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선택의 갈래(2)
[대장! 멈춰!]
“…빌객스?”
난데없이 공간 이동을 연거푸 도약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아선 빌객스의 등장에.
유성의 기세가 잠시나마 멈췄다.
그는 리브와 리브를 지키듯이 가로막고 선 언터처블을 잠시간 응시하다, 이내 눈길만을 돌려 물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그 녀석을 쓰러트리면 안 돼!]
“뭐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뜬금없는 소리에, 유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만 의문은 잠시였다.
그에게는 난데없는 헛소리를 하는 빌객스의 등장보다, 눈앞의 상대가 더 중요했다.
상대는 무려 인류가 가진 어떠한 물질적 공격으로도 쓰러트릴 수 없었던 최악의 생명체였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아직 녀석이 어리고 힘을 쌓지 못한 이 순간이 아니고선, 인간의 힘으로 녀석을 감당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당이 되는 이 때, 어떡해서든 놈을 처리하는 것이 맞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알아차린 언터처블.
녀석의 주변으로, 가공할 에너지가 끌어 모아지기 시작했다.
삑-!
모니터 화면에 놈이 있는 위치의 마력 수치가 빠른 속도로 상승하는 게 보였다.
고에너지 반응의 적색 경고 표시가 떠올랐다.
그 순간, 놈이 입을 쩍 벌리며 울부짖었다.
[■■■■■■-!!]
강렬한 포효에, 공간이 찢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울리며 파동을 발생시켰다.
주변의 공간이 울리는 감각에, 주변의 넘버즈들이 신음을 흘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저것은 단지 기가스에 탑승했다고 해서 막아낼 만한 종류의 공격이 아니었다.
‘제기랄.’
유성의 인상이 구겨졌다.
저거다. 바로 저것으로 인해 그들은 그토록 애를 먹었다.
어떠한 인간들로서도, 감히 상대가 되지 않는 오로지 저 언터처블만의 고유한 특성 능력.
놈은 주변의 모든 물질과 비물질 에너지 전체를 지배한다.
“다들 모여!”
유성의 외침과 함께.
그의 주변으로 푸른빛의 거대한 마력 장막이 널리 펼쳐졌다.
그의 통신을 들은 넘버즈들이 피를 토하며 뒤편으로 다가와 섰다.
[크윽!]
[이, 이건 또 뭐야!]
[제, 제기랄.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아. 고막이 터져나간 것 같아.]
신음하는 넘버즈들에게서부터 시선을 돌린 유성이, 오로지 전방의 마력 진동을 틀어막는 데에만 집중했다.
‘큭…!’
버겁다.
나름대로의 성장을 이룬 그였을 진대도 그러했다.
[■■■■■■-!!]
이 순간에도 주변의 공간을 하나둘 집어삼키고 있는 녀석의 포효에.
그를 노려보던 유성이 이내 이를 악물었다.
‘녀석의 파동 공격을 막아내려면 다른 수가 없다. 녀석의 기세를 잠시나마 멈춰야 해!’
가만히 놔둔다면 놈의 주변은 물론이고 유성이나 다른 동료들이 있는 영역마저 놈에게 집어먹힐 터다.
그렇게 되면 주변의 모든 마력은 물론이고 에너지라 칭할 수 있는 모든 걸 놈에게 빨려갈 터였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뜻했다.
인간은 모든 생기를 빨아먹히고선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키이잉!
유성의 두 눈이 새파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체내의 마력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그는 공간을 가르고서 쏘아졌다.
콰직!
유성이 푸른 빛줄기처럼 움직이며 녀석을 스치듯 지나쳐간 순간.
놈, 언터처블의 한쪽 팔이 형편없이 뜯겨나갔다.
그에 녀석의 자세가 풀렸다.
주변으로의 침식이 멎었고, 녀석이 크게 비틀거렸다.
“아빠!”
[유성!]
자식, 언터처블에 대한 급습에 리브는 물론이고 빌객스 또한 대번에 소리쳤으나.
