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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승한은 몸속으로 들어온 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인 힘에 깜짝 놀랐다. 붉은 천사와 아롤의 힘을 빌렸을 때에도 그랬지만, [강림]을 통해 [올림포스]의 힘을 온전하게 가져오자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 거였나?’
승한은 지금껏 [올림포스]라는 능력의 신이 누구일까 생각했다. 그곳에 있던 신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가 승한에게 하나의 능력을 주었을 수도 있고, 최고 신이라 할 수 있는 제우스가 힘의 주인일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 추측은 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한 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강림]을 사용한 지금, 승한은 [올림포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산 자체가 신이었다, 이런 건가?’
에덴에도 산은 있었다. 거대한 들판에는 산과 풀, 꽃, 구름과 같은 자연물들도 무수히 많았다.
사람과 신수들만이 신이 되는 게 아니었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모두가 신이 될 자격이 있었고, 올림포스 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단지 그곳에서 나고 자란 존재들에 불과했다.
그 힘의 성질은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지키고, 찍어 누르는 힘.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승한은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다음.’
승한은 두 번째 능력인 [귀신]과 세 번째 능력인 [증폭]을 떠올렸다. 이 두 가지 능력에 신이 있다면, [강림]을 사용했을 때 분명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귀찮게 결국 나까지 부르는 거냐?’
‘날 이제 부른 건 조금 실망스럽군.’
서로 상반되는 반응을 보이는 두 존재. 승한의 몸속으로 두 명의 신이 들어왔다.
있었다. [귀신]과 [증폭]에도 신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두 명의 신은 붉은 천사나 아롤과 같은 고위 신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올림포스와 같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의 능력은 애초에 승한이 가지고 있던 능력이었다. 승한의 능력 자체가 그들로부터 기인했던 것인 만큼, [강림]을 통해 승한은 그 능력의 힘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이끌어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생]은…….’
반응이 없었다. 다른 능력들과는 달리, [영생]은 정말로 신이 정해져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겠지.’
신이 없는 능력이라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헌터들이 가진 능력은 전부가 각각 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모두 어떤 신으로부터 받은 힘이었다.
[영생]이라는 능력 아니, 권능을 줄 수 있는 신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영생을 허락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에덴의 신이었다.
‘에덴의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여기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귀신]과 [증폭]에 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일이었다.
“좋아.”
우우우우우우웅-.
화르르르륵-.
승한의 주위로 성화의 힘이 가득 타올랐다. 이전에도 [증폭]을 통해 성화의 힘을 보다 강하게 만들었지만, 이제 그 정도가 훨씬 늘어났다.
듀란달에 성화의 힘이 응축되고, 그 속에서 불길이 타올랐다가 뭉치기를 반복했다. 승한은 듀란달에 성화를 가득 머금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승한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았다. 어느새 승한의 몸은 신과 악마들이 싸우는 곳을 향해 귀신처럼 흘러들고 있었다.
**
-저 녀석은 왜 안 싸우는 거지?
-글쎄. 우리와는 달리 고귀한 몸이시라 그런게 아닐까?
-큭큭. 악마가 다 같은 악마지, 제 놈이 신도 아니고 고귀하기는.
사탄은 움직이지 않았다. 악마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균열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만히 서서 신과 악마들의 싸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악마들은 그런 사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무리 그를 통해서 이곳에 올 수 있었다지만, 그 역시 자신들과 같은 악마였다. 에덴의 땅을 빼앗는데 함께 동의를 했다면 싸우긴 해야 할 것 아닌가?
-내버려 둬라. 저 녀석은 싸우면 안 돼.
-왜지?
-저 녀석이 죽는 순간, 우린 에덴에서 추방당할 테니까. 그것이 약속이다.
한 악마의 말에 다른 악마들은 사탄이 싸우지 않는 것에 수긍했다. 얼마나 오래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사탄을 깨워 이곳까지 오게 됐는데, 그 하나의 죽음으로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한다니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지도 그걸 아니까 움직이지 않는 건가봐.
-저 녀석이 싸우는 걸 보고 싶었는데, 아쉽긴 하네.
사탄에 대한 이야기는 무성하기만 할 뿐, 정작 그의 정체를 아는 악마는 드물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지 사탄의 존재가 있다면 에덴에 갈 수 있고, 악마인 자신들이 그곳에 머물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곳곳에서 사탄을 두고 속닥거리는 악마들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작게 말한다 한들, 그것을 듣지 못할 사탄이 아니었다. 에덴의 신처럼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사탄의 귀도 꽤나 멀리까지 열려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어라 속닥거리든 사탄은 창백한 얼굴과 흐릿한 초점으로 에덴을 둘러보고 있었다. 신과 악마들이 싸우건 말건,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는 머나먼 세월을 건너 다시 돌아온 자신의 고향에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여긴 변함이 없구나.”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십, 수백 년도 아니었다. 그런 시간조차도 찰나와도 느껴지게 할 만큼 길고 긴 세월을 그는 또렷한 의식을 가진 채 살아왔다.
