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건지산을 오르는 길. 은후는 느꼈다. 확실히 다른 곳보다 마나의 농도가 짙다고.
‘예상은 했지만 꽤 차이가 커.’
자연이 숨 쉬는 곳.
비록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인위적인 것들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도심 속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가끔 산에 올라야겠는걸.’
그나저나 도심 속의 산이 이 정도라면 바다는 어떨까.
‘방학 끝나기 전에 한번 찾아가 볼까.’
단순히 바다를 보는 것이라면 고향인 익산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좋구나, 좋아.’
은후가 속으로 절로 중얼거렸다. 그 이유는 마나가 은후의 후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마나의 농도에 따라 강도는 다르지만, 일정 농도 이상이면 마법사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대개 마나가 진할수록 대부분의 마법사는 상쾌함을 느꼈다.
‘아마 얼마 전의 나라면 그냥 그저 그랬겠지.’
이세계에 비하여 현저하게 마나의 농도가 옅은 것도 그랬으나, 지구 현대 마나의 특성이 이세계와 달랐기 때문이다.
은후는 원래 이세계의 마나에 익숙해져 있었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그런데 최근 보디 체인지를 겪으며 현대 지구 마나에 적합한 신체가 되었다. 그래서 은후는 산이 간직하고 있는 마나로부터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를 한번 찾아가 볼까, 하고 고민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물론 단순히 감각의 즐거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좀 더 마나 농도가 짙은 곳을 찾으면.’
현대 지구의 마나가 가진 특성을 좀 더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로 시간을 내어 연구해야겠지만.’
그 또한 마법사로서의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은후는 마나로부터 비롯되는 상쾌함을 한껏 느끼며 느긋하게 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 찾고 있던 바위 앞에 도착했다.
‘이 바위군.’
건지산의 중턱에는 장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바위가 있다. 노인이 은후에게 약속한 대가는 바로 그 바위 근처에 묻혀 있었다.
‘어디 보자.’
노인이 말했다.
- 바위 옆에 조그마한 오솔길이 있네. 바위를 등지고 그 오솔길의 중간에서 왼쪽으로 들어간 다음에 100발자국 정도 이동한 다음 땅을 파 보게.
그럼 그곳에 자신이 숨겨 두었던 재물이 나올 거라고.
‘아주 깊이 파야 하니 힘깨나 써야 할 거라고 했던가.’
조금은 고생해 보라며 장난스럽게 웃던 노인의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은후는 그런 노인의 심술에 딱히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오라.’
은후의 의지에 따라 주위 마나가 요동쳤다. 그리고 땅 아래를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위치를 특정하기 위함이었다.
‘여기군.’
노인이 말했던 걸 발견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금속 상자인가.’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은후는 탐색에 사용하던 마나를 변형시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봤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눈을 비볐을 것이다. 그리고 귀신이 나타났다며 소리라도 질렀을 터. 하지만 지금은 새벽 3시라는 야심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은후는 따로 은폐 마법까지 펼쳤다.
‘보석이랑 채권?’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등의 다양한 종류의 보석, 그리고 영화에서나 보던 무기명 채권이었다.
‘잘됐다.’
은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기명 채권은 둘째치고, 상자 속에 들어 있던 보석들이 은후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이유는 산속 깊은 곳에 묻히면서 마나를 꽤 머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나를 머금은 보석은 마법사에게 있어서 훌륭한 아이템 재료였다.
‘어머니께 드릴 아티팩트는 이 보석 중 하나로 제작하면 되겠어. 상자의 경우는 고민 좀 해 봐야겠고.’
비록 녹이 슬었지만 금속 상자의 경우 보석들보다 월등히 많은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그건 아마 직접적으로 흙과 맞닿아 마나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나저나 좀 이상한데.’
금속 상자에 슬은 녹.
금속이 산화 등의 과정에서 부식되면서 나타나는 부산물. 이런 부분은 이세계의 금속 또한 동일했다. 하지만 그런 녹은 딱히 마법사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은후의 감각에 그 녹슨 것들이 걸리적거렸다.
‘이세계에서는.’
은후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현대와 이세계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나중에 시간 될 때 연구해 보면 알겠지.’
은후는 금속 상자를 비롯하여 보석, 무기명 채권을 따로 나누어 리어카에 보관했다. 그리고 다시 마나를 움직여 땅을 원래대로 복구하고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산에서 돌아온 후 은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어머니에게 선물할 보석을 아티팩트로 만드는 일이었다.
‘마침 딱 생신이기도 하니까.’
고른 보석은 탄자나이트였다. 은후로서는 처음 보는 보석이었는데 알아본바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만 산출되는 보석이라고. 그 이름을 따 보석에 붙였다고 했다.
은후가 탄자나이트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보석 중 가장 많은 마나를 머금고 있었으니까.
‘다이아몬드도 괜찮았을 것 같기는 한데.’
마나를 얼마나 머금고 있느냐도 아티팩트 제작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마법 적합도.
보석에 따라 잘 맞는 마법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마법이 있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다이아몬드는 가리는 게 없었다.
다만 어머니께 할 마땅한 변명이 없었을 뿐. 그래서 탄자나이트로 결정했다. 탄자나이트의 경우 거래되는 액수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거기에 또 하나.
‘그나저나 참 신기해.’
이세계에서 은후가 꽤 많이 다루었던 보석의 특징과 탄자나이트는 굉장히 유사했다. 색깔이나 빛깔은 전혀 다르지만 마법사의 관점에서는. 그래서 은후는 꽤 이른 시간 내에 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걸로 끝.’
보석에 걸린 마법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물리적인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둘은 체질 개선.
‘트럭에 치여도 두어 번 정도는 충분히 괜찮으실 터.’