유성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아니었다.
재차 그의 기가스가 대검을 부여쥐곤, 녀석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푸른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 일직선적인 공격의 감행에.
[아, 그러니까 죽이지 말래도!]
한숨 섞인 음성과 함께.
공간을 도약하며 달려든 빌객스의 기체가 유성의 팔목을 단단히 부여 쥐었다.
물론, 붙잡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해낸 유성이 공격을 풀어냈다.
유성과 빌객스.
둘은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선 잠시 동안 대치했다.
그는 자신의 공격을 방해한 빌객스에게로 통신을 날렸다.
“뭐하는 거냐, 빌객스.”
[이런 빌어먹을! 녀석을 죽이려면 그 전에 나부터 상대하는 게 좋을 걸!]
“방해하겠다는 건가?”
[그래!]
드라칸을 죽이려는 자와 놈들을 살리려는 자.
선택지의 답은 둘 중 하나였다.
놈을 죽여 당장의 위안을 찾던가. 그게 아니라면 녀석을 이대로 살려두어 알파가 원하는 대로 하던가.
빌객스는 유성을 믿는다.
그들 넘버즈의 모두가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앞에서 드라칸 놈들과 대적하며 싸우던 이가 바로 그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같은 동료였던 알파 또한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유성을 막아선 빌객스가 내린 선택지는 유성을 막고, 알파의 선택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
눈을 가늘게 뜨고선 빌객스에게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의 기세를 탐색하던 유성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알파가 무슨 말이라도 남긴 모양이군.”
[제기랄, 눈치도 빠르네!]
‘…눈치도 빠르다라.’
빠를 수밖에.
다른 누구보다 드라칸을 증오하는 게 바로 빌객스 그녀였다.
실제로 리브와의 첫 대면 이후로 녀석이 드라칸의 여왕체라는 것을 알자마자 다분히 적대감을 태웠던 그녀가, 이제 와 리브를 살려두라며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몰랐던 어떠한 명분이 그녀에게 생겼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고오오!
빌객스의 기체 주변으로, 검은 마력이 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저 녀석의 팔다리를 끊어버리기 전에, 먼저 나부터 상대해야 할 거다! 대장!]
대놓고 그와 싸울 생각을 드러내는 빌객스의 모습에.
오히려 유성은 확신할 수 있었다.
리브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몰랐고.
이제 와 생겼을 그 명분. 그것을 남겼을 대상은 아마도 한 인물뿐이었다.
분명, 알파 그녀뿐이다.
이런 전개를 내놓을 만한 인물은 말이다.
알파가 그녀 빌객스에게 어떠한 대답을 남겼어도 분명히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빌객스가 증오해 마지않던 드라칸 놈들을 구태여 살려야만 할 정도로 필사적인 이유라는 건가.’
만약 유성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한 선택과 결과를 내놓았다면.
알파는 빌객스가 아닌 유성에게 먼저 선택지를 제시했을 터다.
그렇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란 간단했다.
이것은 유성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오로지 빌객스만이 받아들일 선택지라는 의미였다.
유성은 차분히 대검을 뽑아들며 말문을 열었다.
“알파가 뭐라고 했지? 납득이 간다면 나도 수락하도록 하지.”
[꼴 보면 몰라? 저 녀석 살리라고 했지!]
“그렇군.”
납득이 가질 않는다.
유성의 관점에서, 드라칸은 해충보다도 못한 존재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기에.
죽이는 선택지는 있되, 그밖에 선택지는 없었다. 당연히 살리거나 보류한다는 의견 따위는 철저한 묵살이다.
쾅!
대답과 동시에.
유성이 타고 있던 기가스의 신형이 빌객스의 측면을 급습했다.
전조조차도 없는,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다른 곳에서부터 나타난 광경.
빌객스의 고유 능력인 공간을 가르고서 도약하는 공간기를 사용하며 나타난 것이었다.
[크윽!]