다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에덴으로 돌아오기만을 갈망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에덴의 땅에서 그는 그곳의 주인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넓고 넓은 에덴의 땅을 둘러보던 중, 사탄의 시선이 한곳에 모여 있는 인간들에게로 향했다. 언뜻 보면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는 그들이 인간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저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것도 보통 인간들과는 달랐다. 사탄이 아는 인간들은 톡 건드리면 그대로 으스러지고 가루가 되어 사라질 만큼 약한 존재들이었다. 물론 그런 이들 중에서도 신의 자격을 갖추어 에덴에 속하게 된 자들도 있었지만, 저들은 그런 신이 아니었다.
보통 인간보다는 훨씬 강하지만, 신이 되지는 못한 어중간한 존재들. 그것이 바로 사탄이 바라보는 헌터들의 모습이었다.
사탄은 다른 악마들과는 달리 헌터라는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악마들은 사탄을 부활시키고자 하면서 괴물들을 보내며 헌터들과 싸워왔지만, 사탄은 이제 막 부활을 마친 직후.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특이한 인간들이군.”
인간은 인간이되,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 그것이 바로 사탄이 생각하는 헌터들이었다. 인간에게 별로 관심은 없었던 사탄이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에덴의 땅을 인간들의 발길로 더럽힐 순 없지.”
사탄은 손을 뻗었다. 주위에서 싸우고 있는 악마들이나 신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작고 매끄러운 손이었지만, 그 손은 에덴의 땅을 밟고 있는 헌터들을 모두 가렸다.
활짝 벌려진 손을 움켜쥐려던 순간.
“……저 녀석, 뭐지?”
사탄은 한 인간을 발견했다. 아니,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들 틈에 섞여있고, 인간처럼 보이지만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웠다.
물론, 신이 된 것은 육신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탈은 벗어났다고 볼 수 있었다. 인간이 신의 반열에 들었다는 것은 고위 신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인데, 저 인간은 그게 아니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사탄이 흥미를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델…….”
에덴의 신을 모시는 태초의 천사 중 하나.
붉은 천사 아델이 그 인간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델 외에도 다른 여러 신들의 영혼이 그와 하나가 되었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가능하다고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가능한 존재라면 하나 있었다.
‘당신의 작품입니까?’
사탄은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에덴의 땅을 밟아 더럽힌 인간들을 생각하던 그였지만, 어느새 그의 흥미가 다른 쪽으로 옮겨졌다. 인간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는 승한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 구경해 볼까?”
**
스스스스-.
승한은 악마들과 되도록 싸우지 않고 움직였다. 몇몇 하급 악마들을 죽여 보았지만, 어차피 타임 포인트는 획득할 수 없었다. 악마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모든 악마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건 쓸데없는 힘 낭비에 불과했다.
[강림]을 통해 [귀신]의 신을 몸에 접신한 승한은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하급 악마들 정도는 승한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몇몇 악마들이 승한의 존재를 눈치 채긴 했으나 다른 신들과 싸우느라 승한을 신경 쓰지는 못했다.
콰르르르릉-!
화악-!
하늘에서 뇌전이 떨어지고, 빛의 무리와 마기의 덩어리가 부딪혔다. 그 여파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뼈도 못 추릴 정도였다. 몇몇 하급 악마들이나 하급 신들은 고위 악마들과 고위 신들의 싸움에 휘말려 죽어버리기까지 했다.
물론, 승한은 예외였다. 승한은 [올림포스]의 힘으로 몸을 보호한 상태였다. 여파가 아니라 설사 고위 악마의 힘이 직접 승한을 공격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올림포스]의 힘이었다.
‘사탄은 어디에 있지?’
사실 찾고는 있지만 어느 악마가 사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워낙 생긴 모습이 다르고, 덩치가 크고 작고를 떠나 악마들의 가진 힘은 천차만별이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사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막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고, 다 비슷비슷한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탄이라면 제가 알아볼 수 있어요.’
그 때, 그런 승한의 고심을 알았는지 붉은 천사가 말했다. 썩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던 차에 그 말은 승한에게 담비와 같았다.
‘정말입니까?’
‘당신 말대로 전 에덴의 신을 보좌하는 몸이니까요. 그분에게서 나고 자란 사탄이라면 어떻게 생겼는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지요.’
‘그럼 사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까지는… 최소한 시야에 보이긴 해야 할 거예요. 저와 승한씨는 지금 시야를 공유하고 있으니까. 비슷한 기운이 너무 많이 퍼져있어서 당장 찾는 건 불가능해요.’
조금 김이 빠지긴 했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시야에 담을 수 있는 악마들이 한둘도 아니고, 거대한 균열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발견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
촤악-!
까앙-!
승한은 어디선가 느껴지던 한기에 급히 방패를 들어올렸다. [아포피스]의 힘으로 몸을 보호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공격이 날아오는데 뻔히 얻어맞을 수만은 없었다.
승한의 머리보다 두세 배는 더 큰 거대한 손톱이 승한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방패에 가로막혔지만,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막았네?
-그것 봐라. 내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