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게이트(3)
“아빠?”
번쩍.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리브의 얼굴이었다.
멍한 유성의 눈이 리브의 손으로 향했다.
리브의 검지 손가락이, 그의 볼을 건드리고 있었다.
뒤이어 그 뒤편으로 라피스가 실실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유성은 잠시간 멍한 얼굴을 한 차례 쓸었다.
“뭐야. 잠들었었나?”
“그런 것 같더라. 몇 번을 불러도 안 일어나더라.”
유성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곤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먹먹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잠깐 눈을 감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대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요 며칠 사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잠이 모자랐다. 어쩌면 수도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서부터 비롯된 긴장이 이제야 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굴을 쓸어내린 유성은, 눈을 바로 떴다.
그리곤 옆의 라피스를 보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그사이 다시금 완벽한 금발로 변해 있었다.
“염색은 다 끝났나 보네.”
그 말에 라피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응. 이번에는 나름대로 신경써서 색을 입혔지. 이번엔 이전처럼 쉽게 원래 색이 드러나진 않을 거야.”
똑. 똑.
그때, 닫혀있던 문의 너머에서부터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한 듯이.
리브의 모습이 대번에 지워지듯 투명해지고, 오로지 둘만이 남았다.
“아가씨.”
“아, 집사.”
“방금 전 황성 쪽에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리스 황녀 전하께서요.”
그 말에, 라피스는 한 차례 의문을 표했다.
“황녀 전하께서?”
황녀가 아직 가주조차 되지 못한 라피스에게 직접적인 언급을 할 이유는 없었다.
만약 가문에라도 볼 일이 있다면 유리를 통해서 하면 될 일이었지 그녀를 부를 일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둘은 아직 제대로 된 일면식조차 가지지 못한 탓이다.
“……?”
뭇내 그 사실이 의아했던 그녀는, 잠시간 유성을 돌아보곤.
다시금 문 너머에 있을 집사를 향해 물었다.
“급한 일인가요?”
“…황녀 전하께서, 아직 통신을 채 끊지 않으셨습니다.”
“……!”
대번에 라피스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당황해서 다급히 대답했다.
“알겠어요, 일단 그쪽으로 갈게요.”
“그, 그런데….”
“왜 그런가요?”
잠시간 말을 흐리던 문 너머의 집사가.
이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뒷말을 덧붙였다.
“유성 군도 함께 오라고 하시더군요.”
“유성을요?”
그 소리를 들은 둘의 표정이 대번에 모호하게 변했다.
* * *
아리스 리 아리안롯드.
이 이름을 모르는 자는, 온 태양계 전체를 뒤져도 아마 거의 없을 터였다.
지금은 오로지 국정에만 몰두하는 황제의 유일한 핏줄이자, 장차 다음 세대의 연합에 간섭하게 될 가장 장대한 인물.
비록 그녀가 어린 시절 이후로 단 한 번도 세간에 직접적인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이름은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전해지기로 아리안롯드는 예전부터 어느 뛰어난 마나 사용자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일반인들에게까지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간혹 그들이 드러내는 일부의 능력들은 분명 그러한 힘을 이어받았음을 여지없이 증명하고는 했었다.
어쩌면 이전 세대의 누군가가 어쩌면 각성자인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말이다.
때문에 그녀를 마주할 만한 이들의 수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오로지 각 가문의 가주들 정도만이 개인적으로 독대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경우가 거의 없기는 할지언정 말이다.
그토록 세간에 공개되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보니, 어쩌면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는 허구이며 사실 황녀라는 것 또한 단순한 뜬소문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기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유성과 라피스는, 일반인의 신분을 가지고선 거의 유일하게 그러한 황녀를 마주한 이들이 되었다.
[처음 마주하게 되는군요.]
커다란 모니터의 화면 너머로, 라피스 그녀만큼이나 비추는 듯한 물빛 머리칼을 지닌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분한 눈매와 음성을 한 아직은 소녀로 보이는 어린 여성.
그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연합의 수장이자, 행성 테라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으신 영민하기 그지없는 황제 폐하의 독녀 아리스 리 아리안롯드라 합니다.”
그렇게 말문을 여는 아리스는.
어쩌면 서늘한 감이 엿보일 만큼이나 착 가라앉은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매체를 제외하고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황녀라는 존재를 마주한 라피스는.
문득 한 가지의 생각을 떠올렸다.
‘어쩐지.’
황녀 아리스의 첫 인상이란, 어쩐지 놀랍도록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자연히, 라피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유성이랑 느낌이나 눈매가 비슷한 것도 같은….’
물론 착각일 테지만, 왠지 모르게도 라피스는 황녀에게서부터 그러한 첫 인상을 감지했다.
그녀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옆에 함께 있던 유성에게로 향하려던 찰나.
[우선.]
아리스 황녀의 쪽에서부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라피스는 작게 움찔하고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황녀는 주저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바로 황성으로 오실 수 있는지부터 여부를 물을 필요가 있겠군요.]
“지, 지금 말입니까?”
연합의 수장이라는 황제의 유일한 핏줄을 마주한 라피스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긴장을 했다는 것은, 옆에 있던 유성조차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옆에서 돌아가던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던 유성은 생각했다.
‘긴장했군.’
