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선택의 갈래(3)
고오오오-.
느리게 움직이는 시간선 속에서.
오로지 유성만이 빠르게 사고를 가속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육체 또한 원래의 시간 선에 얽매여 있었으나.
유성 그에게는 그마저도 벗어날 한계 너머의 힘이라는 게 존재했다.
‘각성기.’
이글거리며 팽창하기 시작한 금빛 광채가 밝아질 수 없을 정도로 치닫더니.
이윽고 이미 사용한 각성기 ‘사고가속’ 에 뒤이어 또 하나의 각성기를 발동했다.
‘육체 가속.’
유성의 신형이 순간 늘어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이는 뒤편으로 푸른 마력의 잔향을 담은 잔상이 펼쳐졌다.
느리게 움직이는 시간 속에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그 하나뿐이었다.
실제로 다른 이들이 체감하는 그의 속도는 각성자들의 눈으로조차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에.
설사 이번만큼은 언터처블이라 할지라도 그의 속도에 반응할 수 없다.
‘이전의 능력이 오로지 제 자신의 정신에 제한한 가속에 불과했다면, 육체 가속은 전신에 걸친 압도적인 성능의 가속 강화 능력이다.’
반동은 아마 두말할 것도 없이 상당할 터였다.
동시에 연달아 사용하는 두 개의 각성기.
심지어 멈출 생각조차도 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사용해가며 움직이고 있었다.
유성은 자신에게 찾아올 결과를 쉽사리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각성기를 도중에 멈추는 순간 극심한 수준의 반동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뒷감당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애당초 여기서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뒤는 없다는 생각으로 움직였다.
이전 생의 언터처블, 그놈이 얼마나 지독한 재앙이었는지.
여실히 실감한 그였다.
‘놈이 가볍게 내지르는 공격 한 번에 도시 하나가 날아갔다. 심지어 그마저도 힘의 일부.’
[……!]
그러한 유성의 난데없는 급격한 변화에.
놀란 듯, 놈의 동공이 커지는 게 보인다.
마력이 일순간 뒤흔들리며 놈의 동요를 드러냈다.
녀석은 이렇게까지 느려진 시간 속에서조차 유성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 남은 세 개의 손을 들어 올리며 그의 접근을 막아내려 하는 게 보이지만, 그런다고 가능할 리가 없다.
유성은 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홀로 유일하게 가속하여 움직이는 인간이었으니까.
놈은 이걸 지니지 못했다.
그 시간 가속은 드라칸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완전체들만이 지닌 능력이었다.
유성의 기가스가, 너무도 유연하게 홀로 미끄러지듯 공간을 유영하며 녀석의 손아귀를 쳐내고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리브.’
리브가 보인다.
완전체 언터처블의 품에서 녀석의 보호를 받는 채로 그를 향해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
녀석이 조금 크게 눈을 뜬 것은, 아마도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새로운 능력의 존재 때문일 터였다.
이전에는 아직 덜 완성되었던 탓에, 단 한 번도 각성기인 육체 가속을 보여주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스스스.
유성의 대검이, 언터처블과 그 안에 안겨있는 리브를 향하여 정확히 찔러 드는 순간.
리브는 마치 체념이라도 한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가스의 검 끝부분이 정확하게 리브와 언터처블을 노린다.
거검이 둘에게 닿는 순간, 그들의 형상은 그대로 무너져 내릴 터였다.
유성이 마지막 찰나의 쪼개어진 세밀한 시간 속에서 리브에게서부터 풍겨지는 마력을 통해 선할 정도로 분명하게 전해져 오는 감정을 느꼈다.
그건.
‘사랑해, 아빠.’
여전히, 그를 향한 한없이 긍정적인 감정의 기류였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리브는 날 따르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전히 리브는 리브일지도 모른다.
드라칸의 무리를 이끄는 여왕체로서가 아니라, 유성과 라피스의 마력을 지니고서 태어난 그 당시의 리브 그대로의 감정과 성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쐐애애액-.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성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검날은 오로지 눈앞의 상대를 향할 뿐이었다.
한낱 감정 따위로 그의 심정을 대변하기에는 이미 상황은 너무도 돌고 돌아온 상태였다.
리브가 이끄는 드라칸의 무리에 의해, 연합은 물론이고 테라 행성 전역에서부터 갖은 피해를 입었다.
거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민간인들마저 포함된 채로였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귓가에 전혀 예상치 못한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 역시는 역시라니까. 결국, 내가 제아무리 힘을 써도 이 순간은 도래하고 마는 건가?]
‘무슨……?’
난데없이 들려오는 그 녀석의 음성에.
유성은, 순간 내지르던 검의 끝부분이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로 눈이 커지고 말았다.
유성의 눈앞에 떠오른 잔상은.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인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대장.]
‘넌 분명 죽었을 텐데?’
[그래, 죽었지.]
그녀는 대답했다. 그리곤 소리 내어 웃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일단 대화를 하는 게 어떻겠어?]
이어지는 녀석의 말과 함께 당황한 그의 정신이 일순간 아득해지더니.
이윽고 유성은 주변이 온통 새하얀 공간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대장.]
* * *
“대장.”
유성이 눈을 떴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한 점의 티끌조차 찾아낼 수 없는 새하얀 공간이었다.
“…….”
조금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는 이 기이한 공간을 둘러보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무언가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소파에 앉아있는 익숙한 외형의 한 여성이 있었다.
“알파.”
“하하.”
알파.
그녀는 등을 깊게 파묻고서 편히 앉아있었다.
곧 손을 들어 흔들며 그녀가 그의 등장을 반겼다.
