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레드 피닉스의 둥지(3)
쿠오오오오.
빛을 빨아들이는 암흑의 공간을 유영하듯 나아가는 푸른 빛줄기가 하나 있다.
[■, ■■]
저 멀리 푸른빛이 화려한 하나의 행성이 보였다. 놈이 오로지 이 어둠의 세계를 나아가는 것도,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발견한 녀석의 안광이 잠시나마 번득였다.
이곳에 오기까지 놈의 의식은 몇 번이고 멈추고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 의식은 짧고 드문드문 끊겨왔다. 마치 바람결에 휘날리는 흐릿한 촛불과도 같이 당장에라도 꺼질 듯이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착각 따위가 아닐 터. 실제로 녀석은 생명을 억지로 손에 쥔 채 놓지 않고 있었으니까.
검은색 바탕의 갑각질에 군데군데 흰색이 뒤섞인 드라칸.
제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맞지 않는 다른 존재의 육체 일부를 마치 누더기를 깁듯 억지로 엮어내어 수복한 그 개체는 이 우주를 가로지르는 비행조차 다소 위태로운 듯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녀석의 날개는 이미 과거의 광채와 능력을 대부분 잃었다. 찢겨나간 날개가 예전과 같이 완벽한 제 구실을 하기란 요원한 일이었으니.
흑백의 색이 뒤섞인 녀석의 이름은, 일명 다크 레이븐(Dark raven).
상위체 등급의 특수 개체로서, 새로운 여왕체의 알을 지킴과 동시에 한때 유성과 함선 메티스를 위협했던 개체였다.
번쩍.
다크 레이븐의 안광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마치 귀기가 들린 듯 섬뜩한 푸른 안광과 함께, 이 시커먼 우주를 지나쳐 가는 녀석의 앞으로 다수의 무언가가 모여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바로 전함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고오오-!
그것들의 주포에 가공할 에너지 입자가 빛과 함께 모여들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바로 자신, 다크 레이븐의 앞을 가로막으려 하는 것이었다. 이 이상 놈이 저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
그에 녀석은 광포한 포효를 내질렀다.
놈의 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자신을 가로막는 저 커다란 쇳덩어리들의 군체를 향해 불쾌함과 노호성이 담긴 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비켜라!
녀석은 분명 그리 외쳤다.
싸울 의지도, 그럴 동기도 없었다. 그래야만 할 이유가 없다.
지금 다크 레이븐에게 있어 가장 우선되어야 할 문제는 바로 눈을 뜬 여왕체를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 다른 것들은 일절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대방은 너무도 간단히 그 의사를 무시했고, 그 결과-.
놈을 향한 공격이 가해졌다.
번-쩍!
강렬한 빛의 입자가 주포에서부터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놈을 노렸다.
우주를 잠시나마 밝힐 정도의 빛이 환하게 밝혀졌다. 압도적인 기세, 압도적인 포격.
하지만 그 흑백의 드라칸, 다크 레이븐은 그것을 가까스로 회피해내며 거친 이를 드러냈다.
감히!
그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싸우지 않으려 하였으나, 상대방이 놈을 자극했다. 그것만으로도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서 인식할 만한 충분한 동기는 되었다.
철컥.
다크 레이븐이 줄곧 푸른 불을 뿜어내며 추진 쓰러스터 역할을 하던 등 뒤편의 전용무장, 대검을 붙잡았다.
그리곤 인간들이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로 낮게 중얼거렸다.
[■■■■, ■■■■.]
그렇게나 싸우길 원한다면 그리 해주마.
싸우지 않으려 하였으나 네놈들이 자초했다. 그 대가는 명확하겠지.
키잉!
다크 레이븐의 대검에 실린 푸른 불꽃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놈의 의지가 날카로운 적대감을 띠며.
이내, 우주의 한 가운데에 또 하나의 전장이 생겨났다.
* * *
쿠오오오-.
