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김명희와 만남 이후 은후는 한가하다면 한가한, 바쁘다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바빴던 이유는 술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소량으로.
‘원래라면 대용량으로 만들어 나눌까 했는데.’
문득 돌이켜 보니 이렇게 작은 단위로 술을 만든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시도해 보았더니 과연 얻는 게 있었다.
바로 마나 컨트롤 실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은후는 이세계와 현대 지구의 마나 성질이 미묘하게 차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훨씬 쫀쫀하다고 해야 하나?’
너무 미세했기에 집중하고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방식을 좀 바꿔야겠어.’
사소하다면 아주 사소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이 꽤 컸다. 비록 경지가 높아지지는 않았으나 같은 마나량으로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당장은 아니지만 하다 보면 언젠가.’
이렇게 알게 된 것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을 터. 그 시기는 그리 멀지 않으리라.
아무리 은후가 마법을 수단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결국 마법사였다. 그리고 마법사라면 응당 호기심과 탐구욕, 경지 상승에 대한 욕구가 존재했다.
은후의 경우엔 그러한 욕구를 거의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역으로 마법 실력이 올라가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이세계의 마법사가 알았다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은후의 경지는 이세계에서 역사적으로 손에 꼽혔다. 그러니 제국의 공작가를 멸문시키고 잠시나마 거대한 국력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버리니 얻는구나.’
집착하지 말 것.
마법사라면, 아니,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통용되는 진리. 당장 얼마 전 김명희와 상담해 주면서 은후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집착은 결핍으로 이어지니.’
애초에 집착하지 않으면 결핍이 일어날 것도 없었다.
‘일찍이 에피쿠로스(Epikuros)가 말했다.’
욕심은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고.
기원전 그리스 철학자가 남긴 명언. 김명희와 상담해 주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문구. 왠지 모르게 기억에 남았더라. 은후는 그 문구를 마법사로서 깨달았다.
‘그런가.’
살아남기 위해서, 부를 쌓기 위해서, 복수를 위해서.
아니라고 말했으나 무의식중으로 은후는 마법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로 돌아오며 진심으로 그 집착을 내려놓았다.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마법을 행했을 뿐.
‘…….’
현대에 남아 있는 고대 철학자의 명언이 은후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다.
* * *
한때 막연하게 꿈꾸던 대마법사로서의 경지가 코앞에 다가왔다. 이세계에서 각 학파마다 그 정의가 달랐으나, 역사적으로 이르길 ‘대마법사라 함은 능히 한 국가를 상대할 만하다’ 고 했다. 고작 일개 개인에게 내려진 평가. 과분하다고, 잘 모르면 믿을 수 없다고 여기겠으나, 실제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왔다. 당연히 그만큼 손에 꼽았다.
‘이세계의 고집스러운 늙은이들이 알면 정말 까무러치겠어.’
흑마법사가 대마법사라니.
흑마법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최초의 흑마법사 이래, 대마법의 경지에 이른 흑마법사는 역사상 등장한 적이 없었다.
‘국가를 상대로, 라.’
한 발자국 남았다.
다만 마나의 절대량이 부족했기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조차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가능할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마나를 끌어모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행한다면, 근시일에라도 지금보다 몇십 배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지.’
굳이 원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은후는 방금 얻은 깨달음에 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쯧.”
다만 경지가 상승하며 자연스레 따라온 이적이 있었다. 좀 더 마법을 자연스레 쓸 수 있도록 몸이 바뀐 것이다.
‘보디 체인지라니.’
무협 용어로 말하자면 환골탈태였다. 그리고 여느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몸 안의 독소가 자연스레 빠져나왔다. 당연히 악취가 장난 아니었다.
‘얻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도 불쾌함을 느끼는 건 은후가 진정 마법에 관한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리라.
‘육체도 꽤 바뀌었어.’
육체가 현대 지구의 마나를 다루는 데 적합하게. 덤으로 피부가 좋아지고 골격 또한 마법사로서 이상적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일반 마나까지도 얻었다.
‘이제 웬만한 원소 마법도 이제는 충분히 가능하겠어.’
