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빌객스(3)
오싹.
유성은 등줄기를 스치듯 지나가는 한기에.
표정이 빠르게 굳기 시작했다.
[해당 기체의 등록 파일럿, 87시간 전, 사망으로 확인됨.]
‘사망? 사망이라고?’
딱딱하게 굳은 유성의 눈이, 전방의 상대방에게로 향했다.
고오오-.
흑연을 내뿜으며 유성이 탑승한 제로 브레이커를 응시하는 기가스 EF-04.
그렇다면, 지금 저 기체의 조종석에 탑승한 것은.
비등록자라는 말이 된다.
‘대체 누구란 거지? 기체의 원주인이 죽었다면, 지금 저기에 탑승한 자는?’
그때였다.
삐익-!
새된 소음이 흘러나오고,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내용이란.
[경고! 눈앞의 기체는 도난된 기체로 판명되었습니다!]
[위험! 위험! 지금 즉시, 빠르게 자리를 이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심상치 않다.
뭔가 돌아가는 상황이 불길하다.
저 눈앞의 상대, 모르긴 몰라도 결코 정상적인 파일럿은 아니었다.
하물며 평범한 파일럿도 아니었다.
비록 유성이 치명상을 입혔다곤 한들, 무려 상위체 드라칸을 단 일격에 쓰러뜨린 터무니없는 강자였다.
상상도 못한 상황들의 연속에.
유성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 * *
고오오-.
흑연을 내뿜으며 유성의 제로 브레이커를 응시하는 기가스 EF-04.
그리고 그 상대를 노려보는 유성에게 아스트라 부함장의 통신이 들려왔다.
“……유성 군. 즉각 퇴각하도록.”
“퇴각?”
그 말에 유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퇴각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대뜸 설명조차 없이 퇴각? 퇴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그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스트라 부함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유성! 지금의 태세 그대로, 조심스럽게 자리를 물러서라! 놈을 자극하지 마!]
“알겠습니다.”
통신 채널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다급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아스트라 부함장이 저렇게까지 흥분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유성은 즉각 그의 말을 수용하고 라피스에게 지시했다.
“라피스, 부함장님의 말씀대로 놈을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러선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
“움직여.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아스트라 부함장이 명령한 사실이다.
이제껏 그가 그토록 흥분한 음성으로 소리치는 것은 유성조차 처음 보았다.
아스트라 부함장은 유성의 실력을 몇 번이고 봐왔다.
그런 그가, 허튼 소리를 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나 위험한 상대가 저 기가스의 조종석에 타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알았어.]
상황이 심상찮음을 인지하고 있는 라피스 또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
고오오-.
그동안에도, 누가 조종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체불명의 기가스는 일체의 행동조차 없었다.
그저 연기처럼 스멀거리는 흑연에 감싸진 채, 유성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내뿜는 시커먼 암흑빛의 안광조차 섬뜩하다.
유성은 놈에게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의 빛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의 색감조차 비정상적이로군. 푸른색이 아니라, 완전한 흑색이라니.’
저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마나 생명체인 드라칸들 중에서도, 푸른빛을 띠지 않은 것들은 드물었다.
하물며 인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쿠아아아!
유성이 탑승한 기체 제로 브레이커의 네 장의 날개 쓰러스터에서는 푸른 불꽃이 분사되고 있었다.
그는 가능한 놈에게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전함 메타트론을 향해 천천히 물러서는 중이었다.
‘녀석과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선 놈을 자극할 필요가 없어.’
놈을 자극해서 유성이 득 볼 것은 없다.
녀석과 쓸데없이 싸워서 마주할 것은 철저한 손해뿐이다.
이미 지상의 상황은 모두 정리되었다.
라피스가 탄 스크래퍼의 화력은 강력했고, 그것은 지상에 있던 드라칸들을 모두 쓸어 버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오로지 그들만이 수백 미터 위의 상공에서 서로를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유성과 라피스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러섰다.
놈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적의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를 내보이는 듯 말이다.
기잉-!
하지만 돌연, 조금도 움직임 없던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파일럿이 타고 있을 기가스 EF-04의 고개가, 정확하게 물러서는 유성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유성은 직감했다.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기세.
이제까지 미동도 없었던 녀석에게서부터, 소름 끼칠 만큼 강대한 마력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 직후 유성이 반사적으로 대검을 휘두른 것은, 그야말로 동물적인 육감과 본능에서부터 기인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쩡-!
잔뜩 커진 동공을 한 유성이 분명 아무것도 없었을 정면을 향해 전력으로 대검을 휘두른 순간.
그의 눈앞에 흑연을 내뿜는 기가스, EF-04가 있었다.
그의 대검과, 놈의 초진동검이 서로 맞붙었다.
카가각!
서로의 검날에서부터 뿜어진 푸른 마력 입자가 마찰하며 불똥처럼 튀었다.
“이 자식.”
놈과 대치한 상태 그대로, 유성이 푸른 안광을 빛냈다.
녀석은 순식간에 먼 거리를 도약했다.
기가스의 성능으로는 결코 설명 못 할,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녀석은 눈 깜짝할 사이에 먼 거리를 좁혀 그에게 달려들었다.
기가스의 속도가 빨랐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놈은 공간을 ‘건너뛰었다’.
그 먼 거리를, 도약해서, 한순간에, 거리를 좁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간단했다.
놈이, ‘이능’를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유성!]
