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산발전(3)
지금 그들은 드라칸의 서식지 한복판에 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당장의 위협은 없을지라도, 그게 잠깐의 침묵일지 어떠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당장 하늘에서, 지상에서 드라칸들이 무더기로 달려든 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치프는 유성의 등을 두들겨댔다.
“이해해 달라고. 우리도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거니까. 지금이 아니라면 비가 내리는 걸 볼 수나 있겠어?”
“하긴. 비가 내리는 장소가 극히 드물기는 하죠.”
유성은 그것만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행성 테라는 분명 과거 지구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하게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분명 다른 행성인 이상 이곳의 환경과 장소를 이루는 법칙들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기 마련이었다.
이곳에는 물이 있고, 또한 바다가 존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결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행성 테라의 비가 내리는 몇몇 소수의 도시들은 아주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고는 한다.
지금 전함 메타트론이 지나가는 이 지대는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지대 중 하나였다.
사람들 중에는 평생 동안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유성이나 라피스 또한 그런 이들에 속했다.
“안녕, 대장!”
그때 뒤편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성은 진작부터 감지되는 마력의 감각만으로 그 상대를 눈치채고 있었으나, 치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곤 의문을 표했다.
“흠?”
그런 빌객스의 등장에, 치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여자는 뭐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하하. 날 모르는 인간도 다 있나. 이봐, 노인장. 나는 유성의……!”
그 말에 빌객스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대뜸 소개하려 하기에, 유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 녀석이 빌객스입니다. 알고 계시겠죠, 빌객스 리 아스타치오 말입니다.”
“아아. 예의 그 유명한 범죄자인가.”
예상외로 치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별달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게 놀라진 않으시는군요.”
그 말에 치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 일을 하다 보면 심심찮게 범죄자를 만나곤 하지. 가끔 해적들이 올라타기도 하고 말이야. 물론, 그걸 감안하고서도 각성자급의 범죄자를 만난 건 나도 태어나서 처음이지만.”
“그보다 치프.”
“음. 말해라, 유성.”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치프의 말에, 유성이 말했다.
“이 녀석이 타고 있던 기가스를 수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흠.”
그 말에 치프가 턱을 쓰다듬었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유성 네 부탁이라면야 나도 들어주고야 싶다만. 지금 그 말은 함장에게 허락받은 건가? 내가 아는 라프티리아 함장이라면 들어주지 않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
“그건 별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음?”
의문을 표하는 치프에게, 유성이 덧붙였다.
“지금 저희들에게는 이 녀석의 힘이 필요하니까요. 저와 라피스 단 둘만으로 연합의 기지에까지 이어질 전투를 버티긴 무리입니다.”
아직 연합의 중앙기지에 도달하려면 한참은 남은 상황이었다.
그러한 마당에, 그들의 전함 메타트론이 대지 곳곳에 열린 게이트를 지나쳐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마찰이 일어날 터였다.
일전에 그 거대한 상위체를 마주했던 때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설령.”
유성은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함장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셔도 이번에는 독단으로라도 절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상황이 그만큼 좋지 못하니까요.”
“하긴. 지금 상황에 누구 손을 가릴 처지가 아니긴 하지. 사람이 아니라 드라칸이라도 써먹을 수만 있다면 써먹어야 할 상황이니까.”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치프였으나, 그런 그도 이번만큼은 시원찮은지 되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빌객스를 태운다는 건 함장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텐데?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적이긴 하다만 그래도 그 빌객스라면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잖아?”
“어차피 지금도 이 녀석은 시한폭탄이기도 하죠. 하지만, 막을 이가 저 이외엔 누구도 없는 폭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누구 하나 빌객스를 제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힘은 실질적인 무력이다.
총과 폭탄이 무력의 전부였던, 과거의 시대는 지난 지가 오래였다.
마나라는 에너지가 드라칸과 함께 등장한 이래로 세상은 검 한 자루가 총과 폭탄보다도 더욱 강한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군대를 이긴다는 상상이 실현된 시대였다.
그리고 빌객스는.
빌객스 리 아스타치오라는 이름의 각성자는.
그러한 자들 중에서도 온 태양계 전체에 그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로 강력한 각성자였다.
제아무리 군의 인원이 탄 전함이라도 빌객스에겐 그저 크기만 큰 배 한 척에 불과했다.
하나의 전함만으로 그녀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소리나 다름없다.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빌객스는 내가 코흘리개였던 시절에 이미 온 세상에 이름을 알린 범죄자였지. 게다가 마나 사용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니까 이미 일백 살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많은 저 여자라면야.”
그 말만큼은 빌객스도 그리 듣기가 좋지 않았던지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 노인장. 너무 대놓고-.”
불만을 제기하려는 빌객스의 말을 도중에 잘라내며.
치프는 씩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노인장이라고 하는데 나도 좋게 말할 게 없지 않나? 하하하!”
“……쳇.”
빌객스도 혀를 찰 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크게 나서진 않았다.