은후가 마음을 먹자 허공에 물이 생겨났다. 그리고 은후의 의지에 따라 지저분한 흔적과 악취를 씻어 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분명히 오늘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일기예보가 빗나갔나.
‘이런 부분은 차라리 이세계가 낫군.’
이세계에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마법사라면 능히 날씨를 예측할 수 있었다. 비록 국소적인 지역에 불과했지만.
‘아.’
그러고 보니, 이 정도 마나를 찾았으면.
‘내가 날씨를 예측해도 되는군.’
깨달음의 후유증 때문일까. 아직 멍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은후는 최대한 정신을 일깨우고자 명상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은후가 비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폐지 줍는 노인 귀신을 다시 한번 만나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노인의 자식인 김수혁에게 확실히 정보를 전달했으니까, 그 일을 말해 줄 겸, 또 노인으로부터 감정 마나를 얻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경지가 상승했어도 은후의 본질은 흑마법사였으니, 감정 마나란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 법이었다.
하지만 은후가 며칠 전 노인을 찾았을 때 예기치 못한 문제를 맞닥뜨렸다. 볼 수는 있었으나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것.
‘그 원인은 아마도 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마법사로서 내린 판단이었고.
“오랜만에 보는구만.”
“오랜만이라기엔 얼마 전에도 보지 않았나요?”
노인을 다시 만났을 때 그 판단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에잉, 단순히 보기만 한다면 그게 무에 의미가 있나. 제대로 봤다 함은 대화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은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손에 들고 있는 봉투를 흔들었다.
“오늘도 술 한잔하시렵니까?”
“오늘은 할 일이 있네만.”
“안주도 사 올 건데요.”
“안주?”
“네. 돼지국밥을 그렇게 좋아하셨다면서요?”
처음 노인과 만났을 때라면 가진 마나량이 모자랐기에 음식까지는 대접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모재인 감정 마나까지 써 가면서 그러긴 싫었다. 하지만 이번에 얻은 깨달음 덕분에 음식까지도 귀신이 먹을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감정 마나를 쓰지 않아도 말이다.
“허. 음식도 가능한가?”
“조그마한 잔재주죠.”
“거참, 그게 잔재주면 웬만한 무당은 전부 재주가 없는 사람이겠어.”
“그래서 어떠신가요?”
노인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있다고 말한 건 사실이었으나 은후의 제안을 뿌리치기 참 힘들었다.
“금방 사 올 테니까 그때 정자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거짓말 아니지?”
“그때처럼 사람 좀 믿으세요.”
“아니, 에잉, 알겠네. 거참, 타박은.”
노인이 투덜거리며 리어카를 이끌고 덕진공원으로 향했다. 은후는 피식 웃은 후 근처에 유명하다는 가게에서 돼지국밥 두 그릇을 테이크아웃했다. 그리고 곧장 노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막걸리도 좋아한다고 하셔서 종류별로 몇 병 사 왔습니다.”
“거참, 세심해. 결혼하면 사랑받겠어.”
은후가 담담히 웃으며 마나를 움직여 인식 저해 마법을 정자에 둘렀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간신히 자신에게 한정해서 썼었는데.
‘확실히 몸이 변하면서 쉬워졌어.’
마법을 쓰기가 훨씬 더 쉽다.
“좋네.”
“그렇죠?”
한동안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은후가 오늘의 본론을 말했다.
“김수혁 씨에게 확실히 위치를 알려 드렸습니다. 결과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런가?”
“네.”
“내가 자네에게 준 건?”
“슬슬 찾아봐야죠.”
“허. 자네 20대 맞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현대 지구 기준으로 하면, 맞습니다.”
“어디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것처럼 말하는구만?”
은후가 픽 웃으며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며 말했다.
“정답입니다.”
“으잉?”
농담으로 던진 말에 예기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진짜인가?”
“믿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은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허. 진짜구만. 그래, 그래서 그랬어. 자네가 이 바닥의 지식을 모르는 이유가. 그 알 수 없는 힘도 그렇고.”
하지만 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하나? 엄청난 비밀일 텐데.”