그 찰나의 사이에 대치를 하게 된 유성의 모습에 놀란 라피스가 소리쳤다.
그녀의 스크래퍼가 움직이려 했다.
그 낌새를 알아챈 유성이 다급히 소리쳤다.
“물러나, 라피스!”
[하, 하지만!]
“이놈은 네가 상대할 녀석이 아냐!”
단 일 검이다.
단 일 검을 마주한 것만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보통 놈이 아니었다.
지금 유성의 눈앞에 있는 상대는, 절대로 그보다 아래에 속한 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도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이 자식, 각성자다……!’
물러서는 유성의 제로 브레이커를 향해, 놈은 흑색의 마력을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쩌저정-!
정신이 없었다.
리브의 마력 보조를 받으며 압도적인 출력으로 상대하고 있음에도, 녀석은 접전을 시작한 이래로 줄곧 유성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검세였다.
“큭, 이 자식이!”
교전에 정신이 없는 유성의 통신 채널을 통해서, 아스트라 부함장이 통신을 보내 왔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말해 주겠네. 지금 자네가 상대하는 저놈, 파일럿을 죽이고 기체를 탈취한 범죄자야!]
“크윽! 범죄자란 말씀입니까?!”
[이 근방에 감옥이라면 하나뿐이지. 놈은 대감옥 심연에 수감되어 있던 범죄자다.]
그 말에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놈은 심연에서부터 탈옥한 수감자일 터다.
물론 심연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이 태양계의 전 인류가 아는 사실이었다.
빛조차도 빨아들일 만큼 강력한 중력장에 의해 지배받는 대감옥에서 탈옥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그 현실이 지금 유성의 눈앞에 있었다.
그곳에서 탈주한 수감자라면,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놀라지 말게. 지금 자네 앞에 있는 그놈의 정체는, 바로 빌객스야.]
우뚝.
지금 그 말에는 유성조차도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되물었다.
“빌객스? 설마 빌객스 리 아스타치오, 그 연쇄 살인마를 말하는 겁니까?”
[자네 생각이 맞네. 그놈이 확실해. 저 흑연을 내뿜는 것도 그렇고, 대감옥의 간수들이 지금 증명해오고 있어. 그놈이 저 기가스에 탄 게 확실해!]
“이, 빌어먹을!”
유성은 대놓고 욕설을 내뱉었다.
심상치 않다, 평범하지 않다는 상대인 것은 직감했지만 설마 그 빌객스일 줄은 정말로 꿈에도 몰랐다.
하기야 저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구세대 기체인 EF-04로 신기체인 제로 브레이커의 성능을 따라올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기는 했다.
기체 EF-04는 무려 이백 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기가스였다.
그것도 무려 완전체 드라칸의 신체를 부품으로 사용한 제로 브레이커의 성능을 따라온다?
그렇다면 분명하다.
적어도 그 상대방의 정체가, 보통 괴물은 아닌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건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어쩔 수 없다.
놈과 별다른 마찰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그렇다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이 상황을 끝낼 수밖에.
“하아.”
유성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정신을 집중한 채로, 제로 브레이커의 핵에 머무르고 있는 리브에게 사념을 전달했다.
‘리브.’
[말해, 아빠.]
‘이때까지는 조금 자제해 왔지만.’
[응?]
의문을 표하는 리브를 향해.
유성은 말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이제부터는 정말로 전력을 다할 거야. 부담이 될 수도 있어. 감당할 수 있겠어?’
[물론이야! 얼마든지 맡겨만 줘!]
자신만만한 대답이다.
그리고 그 대답과 함께, 유성은-.
리브에게서부터 흘러나오는 대량의 마력을, 있는 대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치 양분을 빼앗는 탐식의 식물과도 같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제로 브레이커의 기세가 돌변하기 시작한다.
네 장의 날개 쓰러스터에서부터, 터질 듯한 기세의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압도적인 출력의 변화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기가스, EF-04의 조종석 내부에서는-.
[하하! 확실해! 확실하다고, 역시 이곳에 있었잖아?!]
기쁨에 겨운 듯, 빌객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동공에서부터 흘러나온 칠흑의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본격적으로 기세를 피워 올리기 시작하는 유성의 모습에.
대답이라도 하듯, 기가스 EF-04의 안광 또한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 * *
유성과 빌객스.
그리고 그들이 탑승한 기가스 제로 브레이커와 EF-04.
그들이 서로를 향해 검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 자식?’
유성은 직감했다.
싸우면 싸울수록 알 수 있었다.
익숙하다.
이 전투 방식. 이 엉성하고 무차별적인 듯하면서도 그 내면에 내재된 체계적인 호흡 방식.
뚜렷한 형(形)이 존재하는 전투 기류였다.
이것은 분명 익숙한 것들, 유성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다.
유성은 놈을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확신에 확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확실하다. 빌객스, 이 자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방식의 전투를 하고 있어. 이제 다음으로, 녀석은 분명 지르기를 날리겠지.’
그러한 유성의 예감처럼, 곧 놈은 날렵한 움직임과 함께 정면에서 지르기를 날렸다.
마치 송곳과도 같이 예리한 기세의 지르기였다.
그다음도, 그다음도.
모든 것이 유성의 기억 속에서 이어지는 전투 방식과도 흡사했다.
놈은 그의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말도 안 되지만. 믿기 어렵지만. 지금, 이 녀석은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