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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사탄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마기만을 흘려보내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직접 승한과 가까이서 부딪히려 했다.
검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사탄이 방금처럼 승한을 노린다면, 분명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방금 전처럼 다가오지 못하게끔 마기만을 이용해 공격한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승한은 사탄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이기도 했다.
마기와 함께 덮쳐오는 사탄의 공격을 함께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접근전으로 부딪히더라도 사탄이 방금처럼 승한이 만들어낸 환영에 속지 않는다면 그를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더군다나…….
‘점점 싸움에 익숙해지고 있는 건가?’
마기를 다루는 수준이나 마기 속에 함께 섞여들어 기습을 하는 것들은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처음만 하더라도 승한이 만들어낸 환영에 속고, 마기를 다루는 것도 피하기 쉬울 만큼 어수룩하게 다루더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아니면… 처음엔 날 가지고 놀았던 건가?’
어쩌면 승한에게 상처를 입고 난 뒤, 이제야 진지해졌다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애초에 승한이 사탄에게 공격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방심 덕분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이건 기회다.’
사탄은 승한을 서둘러 죽이기 위해 그와 가까이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공격을 먹일 수 있는 기회는 있는 셈이었다.
없던 지푸라기라도 생긴 셈이니, 그것이라도 부여잡아야 한다. 승한은 사탄의 마기에 소멸되어버린 방패를 대신해 듀란달을 양 손으로 잡았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끝이야. 알았지?’
아롤의 경고에 승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모를까. 그나마 방패를 버려서 방금 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 다시 그런 요행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촤악, 촥-!
다시금 마기의 무리가 승한을 향해 덮쳐왔다. 승한은 모든 신경을 사방으로 분산시키며 마기를 피해냈다. 조금이라도 닿지 않도록, 극도로 감각을 끌어올려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어디지?’
사탄은 보이지 않았다. 검보라 빛의 마기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 사탄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전후좌우위아래 모든 방위를 신경써야한다. 감각을 벼리고 벼려 극도로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승한의 존재는 금방 소멸될 것이다.
‘……지금!’
승한은 눈을 부릅뜨며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승한의 뒤를 덮쳐오던 마기의 무리에서 사탄의 모습이 나타났다.
쐐애애애액-!
몸을 뒤로 돌린 승한의 검이 사탄의 머리를 찔러갔다. 승한은 애초에 사탄의 마기가 모두 그의 영역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닿는 어디라도 갈 수 있었고, 그것을 파악한 승한에게 위치를 들킨 것이다.
검이 닿으려는 순간, 승한은 승리를 직감했다. 이대로 머리를 꿰뚫게 되면 최소한 치명상 정도는 입힐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성화와 [올림포스]의 힘을 가득 머금고 있던 듀란달이 사탄의 머리를 꿰뚫으려는 순간이었다.
카가가가각-.
“……이런.”
승한의 검은 사탄의 머리에 닿지 못했다. 그의 검 끝은 원형으로 뭉쳐진 거대한 사탄의 마기 덩어리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성화의 힘이 사라지고, [올림포스]의 힘이 사라졌다. 급히 검을 빼내려 했지만 사탄의 마기는 듀란달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쩍-.
검이 갈라졌다. 몇 초가 넘는 시간, 꽤나 길게 버텼지만 아무리 듀란달이라 하더라도 사탄의 마기에 무한정 버텨낼 수는 없었다.
파사사사삭-.
듀란달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검끝에서 검신으로, 그리고 손잡이까지. 승한은 텅 비어버린 양 손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만 사라지거라.”
사탄의 손이 승한의 목을 향해 뻗어왔다.
**
눈앞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던 순간, 승한의 시야가 완전히 바뀌었다.
“어?”
사탄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사탄만이 아니었다. 그 주위에 있던 악마들과 거대한 균열의 모습까지, 한 눈에 보일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 자신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 승한은 그때서야 자신의 뒤편에 있는 해리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능력은 공간이동. 승한은 그때서야 해리슨이 자신을 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공간을 격하고 움직이는 그의 능력이라면 사탄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죽었구나 싶었던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닫자 몸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승한의 몸에 있던 힘들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강림]의 지속시간이 다한 건가?’
꽤 오래 싸웠다. 처음 악마들이 나타난 순간부터 힘을 사용했으니, [강림]의 지속시간이 끝났다 해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래 지속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승한의 눈은 어느새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남아있는 타임 포인트가 제법 되는 덕분에 다시금 [강림]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승한의 몸이었다.
‘오래는 못 싸우겠군.’
[강림]을 사용해 다른 신들의 힘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승한의 몸에 과부하를 가져왔다. 다섯 신들의 힘을 한꺼번에 받아들였다가 그 힘이 다시 사라진 지금, 승한은 몸이 이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기회는 이제… 한 번 정도인가?’
다시금 [강림]을 통해 방금과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한 번 정도. 시간으로 따지자면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다른 헌터들은요?”
“나름 분전하고 있습니다. 김윤재 헌터가 제 능력으로 승한씨를 도와달라고 해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켜보고 있었다고요?”
“로웬이라는 헌터의 능력입니다. 한 번 얼굴을 본 대상에 한해 언제 어디서든 그의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승한씨가 사탄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 싶어서 날아온 겁니다.”
해리슨은 멀리 사탄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암담하군요. 저런 녀석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신과 악마들이 그대로 소멸해 버리더군요.”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죠.”
