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전장(2)
[하. 이런 녀석과 이번 임무를 함께 치르라는 건가?]
분대장급 인사들만이 참여한 통신 채널.
그곳에 한 남자가 얼굴을 비췄다.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나풀거리는 기다란 머리칼을 드러내며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마르스 볼드워커 공작이었다.
그는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불만을 여지없이 표출했다.
그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인물 중의 하나인, 고위 가문의 주인이자 동시에 각성자로서 강대한 힘과 재능을 소유한 남자였다.
그의 눈길은 유성을 바라본 채로 연신 으르렁거리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해 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물론 마르스 공작뿐만이 아니었다.
채널에 참여한 에스메랄다 후작도, 그 이외의 다른 한 명도.
모두가 유성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 터였다.
지금 채널에 참여한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각성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수 합을 채 넘기지 못하고서 유성의 무투기에 형편없이 밀려 나간 전적이 있었으니까.
‘다시금 마주한 것만으로도 그때의 기분이 상기되겠지.’
그들의 격투가 벌어질 당시.
전함 메타트론의 모두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편없을 정도로 손쉽게 승패가 결정이 나 버렸던 그때의 상황은 어떤 식으로든 저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성은 구태여 좋은 말을 해줄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지금 그들은 이미 격전지의 한바탕에 진입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더더욱 중요한 것이라 한다면.
현재 그들은 같은 연합의 소속으로서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임무 도중에 나한테 눈을 돌릴 여유까지 있나? 이미 우리들은 놈들의 영역에 진입했다.”
[이 새끼가….]
마르스 공작의 갈기털 같은 머리칼이 역으로 치솟는 모습이 비친다.
하지만 유성은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는 듯 전방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는 짧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집중이나 하도록.”
한낱 섣부른 감정 따위에 일일이 구애를 받는 이에게 해줄 말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확실히. 다른 각성자들에 비해 연령이 비교적 젊은 편이라서인지 감정의 정리가 익숙해 보이지는 않는군.’
적어도 에스메랄다 후작은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진 않았다.
그녀 또한 유성에게 호되게 당한 것은 맞았으나, 적어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감정과는 별개로 현 상황이 우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전장이 아직까지 익숙지 못했다.
고오오오-.
유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변 기체들을 살폈다.
자색과 녹색. 그리고 백색으로 된 연합 소속의 전용기들.
당연하지만, 그 기체들의 주인은 결코 평범한 이들이 아니었다.
바로 각성자라고 불리는 연합 소속의 대장급 전력으로, 방금 전까지 유성과 대화를 나누었던 마르스 공작 또한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전용기의 형상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 하나 공통점을 가진 기체들이 없었다.
자색의 기체는 유난히 긴 날개 형상의 쓰러스터 추진 장치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녹색의 기체는 두꺼운 장갑을 겹겹이 장비했다.
유성은 그들의 기체 장갑에서부터 푸르스름한 혈관과 같은 것들이 내비치는 것을 통해, 그것들이 드라칸의 사체를 소재 무장으로서 채택했다는 것을 손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저 특색있는 전용 무장들은 모두가 상위체 이상 등급의 드라칸 사체를 사용한 것들일 터였다.
유성은 차분히 주변 정황을 살폈다.
그의 눈에 십여 척의 전함과 칠십여 기의 기가스들이 보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수준이군.’
현재 모인 전력은 사실상 현재 연합이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진짜 모든 것을 다한다면 지금의 배를 넘을지도 모르겠지만 태양계의 곳곳을 동시에 방위해야 하는 그들의 입장상,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상 이곳의 전력만으로 초군체와 그것들의 여왕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나마 퇴역함 수준의 골동품이 없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건가.’
이전에 그는 행성 테라의 지상에서 퇴역함마저 끌어와 운용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지금 상황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수준 이하의 구색 맞추기를 위한 전력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때, 돌연 전체 채널을 타고서 통신 담당병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초군체의 감지 영역에 진입합니다.]
초군체의 무리.
놈들은 지금 빠른 속도로 우주의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제아무리 드라칸이라고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우주 항행 능력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라칸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였다.
놈들 또한 육체에는 분명한 한계점과 활동 반경이란 게 존재했다.
결국 놈들이 우주를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데에는.
그만한 성능을 가진 특이 개체가 존재하기에 가능하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 놈들은.
무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전함’ 의 형상을 한 무언가에 탑승해 있었다.
정황상 확실한 것은 아니었으나.
현재 연합의 지휘부 측에서는 놈들이 올라타고 있는 그 탈것마저도 하나의 생명체, 즉 드라칸으로서 잠정적인 판별을 내린 상태였다.
그리고 유성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확실하겠지. 타입은 아마도 함대전 그 자체를 상정하여 제작되었을 요새형의 드라칸. 볼 것도 없이 완전체 등급 이상일 테고.’
인간이 드라칸의 핵을 이용하여 보다 나은 무장과 시스템을 건조할 줄 안다면.
놈들은 반대로 인간의 전술과 기술을 베끼고 학습하여 보다 나은 전법을 구사할 줄을 안다.
이미 두 종 간의 비교는 무의미한 수준이었다.
한쪽이 새로운 전략을 구사한다면, 그것은 다른 반대편 쪽에서마저 학습하여 언젠가는 이용해먹을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놈들이 우주에 진입했다면, 그것은 우주권에서의 활동이 가능한 개체들이라는 소리였다.
