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5화 (5/170)

제5화

술을 사러 가자고 마음을 먹은 즉시 은후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바로 근처의 가장 큰 마트로 향했다.

‘어디 보자.’

마트에 도착한 은후는 곧장 와인 코너로 이동했다. 그리고 집중해서 술을 살피기 시작했다.

와인으로 고른 이유는 별거 없었다. 기왕이면 맛 자체도 좋게 하고 싶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와인이 제일 만만했다. 그건 은후가 이세계에서 가장 자주 만들었던 술이 포도주였기에 그렇다.

‘이거랑 저거, 그리고 이게 제일 나은 것 같은데.’

은후는 매우 자세히 살폈다. 은후가 이토록 집중한 이유는 같은 가격과 이름을 가진 와인이어도 마나를 받아들이는 데 미묘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이세계에선 마나 적합도라고 했다.

‘총 11만 8천 원.’

마트에 오면서 잡았던 예산은 10만 원이었다. 다소 초과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아르바이트해 둬서 다행이야.’

100년도 전.

대학교 진학 후 자취를 시작한 이래 집에서 보내주는 용돈으로만은 부족해서,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제법 했었다.

‘마지막으로 했던 아르바이트가 술집 서빙이었던가?’

힘들어서 한 달 채우고 칼같이 그만두었던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뭐가 힘들었다고. 지금이라면 어떤 진상을 만나도 그냥 웃을 수 있을 터였다. 최소한 그들은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진 않을 테니까.

‘내가 바뀌어서 그렇겠지.’

100년의 시간이었다. 하물며 현대와 전혀 다른 이세계에서 겪었던 시간들. 그래서 은후는 현대로 돌아온 이후 틈틈이 과거를 떠올리고자 애썼다. 현대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다만 100년의 시간은 너무 길었으니. 은후는 옆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멈칫했다.

“아, 우산 사야 하나.”

마트를 나가는 길. 느닷없이 내리고 있는 가랑비. 그에 은후는 무심코 마법으로 비를 막으려고 했다. 단순히 비를 막는 마법이라면 아주 조금의 마나로도 충분했으니까. 하물며 이는 일반 마법이었고 난이도 또한 매우 쉬웠기에 흑마법사라도 발동이 어렵지 않았다. 은후 수준이라면 더더욱.

“쯧.”

은후가 가볍게 혀를 찼다.

비를 맞아도 젖지 않는 사람이라.

현대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

‘그렇다고 은신 마법까지 같이 쓰기엔.’

회복한 일반 마나량이 적었다. 그렇다고 감정 마나를 쓰기엔 낭비였다.

‘대기에 마나 농도가 조금만 높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은후는 마트 입구에 있는 우산을 하나 샀다.

* * *

은후가 잠깐 우산을 사 오는 사이. 가랑비에서 소나기로 마음을 바꾼 하늘이 빗방울을 우수수 쏟아 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세상 전체가 이미 젖어 든 지 오래다.

이 시간이면 거리를 언제나 밝게 비추려고 노력하던 불빛들에 빗물이 소리소문없이 스며들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마법사가 된 이래 우산을 쓴 적이 있던가.

없었다.

비를 맞은 적은 있었지만.

‘마나가 떨어져서.’

전투 중에.

그래서.

은후는 고개를 저으며 떠오르려던 이세계에서의 기억을 애써 지웠다. 그리 썩 좋은 추억은 아니었으니까.

투두두두둑.

우산에 튀는 빗방울 소리를 벗 삼아 은후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

그때 은후의 눈에 폐지를 줍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낡디낡은 리어카에 가득 채워진 종이 박스들. 당연히 그 박스들은 이미 물이 배어 든 지 오래였다.

‘이상, 한데.’

다만 그 리어카를 바라보는 노인에게는 감정이 거의 느껴지질 않았다. 그게 은후에겐 너무도 이상하게 다가왔다.

