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이은영이 아들 은후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들이 준비했어?”
“네.”
은후는 어머니에게 굳이 멋없게 괜찮냐는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짓고 있는 표정이 그 답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얘, 일단 불 꺼야지.”
김명희가 준비된 케이크를 가져왔다. 은후의 어머니는 눈물을 꾹 참으며 호, 하고 케이크의 촛불을 껐다.
“축하해!”
“어우, 부럽다야!”
다시 한번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각자 준비한 선물을 은후의 어머니에게 주었다.
“선물까지…… 진짜 고마워.”
“고맙기는.”
저마다 각자 사정에 맞추어 적당히 준비한 선물. 개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김명희가 준비한 것이었다.
“나도 여기 선물. 한번 열어 봐.”
제일 크기가 커다랬다.
‘대체 뭘까.’
하지만 이내 호기심은 놀라움으로 변했다. 그건 주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백?’
가방이었다.
그것도 엄청 고가의.
“저, 명희야?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척 봐도 몇십도 아니고 몇백이나 하는 걸 선물로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명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네 아들 덕을 너무 봐서 말이야.”
아들과 관계 개선부터 남편이 회사 영업에 도움받은 일까지. 고마운 일이 많아서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받아도 돼. 마음 같아선 더 비싼 걸 주고 싶은 정도라니까? 남편도 동의했고.”
아들인 은후가 친구인 명희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는 처음 들었다.
이은영은 은후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진짜로?’
은후는 맞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그래도 이은영이 김명희의 선물을 받기까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나저나 진짜 그렇게 효과를 봤어?”
“그럼. 거짓말이면 내가 오늘 이렇게까지 했겠니.”
한동안 은후가 김명희를 어떻게 도와주었냐에 관해서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그 와중에 이은영에게 아들 칭찬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우리 은영이는 좋겠어. 이렇게 아들이 생일까지 챙겨 주고 말이야. 우리 딸은 내 생일 때 용돈이나 달라고 하던데.”
“딸 생일이 아니라 네 생일에? 왜?”
“내 말이. 이유가 황당해서는 원.”
“뭐라고 했는데?”
“그게…….”
수다를 떨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잠시. 카페를 대관한 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벌써?’
그래서 이은영은 깜짝 놀랐다. 행복한 시간은 원래 그렇다더니.
‘이게 전부.’
아들인 은후가 만들어 준 시간. 그래서 그런지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진짜 다 컸네, 컸어.’
참 기특하고 또 아쉽기도 한 미묘한 감정.
이은영이 아쉬움을 느낀 건 자신의 도움이 이제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고마움이었다.
* * *
그날 은후는 김명희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아들과 요새 정말 좋아졌어요. 얘가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다니까요. 이게 전부 선생님 덕분이에요. 게다가 남편도 많이 도움받았어요.”
명분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요새 선생님 술을 찾으시는 분이 너무 많으셔서요.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리고 앞으로 은후의 술 판매에 관해서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꼭 좀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다는 분이 계시거든요.”
그 말을 하면서 김명희가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적으로 도움을 크게 받았던 분이라서요. 갑자기 이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혹여 불편하시다면 어떻게든 거절할게요.”
은후는 부드럽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김명희에게 술 홍보를 부탁하면서 이미 고려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이라면 이렇게 주선을 하지도 않으셨겠죠.”
“어유! 그럼요!”
김명희가 소개해 주고자 하는 사람은 전주의 유지로서 굉장한 부자라고 했다. 다만 단순한 부자가 아닌 무척이나 선한 사람이라고.
“……기부도 엄청 열심히 하시고 인간관계도 진짜 넓으세요.”
착한 사람이라.
그것도 부자가.
‘믿기 힘들기는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부를 쌓아 올리는 일이란 대개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글쎄.’
참 드문 일일 텐데.
과연 김명희가 말하는 전주의 유지 이창석은 그런 인물일까.
* * *
식사 장소는 전주 외곽에 있는 한 펜션이었다. 하지만 가는 데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김명희가 말한 이창석이 차량을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창석의 개인 운전사인 김찬회는 은후의 태도에 다소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 차분해.’
올해 대학교 졸업 예정인 20대의 평범한 청년이라고 했다. 대개 그 나이 또래라면 이런 대접을 부담스러워하기 마련.
