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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뒤에 또 하나.’
승한은 자신을 노리고 나타난 두 마리의 악마를 각각 바라봤다. 거대한 호랑이 같은 모습의 악마와 이마에까지 세 개의 눈을 가진 거인 모습의 악마였다.
승한을 공격한 호랑이 모습의 악마는 그렇다 쳐도, 그 뒤편의 거인 악마는 느껴지는 힘이 심상치 않았다. 덩치 자체는 십여 미터 정도였지만, 승한은 녀석이 바알과 맞먹는 수준의 악마임을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사탄은 아니죠?’
‘그럴리가요.’
느껴지는 힘만으로 보면 거인 악마는 균열 속에서 나온 악마들 중에서도 최상위급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다.
“두 놈이라…….”
쩡-!
승한은 위로 들어 올린 방패를 휘둘러 발톱을 쳐냈다. 동시에 오른손에 들고 있던 듀란달을 크게 휘두르며 검격을 날려보냈다.
서억-.
촤아아아악-!
거대한 앞발이 베어나가며 피를 뿜었다. 악마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뒤로 물러났다. 승한은 바로 그를 쫒지 않고 손을 들어올렸다.
쿠구구구구구구-.
[올림포스]의 힘이 두 악마의 몸을 찍어 눌렀다. 호랑이 모습의 악마는 나름 버티려는 듯했지만, 허공에 있던 몸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역시… 넌 안 되나?”
승한은 거인 악마를 돌아봤다. [올림포스]의 힘을 강하게 증폭시켰지만, 거인 악마를 이것만으로 찍어 누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 역시 완전히 멀쩡하지는 않은 듯했다.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니군. 넌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넌 대체 뭐지?
거인 악마는 승한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것은 승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한 역시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해야할지, 인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글세, 그건 나도 몰라.”
-말장난인가?
“아니. 진짜야. 그보다 너, 나랑 잡담이나 하자고 온 건가?”
화악-!
쩌억-.
성화를 머금은 듀란달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거인의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가 베어져 나갔다.
-……!
거인 악마는 충격을 먹은 듯 세 개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간이 갈라지며, 함께 몸이 베어져 나간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공간을 다시 닫을 수 있을 정도의 권능이 있으니, 그 정도 재주야 역으로 공간을 닫아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한 번 베어진 공간을 승한은 금세 닫아버렸다. 또한, 그렇게 베어진 거인 악마의 몸은 베어진 채 그대로였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건 전혀 재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베어졌던 공간에는 성화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힘은 몸을 재생시키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놈…….
구구구구구구-.
거인 악마의 몸이 점점 더 크게 부풀었다. 그와 동시에 승한에게 당한 상처도 함께 작아졌다. 아니, 몸이 부풀어가면서 상처 부위가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는 것뿐이었다.
어깨로부터 시작해 허리까지 베어졌던 상처는 거인 악마의 몸이 수백 미터까지 불어나자 작은 상처 정도에 불과해졌다. 승한은 불어난 덩치의 악마를 보며 중얼거렸다.
“바알만큼 그렇게 강하진 않은데?”
스스스-.
승한의 몸이 거인 악마의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녀석 또한 느리지는 않았다. 승한이 어디로 움직인지를 알아차리고 금세 몸을 돌려 손을 뻗어온 것이다.
푸욱-.
“[증폭]은…….”
거대해진 듀란달이 악마의 손을 꿰뚫고,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듀란달이 박힌 이마의 눈은 초점이 사라졌다.
“힘만 늘려주는 게 아니더란말이지.”
촤악-.
듀란달이 뽑혀져 나오며 피분수가 튀었다. 검은 피가 아래로 떨어져 나가며 그 밑에서 싸우고 있던 다른 신과 악마에게 묻었다.
거대해진 듀란달은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증폭]의 힘은 단순히 힘만을 증폭시키는 게 아니었다. 어떤 사물의 크기를 더욱 크게 만들 수도 있었고, 압축시킬 수도 있었다. 능력이라기보다는 권능에 가까운 힘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두 마리의 악마를 처리하자, 승한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다섯 명의 신들의 영혼을 공유하게 된 승한은 여타 악마들을 우습게 볼 정도로 강해졌다.
거인 악마는 분명 강했다. 덩치 자체는 바알과 비견할 정도가 아니었지만, 가지고 있는 마기의 양은 분면 그와 비할 만했다. 충분히 고위 악마라 볼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승한은 녀석을 너무나도 손쉽게 상대했다. 아포피스 정도의 힘을 가진 악마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지만, 설사 아포피스가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승한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인간이었군.
-벨제뷔트가 죽었다라…….
악마들의 목소리가 승한의 귓가로 속삭였다. 승한은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몇몇 악마들이 승한에게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 중에서 사탄은 없었다. 오히려 방금 전 승한을 공격했던 악마들보다도 못한 녀석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급 악마처럼 약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벨제뷔트가 죽은 마당에, 우리가 이 녀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직접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이곳에 있는 인간은 이 녀석만이 아니지 않나?
악마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승한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승한은 그들이 무얼 하려는지 깨닫고는 서둘러 검을 들었다.