본래라면 제아무리 황녀라 하더라도 명색이 후작가의 후계자를 상대로 이렇듯 막무가내식으로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라피스는 난데없는 이 상황조차도 부담스러웠던 탓인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황녀의 이어지는 요구조차도 다소 당황스럽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직 대외적인 후계 교육조차도 채 끝마치지 못했던 그녀다.
가문의 피를 이은 가족이라고는 오로지 대외적으로 전장을 반복하여 나서는 유리만이 유일했기에, 제대로 그 과정을 수립할 여유가 없었다.
본래 후계 교육이라는 것은 가문의 구성원이 대를 이어 직접 가르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의 통신조차도 행성 테라의 상황이 그다지 여의치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직, 간접적으로 어떤 식에서든 드라칸과 연관이 되어 있기에 보이는 행동인 것 같다는 소리였다.
황녀 아리스는, 입가에 실금같이 희미한 미소를 드리우고는 다시금 물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그, 그건.”
한 차례 주저함을 보인 라피스가 반사적으로 옆의 유성을 힐끔거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그 시선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던 그는.
끄덕.
짤막하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로지 라피스에게만 보일 수준으로.
‘유리 님도 진작에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겠지. 그게 지금같이 갑작스러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이미 마주할 순간이 예정되어 있었던 만큼, 구태여 미룰 필요는 없었다.
유성으로서도 아리스 황녀가 어째서 진작부터 그를 언급하고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경이 쓰여왔었으니까 말이다.
그러한 유성의 반응에 라피스 또한 마른침을 삼키고서는 화면 속의 상대를 응시했다.
“…아리스 황녀님. 요청하신 대로 금방 채비를 끝마치고서 지금 그곳으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아. 말을 조금 잘못했군요.]
“예?”
아리스 황녀.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띄운 채로, 이내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지금 제가 열어드리는 게이트를 타도 괜찮으신가에 대한 의중을 여쭙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가주이신 유리 후작님께 따로 전달받지는 못하신 듯하군요.]
“게이트 말입니까?”
그 난데없는 소리에 그들이 의문조차 가질 새도 없이.
쩌억.
공간이 마치 금이 가듯 벌어지더니 이내 알 수 없는 무기질로 빛나는 듯한 균열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
눈앞의 난데없는 광경에 당황한 유성과 라피스가, 그저 멍하니 게이트만을 응시하고 있을 때.
황녀 아리스는 여전한 미소를 드리우며 말문을 열었다.
[그것을 타고서 넘어오시면 됩니다. 가주분들께서도 모두 그러한 방식을 취하셨으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 *
탁.
유성과 라피스가 그들의 앞에 열려진 균열, 게이트를 타고 넘어섰을 때.
그들이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다른 공간의 광경이었다.
“잘 와주셨습니다.”
찬란한 금빛을 발하는 공동의 중심에, 그녀는 서 있었다.
황녀 아리스는 고개를 한 차례 숙인 채로 말문을 열었다.
“무례한 요청이었는데도 이렇게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라피스 소위. 그리고 유성 생도.”
그녀는 뒤편에 선 기사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라피스 소위를 안내해주시길.”
“알겠습니다.”
기사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피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라피스 소위.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예, 예? 지금 어디로 가시려는-.”
하지만 그러한 라피스의 물음에도 황녀는 그저 방긋 웃어 보이고는 흘려넘길 뿐이었다.
“가보시면 금방 알게 되실 겁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이번에는 유성을 보면서 손짓했다.
“유성 생도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 * *
저벅. 저벅.
주욱 이어진 기나긴 복도를 걸어가는 둘의 사이로는 어떠한 말조차도 없었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황녀 아리스는 입을 열지 않았고, 반대로 유성 또한 구태여 구실이 있는 게 아니라면 대화를 이어나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침묵 속의 행렬은 그토록 계속해서 이어질 듯해 보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유성이라 할지라도 먼저 입을 열 수밖에는 없었다.
“언제까지 아닌 척 하고 있을 거냐.”
“뭐가 말입니까?”
태연히 되묻는 그녀, 아리스 황녀를 향해.
유성은 착 가라앉은 눈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어느 새부터인가 푸른 빛을 발하며 서늘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장난질은 그쯤 해둬라, 알파. 제아무리 모습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날 속여넘길 리는 없을 테니까.”
우뚝.
흡사 으르렁거리기라도 하는 듯한 유성의 말에.
아리스 황녀. 아니, 알파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후, 하고 짧은 웃음을 흘린 그녀가 되물었다.
“역시나, 이시혁 대장답군요. 대체 언제부터 아신 겁니까?”
“처음부터. 그런 식의 게이트를 여는 건 너밖에 없다. 아주 대놓고 알려주고 있으니, 내가 모를 수가 없는 노릇이지.”
그리고는 덧붙였다.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로군.”
“뭐가 말입니까?”
“사백 년도 더 전의 인물이, 무슨 수로 황녀의 가죽을 뒤집어쓴 거냐.”
그 말에, 알파는 천천히 그를 돌아보더니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켜 보였다.
그녀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아니, 어쩌면 다섯 각성자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비밀을 거론하며 웃었다.
“처음부터 연합의 구심점이라는 황족은, 모두 저 ‘개인’을 의미한 겁니다.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