‘재벌 3세라면 또 모를까.’
그런데 은후의 태도는 이런 일에 너무 익숙해 보였다. 처음 문을 열어 줄 때는 긴가민가했지만 펜션에 도착하면서는 확실했다.
‘내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렸어.’
보통 이런 경험이 없다면 본인이 알아서 열고 내렸을 터였다. 이는 이세계에서 은후가 마차를 타고 다녔을 때의 경험에서 기인했다.
마법사가 된 이래 누군가가 문을 열어 주는 일이 지극히 당연했으니까. 물론 의식해서 일부러 기다린 것도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 하나에서부터 사람의 인상이 결정되는 법.’
한마디로 얕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너무 신경 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하물며 은후가 앞으로 팔고자 하는 건 그 무엇보다 특별한 술이었으니. 자칫 잘못하면 승냥이 떼가 달려들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은후는 겉으로 보이기에 평범한 대학교 4학년이었으니. 이런 사소한 것 하나부터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평범한 대학생처럼 생활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혼자라면 모를까, 가족이 있었으니까. 특히 어머니. 어머니를 호강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정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충분히. 그러려면 어느 정도 특별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오셨군요. 이쪽이 제 남편 되는 사람이에요.”
“김석하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석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은후 또한 고개를 숙인 후 간단한 신변잡기의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요새 아들이 게임을 만든다고 하더군요. 관계가 개선되지 않았다면 입을 꾹 다물었을 겁니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참 다행입니다.”
은후가 싱긋 웃었다. 자신의 도움으로 이들 부부와 아들의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점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발생한 감정을 마나로 얻는 것은 덤이었다.
‘확실히 질이 달라.’
이전에도 짐작은 했지만 깨달음을 얻은 덕분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술자 본인이 원인이 되어 비롯되는 감정 마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감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마나와 차이가 크다는 걸.
‘설령 악독하게 마음먹고 나와 관계없는 사람으로부터 감정 마나를 얻어도.’
질적인 면은 차이가 날 것임이 분명했다. 은후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김석하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던 도중.
“뭐 하고 있나?”
한 노인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어르신.”
“진즉 도착했으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말이야.”
김석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없네만. 그래, 거기 그 친구가?”
“아, 네. 일전에 말씀드렸던 이은후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라.”
“네.”
노인이 픽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저 청년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단 말이지.’
만나기 전에도 그랬으나 좀 더 호기심이 짙어졌다.
“처음 뵙겠소. 이창석이올시다.”
“이은후라고 합니다.”
은후는 노인이 뻗는 손을 담담히 잡고 악수했다.
‘응?’
그러면서 알 수 있었다.
‘악령의 흔적이 느껴지는데.’
으스스한 악취. 더불어 주위에 아른거리는 고양이 형상.
‘수호령?’
어떠한 한 존재에 종속되는 정령이 있었으니, 그 정령은 종속자를 보호하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정령을 수호령이라 말했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갑시다. 내 나이를 먹어서 때가 되면 배를 참기 힘들더이다.”
“그러시죠. 그런데 고양이를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발걸음을 옮기며 은후가 슬쩍 떠보았다.
“으잉? 그건 어떻게 아셨소?”
“옷에 고양이 털이 있더군요.”
은후가 노인의 바지 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검은 털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 정도의 짧은 털이었다. 하물며 바지 색이 검은색이었기에 더더욱.
노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뭐어. 나이를 먹으니 동물이 좋더이다. 그나저나 눈썰미가 참 좋으시구려.”
“네, 좀 좋은 편입니다.”
은후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 * *
이후 식사는 조용히 진행되었다. 맛은 참 좋았다. 이창석이 따로 유명한 셰프를 모셔 왔기 때문이다.
“맛이 참 좋네요.”
“내 신경 좀 썼지요.”
식사 도중, 그리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오고 간 대화는 참으로 평범했다. 이창석은 이런 자리에 매우 익숙해 보이는 은후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범할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생각 이상이었다. 보여 주는 태도 외에도 사람 자체로부터 뿜어지는 아우라가 그랬다. 그건 은후가 일부러 살짝 마나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내 사과할 게 있습니다.”
“사과요?”
