 힘은 점점 약해지고. 그러다 나도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아서 잠들었어.”

은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면 너도 위험하지 않아?”

“응. 그런데 쟤는 더 위험하니까. 아무리 고유한 특성이라고는 하지만 사라지기 전에 소망을 이뤘으면 좋겠어. 쓸쓸하잖아. 그렇게 그냥 사라지는 건.”

눈앞의 수호령이 말하는 요괴도 마법사의 눈으로 보자면 정령의 일종. 이세계에서도 이따금 있었다. 물건에서 태어나는 정령이.

‘성검 클라우스가 그 대표적이었지.’

에고 소드.

물론 그 외에도 같은 계통의 다양한 정령이 존재했다. 힘이나 목적, 특성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러나 하루살이란 특성은 처음 들어 봤다.

‘힘 좀 써 볼까.’

공원 수호령의 부탁도 있고, 선물도 준다고 했고. 또 그 과정에서 잠시나마 우산 요괴를 살펴볼 수도 있으니까.

‘사라지는 과정에서 감정 마나 또한…… 다 핑계인가.’

이것저것 다 필요 없이 그냥 그러고 싶었다. 오로지 인간과 재회를 바라는 하루살이 정령이라니. 은후의 측은지심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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