분노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눈동자에는 서려 있는 것은 담담함. 또 하나 더더욱 이상한 것은 그 누구도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굳이 말을 걸거나 돕지 않아도 한 번쯤은 지나가면서 시선을 던질 법한데도 그러했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니야?’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짙게 풍기는 마나의 향기. 현대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느껴지는 마나의 집합체.

그 집합체를 이세계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정령이라고.

‘하. 현대에도 정령이 있었는가.’

은후가 호기심에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물었다.

“할아버지.”

“내가 보이나?”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어떻게?”

“그냥요.”

“무당이나 승려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게다가 보는 게 아니라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은후가 웃었다.

“제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그래, 그렇겠지. 귀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평범할 리가 있나?”

“귀신이요?”

“그럼 내가 귀신이지 사람으로 보이나?”

“사람은 아니죠. 그런데 귀신이라고요?”

하기야.

흔히 현대에서 말하는 귀신은 정령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적어도 은후의 기준에서는.

“그것도 맞는 말이군요.”

“20년 만이군.”

“네?”

“20년 만이야. 내 목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이것도 인연인가. 느닷없지만 자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은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공짜가 아니라면요.”

“공짜는 아닐세. 귀신도 염치라는 게 있네. 없는 귀신도 있지만. 그나저나 괜찮나?”

“뭐가요?”

“이렇게 나와 대화하고 있으면 주위에서 미친놈 취급받을 텐데.”

“괜찮습니다. 주위에서 바라보기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 보일 테니.”

은후의 말에 할아버지가 흠칫했다.

“그, 그러고 보니 자네. 입을 열지 않는구만? 혜광심어?”

“글쎄요. 혜광심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닐 겁니다. 별것 아닌 잔재주일 뿐이니.”

마나를 통해서 의지를 전달하는 수법으로서, 마나 운용력만 뛰어나다면 어떠한 마법사도 가능했다.

다만 그 운용력이 정말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이세계에선 마법사의 수준을 구분하는 하나의 척도이기도 했다.

“일단 가시죠.”

“응? 어딜 말인가?”

은후가 희미하게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근처에 한잔하기 좋은 데가 있거든요.”

귀신이 뿜어 내는 감정.

이를 공짜로 가져가기엔 은후도 양심이 살짝 찔렸다. 사람에게 위해를 끼치는 악한 부류도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은후는 술 한잔을 대접하기로 했다.

* * *

은후는 자취방에 들러 사 왔던 와인을 내려놓은 뒤 냉장고에 있던 소주를 챙겼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근처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취방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공원의 이름은 덕진이라는 지역 명칭에서 따왔다. 공원에 있는 호수가 일품인 곳이었다.

“정말 좋은 곳이지.”

“오늘은 더 좋지 않나요?”

구름이 빗방울을 내려 노래까지 들려주고 있으니까. 한마디로 운치가 있었다.

“좋지. 술까지 마시면 더더욱 좋겠지만 난 귀신이야. 그런데 그건 아나?”

“뭐를요?”

“과거라면 모를까, 요새 귀신 대부분은 현세에 개입할 수가 없네. 소멸을 각오한다면 또 모르겠네만.”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폐지 줍는 노인은 은후를 이상하다 여겼다. 이 정도 지식은 귀신들의 세계에선, 또 귀신들을 접할 수 있는 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짜라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은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능숙했기에 도저히 그렇게 여길 수 없었다.

일부러 슬쩍 떠봤는데도 판단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폐지 줍는 노인에게 있어서 은후가 가진 지식 유무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귀신의 힘은 사람들의 믿음으로부터 비롯되네. 이건 아나?”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계에서도 정령이 가진 힘의 기반 또한 그러했다.

“그런데 요새 누가 귀신을 믿나? 진짜로 믿는 사람은 참 드물어. 그래서 제사상에서 음식 맛도 제대로 느끼기 힘들게 된 지 오래야.”

그나마 제사를 지내 준다면 형편이 나은 귀신이었다. 제사라는 형식에서 비롯되는 아주 조그마한 믿음이라도 귀신에겐 감지덕지였으니까.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귀신은 살아남는 것 자체를 걱정해야 할 정도고 말이야.”