현재 초군체 무리가 타고 있는 것의 형상은 연합의 전함과 그 모습이 유사했다.
[에너지 실드 전개.]
우우웅-!
이제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하였음에, 십여 척의 전함들이 일제히 푸른 에너지 장막을 펼친다.
마치 물결이 시커먼 우주에 펼쳐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를 하기가 무섭게.
저편의 우주에서부터 은밀하게 나아가고 있던 초군체의 무리가 은신을 풀었다.
놈들이 타고 있던 전함이 일렁이더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
동시에 놈들의 전함에서부터 눈부신 빛이 크게 일렁이며 터져 나왔다.
[고출력의 에너지 반응 확인! 에너지 규격 확인 중! 추정 약 250만 테트라 단위입니다!]
[적습입니다!!]
빛이 쏘아진다.
온 우주가 진동하듯 떨려왔다.
강대한 빛에너지의 파도가 저편에서부터 몰려들었다.
조종석의 온 화면을 가득 메운 눈부신 빛.
마침내 그 빛이 연합의 전선에 맞닿은 순간, 마치 세상이 붕괴하는 듯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쿠구구궁!!
어마어마한 떨림이다.
기체가 인정사정없이 진동하여, 조종간을 붙잡은 유성의 손길마저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막대한 재해의 접근마저.
결국 전력으로 펼쳐 든 함대의 장막에 끝내는 가로막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하고.
곧이어 반격이 시작되었다.
다수의 전함이 차례로 포문을 열어젖혔다.
푸른 빛의 포격이 초군체가 있는 방향을 노리고서 쏘아지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빛의 포격이 서로를 노린다.
상상할 수조차 없이 거대한 전장을 배경으로 초장거리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 가운데 포격과 불길이 점차 거세어지고.
언제까지고 공격을 흘려낼 수만은 없었다.
퍼엉!
결국 에너지 실드를 펼쳐 장막을 전개했던 전함 중의 일부가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불길에 휩싸인 전함이 하나둘 격추되어 무너지고 있음에도, 수십 여기의 기가스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로 제자리에서 대기했다.
함대의 상대가 저 거대한 크기를 한 전함이듯이.
기가스 파일럿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드라칸이었다.
그때 통신 채널을 타고서 브리핑이 울렸다.
[11시 방향, 다수의 드라칸 접근 중!]
[파일럿들, 대비하라!]
모니터 화면에 표시된 다수의 마력 반응이 고속으로 접근해오는 것이 보였다.
‘시작인가.’
때가 되었음을 감지한 유성이 대검을 쥐는 순간.
각성자들이 탑승한 기가스들을 필두로 연합 소속의 기체들이 쏘아지듯 나서기 시작했다.
유성 또한 분대 채널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알파와 베타, 지금부터 작전대로 길을 뚫는다.”
그들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초군체의 본진이 대기하는 상대 진영까지의 길을 뚫는 것이었다.
유성은 침묵하는 상태의 블레이드를 향해 말했다.
“블레이드, 베타 분대의 판단은 네 자의에 맡기도록 하겠다.”
[그러지.]
유성은 대답하는 블레이드의 동공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미약한 흥분감을 읽어냈다.
놈의 존재는 여전히 불안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전장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지금은 일단 집중하는 수밖에는 없다.
[■■■■!]
콰앙!
이미 다가서기 시작한 드라칸들을 맞상대하기 시작한 기가스들의 사이로 유성의 분대원들이 쏘아지듯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전장으로 진입한 유성은 정면을 가로막은 드라칸의 모습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인간형, 거기에 무려 전투체였다.
‘하지만 문제없어.’
그는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대검을 끌어당겼다.
우웅!
그러자 그의 대검날 부분에서부터 진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마력이었다.
새파란 마력을 날카로운 입자로서 분출하는 초진동검. 그 절삭력은, 한낱 생명체의 갑각질 따위가 감당하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예리하다.
그는 가속해 쏘아진 속도를 이용해 그대로 놈을 스치듯 지나쳤다.
서걱!
섬뜩한 감각이 기체의 팔을 타고 그에게로 전해졌다.
유성이 스치듯 지나쳐 가자마자, 정지한 듯 멈춰서 있던 놈의 몸체가 쩍 벌어지더니.
이내 그대로 퍽 터져나가며 갈라졌다.
하지만 유성은 놈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로 그대로 쏘아져 보다 깊숙한 안쪽으로 진입했다.
“이대로 저 안쪽으로 진입한다.”
[알겠다.]
[알겠다.]
적이라면 이 순간에도 넘치도록 많았다.
그는 달려드는 드라칸들을 그대로 스치듯 베어넘겨 버리곤 분대를 이끌어 깊숙이 파고들었다.
[■■■!]
[■■■■-!!]
한둘이 아니다.
적은 수십, 수백. 혹은 그 이상.
그는 사납게 달려드는 드라칸 놈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곳곳에서부터 연달아 이름 모를 기체들이 폭발하여 우주의 쓰레기가 되어버리고, 정신없는 고함이 연달아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오로지 그들 분대원들만이 처음부터 표적을 정해두었다는 듯 한 방향을 향해서 쏘아졌다.
노리는 것은 하나였다.
초군체 무리의 여왕이 기다리고 있을 놈들의 거대한 전함.
그 깊숙한 안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