첫 급습에서부터 간신히 목숨줄을 부지한 빌객스가 버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타고 있던 기체의 장갑 일부분이 푹 찌그러졌다.
삐익!!
단 한 번의 일격을 틀어막았을 뿐인데 기체가 비명을 내질렀다.
빌객스의 모니터 화면에 적색 경고 신호가 떠올랐다.
[너, 뭐하는 거야!]
퍼엉!
그때 측면에서부터 라피스의 기체, 아크 드레드노트가 껴들었다.
그녀의 거대한 손아귀가 빌객스를 대신 막아주기라도 하듯 앞으로 끼어들었으나.
유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간을 뛰어넘더니 빌객스의 반대편을 후려쳤다.
쩌엉!!
기가스의 두꺼운 장갑들이 형편없이 부서지고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유성의 공격 패턴은 둘 중 하나다.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나서던가, 그게 아니라면 적절한 수준에서 사정을 봐주던가.
끝내려면 진작에 끝낼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철저하게 빌객스가 탄 기체의 출력을 조정하는 스러스터 날개 부분을 노리며 공격을 연신 퍼부었다.
“빌객스, 막아봐야 소용없다. 저 녀석은 재앙이야. 이 자리에서 뿌리를 뽑아야 해.”
[큭! 그래서 막으면?!]
“뭐?”
[저 녀석을 죽여 봐야 이 전쟁이 끝날 것 같아?!]
끝나진 않는다.
당연하다. 이미 이곳 태양계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놈들이 번져 나갔다. 마치 들불처럼.
설령 여기서 리브와 언터처블을 쓰러트려도, 그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드라칸들의 출몰뿐이다.
“하지만, 최소한 궁극체에 도달할 녀석을 미리 없애둘 순 있겠지.”
[이런 썅?! 대장 눈에는 저게 괴물 새끼로 보여? 그냥 지 엄마 밑에서 응석부릴 줄이나 아는 조금 음습한 히키코모리 새끼지!]
“…….”
그 말에.
유성의 검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이, 무심코 녀석을 응시했다.
[■■■■-….]
잘려나간 팔목 부위를 움켜쥔 채.
유성을 노려보고 있는 언터처블이 보인다.
녀석의 두 눈에는 강렬한 적대감과 불길함이 서려 있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악의라고 할 정도로까지 번져나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성은 그마저도 몇 번이고 경험해 왔다.
질릴 정도로 말이다. 녀석이 인간을 적대하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 충분한 힘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라칸은 본래 어릴수록 공격의 성향이 덜하지. 나이가 어리니까 당연한 거다. 약하면 약할수록, 적을 대면하고 상대하기보다 둥지를 지키고 숨으려는 성향이 짙기 마련이니까.”
[와! 진짜 존나 답답하네!]
진한 한숨과 함께 빌객스가 달려 들려던 찰나.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라피스였다.
[야! 그만해!]
“라피스?”
라피스. 그녀는 유성이 더 이상의 공격을 이어가기 전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선 입을 열었다.
[리브. 약속할 수 있어? 저 녀석을 데리고 이곳에서부터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까지 영영 멀어질 수-.]
라피스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
유성은 이미 황금빛의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마치 동영상의 슬로우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듯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하며.
유성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지금 당장 노려야 할 것은 언터처블. 다른 이들은 모두 무시한다.’
빌객스가 라피스는 장애물일 뿐이다.
당장 바깥에서의 급박한 상황을 떠올린다면, 저들이 가지는 찰나의 감정선에 일일이 시간을 소모하는 것은 결코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시간선을 한없이 느리도록 만든 이 순간에조차,
언터처블의 육체는 움직이고 있었다.
[……!]
언터처블, 녀석의 푸른빛이 스멀거리는 동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노릴 것이라는 걸 직감한 녀석이 황급히 남은 세 개의 팔을 느린 속도로 들어 올리는 게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놈이 이 상황에 대응하여 반응할 정도의 능력까지는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