두 명의 인영. 그들은 갑판의 위에 서 있었다.
그곳은 날카롭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 둘의 몸을 당장에라도 날려버릴 듯 강타하는 장소였다.
그들이 단단한 지면처럼 발을 디딘 장소는 드높은 상공을 날고 있는 전함 메타트론의 위였다.
바람은 엄청난 세기로 칼날처럼 저며왔으나, 둘의 표정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태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터였다. 왜냐하면 둘은 초인의 반열에 들어선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유성은 자신의 손에 들린 목검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 레버런스가 뭔지는 알려주시죠? 아마 행성격뢰관통창이라고 했던가요? 이름의 풀이부터가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그 말에 그의 상대편에 선 여성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라피스의 할머니이자 엘 바이어스 가문의 가주인 유리. 그녀는 손에 쥔 목검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그전에 일단 대련이나 해보지 않겠어?”
그 말에 유성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저는 유리 님과는 영 상성이 좋질 못해서 말입니다. 빌객스 녀석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오호. 대번에 그런 상관관계도 알아차리는 건가?”
그 말에 유성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모를 수가 없겠죠. 전 실제로 경험하기까지 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각성자들간에는 상성이라는 게 존재한다.
저마다의 성질과 성향, 그리고 태생적인 능력에 따른 우열과 같은 것 말이다.
‘일종의 가위바위보와 같은 거지.’
그것을 표현하자면 대충 이러하다.
기술은 능력을 이기고. 능력은 힘을 이긴다. 대신 힘은 기술을 이긴다.
대충 따지면 유성은 능력을 위주로 전투를 이어나가는 빌객스에게 유리하며.
빌객스는 다시 강건한 육체 능력을 위주로 모든 것을 깨부수는 유리에게 유리하며.
유리는 바로 그, 유성에게 유리하다는 소리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술과 기교만으로 적을 상대하는 유성은.
오로지 힘 하나만으로 모든 적을 깨부수는 성향을 가진 그녀에게만큼은 도저히 이기기가 어렵다는 논리였다.
그것이 바로 상성 간의 우열이 가진 효력이었다.
‘뭐, 어쨌든지 간에. 동급의 수준. 그리고 동급의 기량을 가진 상대들이라고 가정한다면 대충 그러한 식이라는 거지.’
물론, 현실이란 것은 결코 확신 못 할 불확실한 상황의 연속이기에 언제나 그런 논리가 절대적으로 작용할 수만은 없는 법이었지만 말이다.
단지 표현하자면 대충 그러하단 의미일 뿐이다.
둘의 목소리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뚫고서 분명하게 상대방에게 닿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터다. 둘의 지각 능력은 범인을 아득하게 초월한 수준이었으니까.
각성자의 반열에 들어선 그들의 능력은 오감 중의 무엇 하나 평범한 축에 속하지 않았다.
한낱 야생 동물에 비할 수준 따위는 진작에 넘어섰을 정도로 둘의 능력은 비범하였으니. 초인이라는 것은 그런 거다.
“뭐……. 좋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리해드리죠.”
유성은 안 될 것 없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유리가 피식 웃었다.
“호? 의외로 내빼진 않는구나. 신중한 너라면 한 번쯤 뺄 거라 생각했건만.”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저도 가능하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육체가 가진 기량을 높여두는 편이 좋기도 하고 말이죠.”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행성 테라의 전화(戰火)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일반인들 중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당장 인터넷에만 접속해 봐도 무너지기 시작한 도시의 명단이 한둘이 아니다.
‘인구 수백만이 살던 콜로니가 두 번이나 연속으로 붕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행성 테라에까지 그 여파가 미친 게 지금의 상황이다. 이런 마당에 여전히 싸움을 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쪽이 오히려 어리석은 거겠지.’
여기까지 온 마당에 유성이 전투를 회피한다는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좋지 않은 방향이었다.