사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한은 사탄을 향해 움직이며 말했다.
“아까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엄호 부탁드리겠습니다.”
“절 너무 믿지 마십시오. 아까도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만약 제가 조금만 반응이 느렸다면… 저나 승한씨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승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강림]을 사용했다. 연달아 [강림]을 사용하자, 승한의 몸속으로 다시금 신들의 힘이 들어왔다.
스스스스-.
승한의 몸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해리슨은 승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어느새 승한은 저 멀리 사탄이 있는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힘 내십시오.’
더 이상 해리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승한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밖에는.
**
사탄은 승한이 다시금 제 발로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옅게 미소를 지었다.
“도망칠 줄 알았는데, 대담하구나.”
“설마.”
승한은 등에 두 개의 성화의 날개를 만들었다. 다시금 [강림]을 통해 사라졌던 힘이 돌아온 상태였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 연달아 [강림]을 사용한 탓에 몸이 이전같지는 않았다.
“이제 그 대단하던 검도, 널 앞에서 지켜줄 방패도 없는데 괜찮겠느냐?”
소멸된 듀란달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탄의 마기는 절대적이었다. 평범한 검이라면 대체할 만한 장비를 구할 수 있을 테지만, 성검 듀란달은 아롤의 힘 그 자체였다.
그것이 사라진 이상, 승한의 힘은 이전보다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탄 역시 그것을 알고는 비웃음을 지은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한은 사탄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헌데, 그보다 약해진 지금은 상대를 해 보나 마나였다. 그 때문에 사탄은 승한이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다.
화륵-.
승한의 손에 성화가 맺혔다. 곧 그것은 매끈한 형체를 갖추더니 검의 형상으로 굳어졌다.
성화로 이루어진 검. 듀란달보다는 못하지만 그 어떤 보검보다 나았다. 승한은 성화의 검을 가볍게 한 번 휘둘러보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그 근성은 인정할 만하구나.”
스윽-.
사탄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승한은 다시금 그가 마기를 쏘아낼 것이라 생각하고는 성화의 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만 끝낼 때로다.”
쿠구구구구-.
승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몸을 강하게 짓누르는 중압감. 마치 [올림포스]의 힘을 직접 당해보는 것만 같았다.
‘이건…….’
승한은 주위를 둘러봤다. 옅게 깔린 마기는 승한을 비롯한 주위의 모든 공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치만 따지자면 [올림포스]와 비슷했지만, 그 힘의 크기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런 것도 가능했나?’
퍼석-.
승한의 몸을 두르고 있던 갑옷이 우그러졌다. 승한은 급히 갑옷에까지 [올림포스]의 힘을 둘렀다.
다행히 버틸 만은 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심상치 않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움직이기가 더 힘들어졌다는 거지만.’
더군다나 이런 공간 속에서는 승한 외에 다른 헌터들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즉, 만약 승한을 구하기 위해 해리슨이 이곳으로 오기가 힘들어 졌다는 뜻이었다.
마기가 스멀거리며 승한을 향해 다가왔다. 그물을 놓듯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마기를 보며 승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긋지긋하군.”
쿠구구구-.
승한은 사탄이 만들어낸 마기의 공간을 [올림포스]의 힘으로 짓눌렀다. 다행히 집약된 마기와는 달리, 넓게 퍼져있는 마기의 공간은 [올림포스]의 힘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성질의 힘이 겹쳐지자 승한의 몸을 짓누르던 마기의 공간이 약해졌다. 완전히 힘을 없앤 것은 아니더라도 이전보다는 한결 움직이기가 편안해졌다.
“재주가 제법이구나.”
자신이 만들어낸 마기의 공간을 승한이 약화시키자 사탄은 마기를 움직여 승한을 쫒았다. 승한은 사탄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마기를 피해 움직였다.
‘이 공간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든데…….’
마기로 이루어진 공간 자체를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승한의 움직임에는 계속해서 제약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힘은 둘째 치더라도 승한의 체력도 무한하지 않은 이상, 이런 공간에서 계속해서 움직이다가는 체력도 금방 바닥날 것이다.
‘대체 능력이 몇 가지나 되는 거지?’
‘애초에 사탄의 힘은 죽음과 관련된 것이니까요.’
붉은 천사의 말에 승한이 물었다.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니요?’
‘사탄이 가진 마기의 근본은 죽음이에요. 병, 노화, 고통, 소멸. 어떤 종류에서든 죽음에 이르게 하는 힘이죠.’
‘죽이기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형태든 변화가 가능하다는 겁니까?’
‘네. 그 중에서 사탄의 마기에 닿는 순간 소멸하는 건, 소멸이 바로 가장 완벽한 죽음에 가깝기 때문이에요. 영혼조차 남기지 않으니까요.’
승한은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공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승한을 짓눌러 죽이겠다는 사탄의 의지를 담은 형태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승한을 죽일 수 없었지만, 힘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날 죽이기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형태로든 능력이 변화한다는 말이지?’
골치 아픈 능력이었다. 죽이기 위한 방법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다니. 최초의 악마라더니, 딱 어울리는 능력이 아닌가 싶었다.
사탄의 모습이 어느순간 사라졌다. 다시금 마기 속으로 몸을 녹여든 모양이었다.
언제, 어디서 사탄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승한은 바짝 긴장한 채 주위를 살폈다. 이미 승한의 사방은 마기로 가득한 상태였고, 어디에서 사탄이 튀어나온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