“그렇군요.”

폐지 줍는 노인의 설명은 공원의 한 정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솔직히 더 궁금한 게 있지만 그건 차차 듣겠습니다. 일단 한잔하시죠.”

은후가 집에서 준비해 온 작은 유리잔에 소주를 따라 건넸다. 그러자 폐지 줍는 노인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내 설명 제대로 들은 거 맞나?”

“일단 받아 보세요.”

은후가 팔을 계속 들고 있자 폐지 줍는 노인이 투덜거리며 잔을 받았다.

“어차피 받아 봐야 잡지도 못할……?”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당연히 잡히지 않아야 할 잔이 잡히는 것이 아닌가. 노인이 정말 놀란 표정으로 은후를 바라봤다.

“조그마한 잔재주입니다. 일단 한잔하시죠.”

“허, 허허.”

노인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물끄러미 소주잔을 바라봤다.

‘술이라.’

매년 꼬박꼬박 제사를 치르고 있는 자식 덕분에 술맛을 본 게 오래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딱 혀에 적실 정도. 그것도 두어 번 하면 끝이 나는.

“좋구나.”

썼다.

정말로.

기억하는 소주의 맛 그대로.

이 정도로 생생한 맛을 느껴 본 지가 대체 언제였던가.

“한잔 더 하시겠어요?”

“…….”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내밀었다. 거기에 은후가 잔을 채웠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 서로 잔을 비웠다. 호수를 악기 삼은 빗소리를 벗 삼아.

* * *

그 시각.

은후와 상담을 받았던 김명희는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들.”

“……어, 왜?”

“게임은 잘돼 가?”

“그럭저럭.”

게임이란 말만 나와도 아들과 싸우기 일쑤였던 과거와 달랐다.

“여기 과일이라도 좀 먹으면서 해. 몸 상할라.”

“바빠.”

“안 바쁜 거 엄마도 알거든? 아직 큐 안 돌렸잖니.”

김명희의 아들 김우석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큐라는 말을 엄마가 알아?”

“그럼, 아니까 말했지. 방금 전에 아들이 궁극기란 거 잘 써서 이기는 것도 봤는걸. 캐릭터 이름이 디오메데스. 맞지?”

김우석이 하고 있는 게임은 AOS의 한 종류로서 ‘레전드 히어로즈’라는 것이었다. 국내에 정식 출시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내가, 어, 궁극기를 좀 잘 쓰긴 했지.”

김우석이 말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궁극기인 건 어떻게 알아봤어?”

김명희는 그냥 웃고 말았다. 이런 아들의 표정을 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항상 뚱한 표정을 짓는 아들이었는데. 인터넷을 열심히 찾아가며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아들 티어 점수는 몇 점?”

“……1,480점.”

“골드까지 한 판 남았네?”

“응.”

‘레전드 히어로즈’에선 승리와 패배에 따라 점수를 부과했다. 그리고 점수 구간별로 등급을 매겼다.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우리 아들 게임은 이쯤 하는 게 어떨까? 다음 판 정말 중요하잖아. 엄마 생각에는 멀쩡한 상태에서 하는 게 나을 것 같거든.”

“어, 그게, 괜찮은데.”

무작정 게임을 그만하라는 게 아니라 설득력 있는 어머니의 말.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김우석도 화를 내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만약에 다음 판에 지면 억울해서라도 계속 게임을 더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러면 잠자는 시간이 엄청나게 늦어지겠지? 학교에서도 졸릴 거고.”

김우석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집에서까지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이제 안 할게. 그런데 수업 시간만큼은 안 졸고 집중해 주면 안 될까?”

“…….”

“집에 와서 게임 하는 건 괜찮으니까, 대신에 학교 수업만 좀 잘 받자. 응?”

“……응, 알았어.”

“그럼 오늘은 컴퓨터 끄고 누울까?”

김우석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컴퓨터를 껐다. 다만 누웠을 때 김우석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