당장 빌객스의 곁에는 유성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둘 사이에는 이곳에서 결코 말썽을 부리진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으니 말이다.
유성이 두 눈을 뚜렷이 뜬 채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니, 그의 본색을 아는 그녀는 제 성격을 드러내기가 힘들다.
제아무리 빌객스라 할지라도 그 ‘이시혁’을 눈앞에 두고서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음?”
그 순간이었다.
먼저 고개를 돌리는 빌객스를 시작으로.
유성과 치프가 차례로 격납고와 이어진 복도 방향을 돌아보았다.
“서둘러!”
타다닥!
복도 너머에서부터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다수의 군인들이 복도를 바쁘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복도를 뛰어가고 있는 군인들의 틈바구니로, 새하얀 가운을 걸친 몇몇 의무 담당 클래스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하나같이 다급한 기색이었다.
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료반? 저들이 왜 군인들과 함께 뛰어가는 거지?’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한 기류를 느낀 것은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복도를 한시바삐 뛰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던 치프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펜치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흠. 갑자기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돌아가는군. 분명 저 방향에는 함장실만이 있을 텐데 말이지.”
“함장실, 말입니까?”
“그래. 함장실. 물론 부함장실도 있기는 하지만 아스트라 부함장이 숙소에 들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 테니 지금 저곳에 있을 것은 오로지 라프티리아 함장뿐일-. 어이, 유성?”
치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성은 황급히 그들을 따라 뛰고 있었다.
빌객스와 치프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그 광경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함장실의 앞에서 유성이 마주한 것은.
의료반의 들것에 실려 이송되고 있는 라프티리아 함장이었다.
* * *
“…….”
통제실은 조용했다.
각 자리에 앉아있던 인원들 중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불과 수십 여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차게 내리쏟던 빗줄기에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후-.”
아스트라 부함장.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서부터 들끓는 듯한 감정이 일었으나, 그것은 찰나였다.
금세 감정을 차단한 그가 말문을 열었다.
“당분간은, 함장 대리인인 나 아스트라 부함장이 이 자리를 맡게 되었다.”
아스트라 부함장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혼란한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가는 알고 있겠지. 우리들의 당장의 목적은 강하지점에서부터 틀어져 도착하지 못하게 된 연합의 중앙으로 향하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드라칸의 활동이 활발한 장소를 건너고 있다.
이미 이곳에서 돌아다니는 드라칸들의 모습은 심심찮게 목격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대로 아무런 마찰도 없이 지나가면 좋겠지만, 그리 쉽게만 풀릴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당장 그들은 이미 상위체마저 마주한 상황이다.
놈이 불과 한 달 만에 이곳에서 자라난 놈인지, 그게 아니라면 게이트를 통해 건너온 놈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상위체마저 튀어나온 마당에, 그보다 더한 상대가 언제 어느 때에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전함 메타트론이 결코 약한 전력은 아니나,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에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그렇기에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가능한 단시간 내에 연합의 중앙 기지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라프티리아 함장이 의식을 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각성자인 유성과 라피스 소위의 호위 아래에 어떻게든 살아서 합류해야만 했다.
아스트라 부함장은 입을 열었다.
“다행히, 연합에서 응답이 도착했다. 그리 머지않은 시점에 지원군을 보내주겠다는군.”
“오오, 정말입니까?”
대번에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에 동의하듯, 아스트라 부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가 향하는 방향인 이 앞 수백 킬로미터 너머의 지점. 그곳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곳까지만 살아서 도착할 수 있다면, 그다음은 수월해질 터였다.
* * *
“하아. 지쳤어.”
라피스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녀는 끈적거리는 에너지 바를 우적거리며 씹었다.
이 질척이는 초콜릿의 향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에너지 바에는 필수적인 모든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었다.
칼로리도 상당한 수준이기에, 전장에서는 거의 필수적인 식량이었다.
‘이제는 이것도 물리네.’
라피스는 제 손에 들린 에너지 바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슬슬 질려가는 참이었다.
맛이야 있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일 때의 일이었다.
삼시 세끼, 심지어 전투 직후에 잠시간 휴식하는 에너지의 보충 시간에마저도 에너지를 씹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라피스는 오늘 하루에만 벌써 스무 개에 달하는 에너지 바를 씹어야 했다.
가뜩이나 그녀는 가문에서도 곱게 자라온 후계자였기에, 그러한 경향은 더더욱 심했다.
오히려 이때까지 참아온 게 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상태의 라피스의 옆에서 식사하던 유성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그러니 나처럼 식사를 하지 그래?”
“…….”
라피스는 그 말에 마치 괴랄한 존재라도 보는 듯 유성을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유성. 제발 고기 좀 적당히 먹어. 아무리 그래도 그거만 먹는 건 좀 너무하잖아?”
“흠. 그런가?”
유성은 대답하면서도 힐끗 제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그가 보아도 조금 너무하긴 했다.
식판에 산처럼 쌓여있는 것은 문자 그대로 고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