“내일이면 사라지실 테니까요. 그때까지 말동무나 해 드리려고 했죠.”
또 하나.
노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마법사라는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노인이 느끼는 놀라움이라는 감정. 그 감점을 은후는 노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끌어모으고 있었다.
“허허, 내가 거절했으면?”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국밥에 넘어오신 거 보면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거야, 끙. 그거야 그렇네만.”
“제 비밀을 들으셨으니 어디 못 가십니다?”
“거참, 조직 폭력배가 따로 없어? 국밥 아니었으면 내 진짜 화냈을 거야.”
술도 술이지만 뜨거운 국물. 귀신이 된 이래 맛을 볼 수 있을 거로 생각지도 못한 시원한 맛에 노인이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런 노인에게 은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정 가신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 표정 푸시지요.”
“응?”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령. 아니, 귀신의 입을 막는 마법 정도야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그런가.”
“네. 그러니 못다 한 일이 있다면 편히 말씀하고 가시지요.”
노인이 흐릿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모습이나 볼까 했네. 그래서 비 오는 날까지 어떻게든 버텼지.”
귀신이 되면서까지 바랐던 복수. 그리고 자신 때문에 큰 빚을 진 자식에 대한 미련. 그 두 가지가 노인이 성불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 이유가 모두 해소되었다. 유산의 장소를 은후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함으로써. 물론 노인은 아들이 그 전언을 듣고 직접 유산을 찾는 것까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이제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아내에게는 내 힘이 좀 남아 있었을 때 꿈으로 몇 번 찾아갔었어. 로또 번호도 몇 번 말해 줬는데 사질 않아서는.”
노인이 투덜댔다.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 아내를 굳이 또 보고 싶지는 않았네. 미련이 더 짙어져서 떠날 수 없을까 봐. 아내가 세상을 뜰 때까지 버틸까도 싶었는데.”
그러면 아내가 너무 슬퍼할 것 같아서. 원한이 깊어 귀신이 된 남편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노인은 은후를 따라온 것이다.
“귀신 신세는 이제 벗어나고 싶거든.”
하지만 또 여전히 보고 싶기도 했다. 마음이란 이처럼 모순적이었다.
“내게 남은 시간을 대충 알 수 있는가?”
“비가 그치고 몇 시간 정도겠죠.”
“재주도 좋구먼. 어떻게, 아니지. 내가 알 필요는 없겠어. 술이나 마시세. 그런데 안주가 좀 부실한 것 같은데. 치킨은 안 되나?”
한마디로 안주나 더 사 오라는 소리였다. 은후는 픽 웃고 말했다.
“그러지 말고 가시죠.”
“응?”
“아드님 댁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가면서 치킨도 좀 뜯고요. 기왕이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가셔야죠.”
“……괜찮을까?”
노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편이 아내를 보고 싶다는 데 무어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자네에게 괜한 고생을 시키는 것 같으이.”
“고생한 만큼 저도 얻는 게 있으니 그리 미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기 마련인 측은지심. 더불어 감정 마나를 수급할 수 있다는 마법사로서의 합리적인 이유. 그 두 가지가 노인을 돕는 이유였다.
“진짜인가?”
“제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요. 저, 마냥 선한 사람은 아닙니다.”
“흐음. 뭐, 그러세. 내게 힘이 좀만 더 남아 있으면 로또 번호라도 알려 주는 건데.”
은후는 노인의 말로부터 하나 확실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귀신은 미래를 본다.’
이세계에서 정령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미래, 시간과 관련된 일은 마법사의 영역이었으니까. 그것도 시간을 주로 다루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섣불리 손대기 어려운.
‘나중에 따로 알아봐야겠어.’
하지만 그건 나중에.
‘딱히 그리 급한 일도 아니고.’
은후가 노인에게 말했다.
“가실까요?”
“그러세. 정말 고마우이.”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노인이 비가 내리는 날에만 제대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도 비에 있었다.
‘죽는 날이 비가 오는 날이었으니까.’
노인은 그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비 내리는 날이 참으로 내키지 않았다. 자신의 원망과 미련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 하지만 오늘만큼은 유독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