외양에 신경 쓰지 않았다면 몇 가지 더 마법을 걸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머니는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최대한 심플하게.
그러면서도 고급지게.
한때 이세계에서 귀족들을 위해 아티팩트를 제작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귀족들은 성능도 성능이지만 심미적인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쯧.”
안 좋은 기억이 떠올린 은후가 가볍게 혀를 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개 같은 크루트.’
은후가 복수의 길을 걷게 된 크루트 공작가와 엮인 결정적인 이유. 그건 은후의 뛰어난 아티팩트 제작 실력 때문이었니.
‘레아.’
은후가 속으로 죽은 아내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 * *
며칠 후.
은후는 어머니의 생신 날짜에 맞추어 준비한 선물을 잘 포장한 뒤 가게 근처 카페를 찾았다.
‘기뻐하시려나.’
어느 순간부터 은후를 포함한 가족들은 서로 생일을 챙기지 않게 되었다. 뚜렷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바빠서.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아버지의 죽음.’
은후가 아버지를 여읜 건 중학교 3학년 때. 사인은 급성 신부전. 이후 가게가 급격하게 기울며 어머니가 고군분투했다. 당시 빚을 지고 친구인 김명희에게 손을 뻗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고. 이후 서로가 자연스레 생일을 챙기지 않게 되었다.
‘좋아하셨으면 좋겠는데.’
오늘을 위해 따로 김명희에게 연락해 조그마한 파티 준비까지 모두 마쳤다. 근처 카페까지 통째로 빌려서.
‘대관 비용이 생각보다 비싸지 않아서 다행이야.’
두 시간에 15만 원.
거기에는 음료 및 다과, 그리고 파티에 필요한 장식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크고 화려하게 치러 드리고 싶기도 한데.’
돈이 문제였다.
이세계에서도 그랬지만 현대에서도 그랬다. 그놈의 돈.
‘벌어야지.’
다행히 은후는 마법사였고, 마음만 먹는다면 돈을 벌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시간 내어 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은후는 카페에 들어선 후 어머니를 위해 모인 가게 손님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전부 개인 시간을 쪼개어 일부러 와 주신 분들이었다. 아무리 어머니와 사적으로 친하다고 한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선생님, 오셨네요?”
“준비하느라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에이, 고생은 무슨요. 가게에서 알아서 다 해 줘서 우리는 수다만 떨었는데요. 그치?”
“그러니까. 가격 들어 보니 생각보다 비싼 것 같지도 않더라.”
“그치? 이런 인테리어까지 따로 해 주는 거 감안하면, 뭐. 나도 우리 남편 생일 때 여기서 한번 해 볼까 싶다니까?”
그런 은후를 다들 반갑게 맞아 주며 수다를 떨었다. 다만 은후는 옆에서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모두가 은후에게 존댓말을 썼기 때문이다.
‘몇몇 분들은 예전에 말을 놓으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들 자연스레 존댓말을 고수하게 되었다. 은후가 풍기는 자연스러운 아우라가 그렇게 만들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아는 사람의 아들이라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게다가 요 일대에서 제법 알아주고 잘나가는 김명희가 은후를 극히 예의 바르게 대했기에 더더욱.
‘응?’
그런데 그런 이유와 별개로 유독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걸 은후는 느꼈다. 딱히 마법사로서 얻게 된 날카로운 감각이 아니더라도, 보통 평범한 사람도 약간의 눈치만 있다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은후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나마 이 중에 다소 친한 권해순에게 물었다.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 그게요.”
권해수가 잠시 머뭇거리자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채근했다.
“오늘따라 얼굴이 너무 잘생긴 것 같아서 그래요.”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은후가 잠시 당황했다.
‘아.’
그리고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보디 체인지.’
얼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은후의 얼굴은 원래 본판이 괜찮은 편이었다. 연예인급으로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반인 중에선 꽤 눈에 띄는 정도. 그런데 보디 체인지를 겪으며 급이 달라진 것이다.
“혹시 성형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다들 궁금해서요.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뒷담도 아닌데 괜찮습니다.”
은후가 급히 대답했다. 나이를 떠나 딱히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칭찬에 가까웠으니까.
“그럼 혹시 물어봐도 되나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정말로 성형하신……?”
“그건 아니에요.”
은후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은후의 어머니를 김명희가 카페에 데려왔다.
* * *
오늘따라 오후가 너무 한가했다.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점심 예약이 모조리 빠졌다. 오전에 바빴던 것과 천지 차이였다. 하지만 은후의 어머니 이은영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매일이라면 모를까 어쩌다가 있는 날이니까. 그래서 느긋하게 쉬고 있을 때 김명희가 찾아왔다.
“응? 무슨 일이야?”
명희라면 관리를 어제 받았는데.
“요 근처 지나가다가 잠깐 들렀지.”
“마침 잘 왔다, 야.”
그렇게 잠시 수다를 떨길 잠시. 김명희가 이은영에게 말했다.
“요 앞에 잠깐 카페나 갔다 올까?”
“응? 언제 손님이 올지 모르는데 그건 좀.”
“에이, 긴 시간 비우자는 것도 아니고 잠깐 바람 좀 쐬러, 응? 데스크에 직원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카페 가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이은영은 그 말에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하기야 이 근처인데.’
가게 근처에 카페는 딱 하나였고 거리는 정말 가까웠다.
“카페 블레스 말하는 거 맞지?”
“그럼 거기 말고 이 근처에 카페가 또 있어?”
혹시 몰라 한번 물은 뒤 이은영은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카페에 들어서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갑자기 귓가를 때리는 폭죽 소리.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생일 축하 노래. 뭔가 멍했다.
“……우리 은영이, 생일 축하해!”
제일 뒤에서 희미하게 웃으며 손뼉 치고 있는 아들 은후의 모습에 이은영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뭔가 울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