“어딜!”
촤악-!
승한은 주위로 몰려든 악마들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모여들어 있던 악마들은 애초에 승한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재빠르게 검격을 피하고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승한과 함께 에덴으로 온 헌터들이 있었다. 그들은 헌터들이 승한의 동료임을 알아차리고는 그들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야! 너 어딜 거는 거야!’
‘지금은 사탄을 먼저 찾아야 해요!’
듀란달을 통해 아롤의 목소리가, 성화를 통해 붉은 천사의 목소리가 전해져 들어왔다. 그 둘은 악마들과 헌터들을 무시한 채 사탄을 찾을 것을 외쳤다.
하지만 승한은 다른 헌터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무리 저들 악마들이 아포피스나 바알과 같은 악마들보다는 약하다지만 헌터들만으로 저들을 모두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당장 사탄을 찾는 게 급하다 해도, 승한은 그들을 그냥 마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곧 현실에서도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
헌터들을 공격하는 악마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악마들 중에서도 몇몇 하급 악마들 정도나 헌터들을 만만하게 보고 싸움을 걸었다. 고위 악마들의 경우, 다른 신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8스테이지를 통과한 헌터들은 하급 악마들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계에서도 수준 높은 헌터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서너명이 힘을 모으면 하급 악마 하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고위 악마들과 비교하자면 힘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고위 악마들의 힘은 하급 악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비슷한 힘을 가진 고위 신들 뿐이었다.
‘정말 이렇게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는 건가?’
윤재는 신들과 악마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다. 다른 헌터들 중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꽤 여럿 있었다. 정작 악마들과 싸우겠다고 나선 헌터는 승한뿐, 다른 헌터들은 악마들과 신들의 싸움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pathetic(한심하군).”
으득-.
이를 가는 헌터는 다름 아닌 루이즈였다. 그는 악마들의 힘에 기가 눌려 있다가 시간이 지나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모습에 혀를 찼다.
저벅-.
루이즈가 걸음을 옮겼다. 승한만큼은 아니지만, 승한을 제외하면 세계 제일의 헌터라고 할 수 있는 그였다. 하급 악마들 정도는 이제 혼자서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고, 그 이상의 악마들도 조금이지만 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한다. 그는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였고, 악마들이 무섭다고 해서 이렇게 가만히 숨어 있는 건 더더욱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어딜 가십니까?”
그 때, 윤재가 루이즈가 움직이려는 것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전음구를 통해 말한 것이기에 그 목소리는 루이즈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루이즈는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무시했다. 안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이즈는 윤재와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루이즈는 승한이 아닌 윤재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싸우실거면 저도 같이 하지요.”
윤재의 말에 루이즈가 걸음을 멈추고는 드디어 그를 돌아봤다. 악마들에게 겁먹어 얼어붙어 있는 다른 헌터들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자신 역시 방금 전까지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 있던 차였다. 그런데 윤재가 자신과 같은 선택을 내리려 하자 다소 놀라웠다.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몇몇 고위 악마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저희가 여기에 온 건 가만히 손가락이나 빨기 위함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
윤재의 말에 루이즈가 피식 웃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니, 조금이지만 계집애처럼 보고 있었던 윤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그저 승한의 옆에 붙어 있는 철 없는 헌터인 줄로만 알았는데.
“저, 저도…….”
“저도 싸우겠습니다.”
“어차피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니…….”
그 두 사람이 싸우려 하자, 곳곳에서 참고 있던 헌터들이 일어났다. 그들 역시 루이즈나 윤재처럼 무얼 해야할까 싶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두 사람이 행동하기 시작하자 여론이 일어난 것이다.
“굳이 그렇게 들뜰 필요 없을 것 같군.”
영어로 중얼거린 루이즈는 다른 이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헌터들의 시선이 루이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저건……!”
“준비해라.”
수십 마리의 악마들이 헌터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헌터들이 상대한 하급 악마들이 아닌, 더 수준이 높은 악마들이었다.
고위 악마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급 악마라고 부를 정도도 아니었다. 루이즈는 장갑을 낀 주먹을 말아 쥐며 위로 도약했다.
“공격하세요!”
윤재는 그렇게 소리치며 레드 드래곤을 소환했다. 이미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던 레드 드래곤이었지만, 윤재가 능력을 사용하자 그의 머리 위로 불길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그렇게 나타난 레드 드래곤은 이전까지 윤재가 부리던 레드 드래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윤재의 능력도 레벨이 그리 낮지는 않았지만, 윤재의 위로 나타난 레드 드래곤은 에덴에 있던 원래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골치 아픈 녀석들이랑 싸우려 하는군.
레드 드래곤은 헌터들에게 달려들고 있는 악마들을 아는 눈치였다. 입안 가득 불길을 머금은 레드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었다.
콰르르르르르-.
거대한 화염이 악마들을 덮쳤다. 하지만 그들은 각각 좌우로 갈라지며 그 불길을 피해냈다. 몇몇 악마들이 피해내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여 아래로 떨어졌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용족의 신인가? 누가 생각나는군.
-이봐, 네 반쪽을 죽일 기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