“음, 선생의 의사를 묻지 않고 모셨으니 사과해야지 않겠소.”
“오늘 좋은 음식을 대접해 주신 거로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서로 빚은 없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이런 화법은 회사 생활을 적지 않게 한 사람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인데.
‘나이가 내 손자와 비슷하다고 했던가.’
거참.
“선생이 그거로 되었다면 나야 고맙소.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자리를 만든 건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소.”
어느 순간부터 이따금 지독하게 잠을 못 자는 날이 있었다. 그래서 혹여 건강의 문제일까 싶어서 아낌없이 돈을 쓰며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치료할 수 없었다.
“잠을 못 자는 날에는 수면제가 필수였지. 하지만 그것도 강한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안 됐소.”
문제는 며칠 동안 수면제의 후유증 때문에 정신이 멍했던 것. 그게 이창석은 너무도 싫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생의 술을 석하에게 받았소. 솔직히 처음엔 별생각 없었소이다. 잠에, 몸에 좋다는 술도 참 많이 마셔 봤으니까.”
그러다가 김석하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선물을 준 이라는 걸 떠올렸다. 대개 이런 선물은 이익과 연관이 있기 마련인데.
“내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지.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 만남은커녕 내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을 테니까 말일세.”
이창석의 말에 김석하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이창석은 가만히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잠이 안 오는 날 속는 셈 치고 선생의 술을 마셔 봤소. 그런데 이거 웬걸?”
효과를 봤다.
그것도 무척.
몇십 년 만에 그 어느 때보다 푹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좀 더 술을 구하고 싶었소이다. 또 선생을 어떻게든 만나 봐야겠다 싶었지. 그래서 이 친구를 좀 채근했소.”
“그러셨군요.”
“큼.”
이창석이 헛기침을 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핑계를 대고 선생을 만날까 고민하다가, 마침 사업 준비를 한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표할 겸 겸사겸사 이 자리를 한번 만들었지.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전주에서 자리 잡으려거든 내 도움이 꽤 쏠쏠할게요.”
사실 이런 도움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런 권력자를 등에 업는다면 혹시 모를 위협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을 터였다.
“한마디로 내 투자 좀 하고 싶소이다. 선생만 원한다면 모든 자금을 대리다.”
은후의 술로부터 비롯된 개인적 문제를 떠나 충분한 미래 가치를 봤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그 술이라면 무조건 성공한다.
이창석은 그러한 확신이 있었다. 사실 이건 한 번이라도 은후의 술을 마셔 본 사람이라면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금은 괜찮습니다. 자본이 없지는 않거든요.”
“혹 다른 투자자라도 이미 구하신 게요?”
“그건 아니고 근래에 돈을 좀 벌었습니다. 양조장을 크게 차릴 것도 아니어서요. 게다가 아시지 않습니까? 대량으로 생산하지 않아도 큰돈이 될 터인데요.”
“음, 하기야 굳이 프리미엄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지.”
이창석은 은후의 말에서 느껴지는 자신감 외에도 사업적 안목을 읽었다. 이런 술은 희소할수록 더 비싸질 테니까.
“그래도 일정 부분은 투자를 받겠습니다. 그리고 행정적인 부분에서 도움을 좀 받고 싶군요.”
굳이 도움이 없어도 딱히 문제가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받을 수 있는 도움이라면야.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변호사와 함께 말씀 나누시죠.”
은후의 말에 이창석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밝은 표정을 짓는 이창석에게 은후가 말했다.
“사업 이야기와 별개로 어르신의 문제를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지 싶습니다만.”
“문제?”
“이따금 잠을 못 주무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요.”
“좀 더 특별한 술이 있습니다.”
“특별한 술이라. 거기에서 좀 더 특별하단 말이지요.”
“네, 관심이 있으실까요?”
당연히.
노인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은후의 내심 또한 그랬다.
악령의 자취와 수호령.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은후도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했다.
“김명희 씨에게 들었는데 자택이 그렇게 멋지다고요.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초대해 주시죠. 그러면 그 술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허허, 그래요. 내 집이 좀 괜찮습니다. 만약 선생의 술이 정말로 특별하다면 내 섭섭지 않게 보답하리다. 내친김에 내일은 어떻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