“안녕, 대장. 오랜만이야.”
“…이미 너는 죽었을 텐데, 무슨 수로 아직도 존재하는 거지?”
유성은 가늘게 눈을 뜨고서 그녀를 응시했다.
알파는 죽었다.
그의 부모님이 사망했던 날, 그녀가 있던 도시인 연합의 수도 또한 완전체의 공격 아래에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로 불살라졌다. 남김없이.
이제 와 그녀의 생존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해본다면 그 가능성은 한없이 낮은 상태였다.
스스로 몸을 가눌 여력조차도 되지 못하던 것을 생각했을 때, 이미 그녀는 자의건 타의건 간에 상관없이 숨이 끊어지고도 남았을 테니까.
“대장.”
하지만 알파는, 그러한 유성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낮게 웃을 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아?”
“…….”
“대장이 궁금한 건 내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가 아니라, 왜 이 순간에 나타났냐는 것일 테지.”
털썩.
하지만 유성은, 마찬가지로 알파의 맞은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도 쓰게 웃을 분이었다.
“알고 있으면서 뜸을 들이는 것도 네 특기잖아?”
“흠. 뭐 그것도 그렇기는 하지. 자아, 일단 이거나 한 잔 받아.”
“이건?”
유성은 알파와 자신의 가운데에 생겨난 커피잔의 존재에, 의문을 드러냈다.
그녀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여긴 심상 공간이야. 뭐든지 상상만 한다면 이루어지는 세계지. 다만 덧붙이자면, 여긴 나의 세계가 아닌 대장의 세계라는 게 중요하겠지만.”
“내 세계?”
후룩.
알파는 생겨난 커피를 들이켰다.
그 느릿한 여유 속에는, 어디에도 자신의 최후를 맞이한 자의 미련 따위가 엿보이질 않았다.
가만히 마주 응시하던 유성을 향하여.
그녀는 피식 웃고는 물었다.
“안 마실 거야? 아니면 다른 거로 바꿔줄까?”
“…이걸로 마실게.”
모두 마시지 않는다면 도저히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는 듯해 보여, 유성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는 쪽을 택했다.
이어지는 정적과 커피를 마시는 작은 소음.
그 속에, 잔의 절반 가량이 비었을 때 즈음이었다.
알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대장의 심상 세계 한구석에 의식을 가둔 채로 머물고 있어. 현세의 나는 이미 죽고 없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이지만 의식을 연명하고 있지. 굳이 따지자면, 얹혀사는 느낌?”
“그런 일도 가능했던 건가? 참, 너도 여러모로 능력이 많은걸.”
“하하, 대장도 대충 배우면 할 수 있을걸? 내가 할 수 있는 걸 대장이 못할 리가 없잖아?”
분위기는 가벼웠다.
현실에서만큼은 어떨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유성도 이전의 사나움을 풀고 본래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검을 들고 있지 않았고, 살기를 치켜세울 필요조차 없었다.
물론 그것이 한시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도 그녀도 이곳에서만큼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마도 그때였던 건가.’
지금으로부터 3년여 전.
유성이 황도에 나타난 완전체의 등장과 부모님의 사망에 분노하며 녀석과 같이 공멸을 택했을 때.
시공이 뒤틀리는 순간 알파의 힘이 더해졌었다.
그녀의 사념이 그의 의식 한쪽에 머무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터다.
“아마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순간, 현실에선 아마 수십만 분의 일 초쯤 될 거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못할지도. 어쨌든 바꿔 말하자면 그만큼 길게 대화를 해도 문제는 없단 소리이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순간에 날 불러낸 거지? 빌객스가 말했듯이, 날 막기 위해서인가?”
“대장도 알고 있잖아?”
그 말에.
알파는 미묘한 의미를 담은 웃음을 드러냈다.
“내가 허튼 이유 없이 이럴 리가 없다는 걸.”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안 되는 건가?”
“알 수도 있지. 대장이 원한다면 알려줄 거고.”
“……?”
유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다.
이렇게 순순히 알려줄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빌객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건가.
이내, 언제 꺼내 들었는지도 모를 사과를 베어 물며.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알지 않을 수도 있어. 그마저 대장이 원한다면 말이야.”
“차이점이 있는 건가?”
“그야.”
알파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장이 받아들이게 될 현실이 조금 달라진다고 할까. 이전까진 드라칸 녀석들이 그래도 단순한 괴물로만 보였다면, 어쩌면 그저 조금 불쌍하고 말게 될지도 모르지. 물론, 대장도 포함해서.”
“그게 무슨 소리지?”
“그건 대장이 선택하기에 따라서 다를 거야. 어쩔 거야?”
어느샌가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알파가 유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정말로 알고 싶어, 대장? 크게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
짧은 정적을 뒤로하고.
유성은 이내 입을 열었다.
“대답이라면, 너도 알고 있잖아?”
그의 말에 알파는 조금 쓰게 웃어 보였다.
“…대장, 틀림없이 후회할 거야. 차라리 진실을 알지 못한 채로 빌객스의 설득을 듣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
“괜찮아.”
“그렇다고 한다면, 알겠어. 그러지.”
따악.
알파가 손을 튕긴 순간, 그들의 시점이 뒤바뀌었다.
고오오오-!
새하얀 공간에 순식간에 어둠이 밀려들고, 무수한 별들의 무리가 한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역변하는 광경 속에 이윽고 알파가 말했다.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삼백여 년 후의 세계야. 그러니까, 내가 황녀로서 기술력을 의도적으로 제한하던 제약이 완전히 풀린 훨씬 미래의 세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