물론 그가 인류애적인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한낱 도덕심 때문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이 시대에서 인류가 발을 붙일 공간은 날이 갈수록 비좁아질 터다.
싸울 동기는 단지 그뿐이었다.
고오오.
선명할 정도로 빛을 내뿜는 마력. 그것이 검에 서리는 모습에, 그녀 유리는 씩 웃어 보였다.
“초장부터 전력으로 나가진 않으마. 네가 제아무리 그 대단하다는 대전쟁 시절의 인간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서로 간에 마력을 쌓은 시간 차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
“감사하군요. 어차피 봐줄 거라면 한 십 분의 일, 그 정도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만.”
“오분의 일로 가마.”
“감사합……. 큭?!”
쾅!!
그 직후, 그녀는 푸른 탄환처럼 쏘아졌다.
농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녀는 정말로 ‘쏘아’ 졌다.
탕!
잔상이 남을 정도의 빠르기로 쏘아진 그녀가 지른 지르기에, 둘의 검이 서로 맞부딪혔다.
카가각!
서로 간의 마력이 맞부딪히며 세찬 불똥이 튀었다.
그럼에도 그 선공은 가벼웠다.
그 기세가 날카롭고, 제법 묵직하였으나 그들의 사이에서는 그리 받아내지 못할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진검도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피부를 경화시킬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었기에, 한낱 목검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하기란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타다당!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금세 둘의 접전은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유성과 유리.
그들의 안광이 푸른 들불처럼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하고, 도깨비불처럼 귀기를 흘렸다.
서로의 검이 화려한 궤적과 궤적을 이어나가며 맞부딪혔다.
치열한 접전이었다.
어느 쪽이 우세인지는 표정만 보고서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한쪽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평범했다.
대련을 이어나가던 와중.
유리의 쪽에서부터 먼저 입이 열렸다.
“역시 범상치 않은데? 지금의 공격은 양산체 드라칸도 일격에 꿰뚫을 수준이었는데 말이지.”
“초장부터 이 정도로 나오시면……. 큭! 곤란합니다만!”
역시나 버겁다.
육체파 능력자인 그녀의 육체는 솔직히 말해서 총탄조차 맨몸으로 헤쳐나갈 수준일 것이다.
어쩌면 타격조차도 받지 않을 정도로 강력할지도 모르지.
같은 각성자이며 같은 마나 사용자일지라도, 태생부터 다른 능력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두 각성자의 능력은 이렇게나 차이가 났다.
“후우.”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다잡으며, 유성이 입을 열었다.
“라피스와는 상당히 다르군요. 뒤가 없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 말에 유리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라피스도 나름대로 육체파기는 해. 물론, 날 따라오려면 앞으로 백여 년은 더 있어야겠지만! 합!”
쾅!
검과 검이 맞부딪혔는데, 들려오는 것은 마치 포탄이 터져 나오는 듯한 강렬한 굉음이었다.
유성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타고난 육체다.
이토록 강력한 육체를 가진 각성자는, 그가 있던 시절에도 흔치 않았다.
라피스가 유독 건강한 육체를 타고난 것은, 바로 그녀의 피를 이어받아서일 것이다.
‘역시 먼 미래 세대의 마나 사용자들은 이토록 뛰어나다는 건가?’
타고난 본질 자체가 우월함이 명백하다.
그녀는 무려 대전쟁의 시대로부터 300년이나 더 지난 이후의 뒷세대.
세대가 지날수록 능력이 발전한다는 마나 능력자 특성의 끝에, 마침내 태어난 이 시대 최고의 결과물.
탕!
힘껏, 그녀의 검을 튕겨내자 유리가 대번에 뒤쪽으로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마치 사자와 호랑이가 서로를 노려본 채 원을 그려가며 대치를 하듯.
둘은 서로 원을 그리며 눈앞의 상대를 응시하다, 이내 다시금 접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