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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호계 체육관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운 좋게도 윤재가 금방 소식을 듣고 찾아왔고, 그의 능력 덕분에 호계 체육관 전체를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승한의 합류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나가들은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최소한 호계 체육관 근방에 나타난 나가들은 말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냐?”
나가들을 모두 정리한 윤재가 물었다. 그는 호계 체육관 주변으로 펼쳐놓았던 백염의 장막을 풀었다. 더 이상 근처엔 나가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어쨌든 악마들은 다 죽었으니 걱정 마요.”
“그래?”
“그보다 서둘러서 움직여야 돼요.”
“왜?”
“지금 공격받고 있는 대피소가 여기 한 군데가 아니에요. 지금 괴물들은… 헌터고 사람이고 가릴 것 없이 아니, 최대한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대피소를 중심으로 공격하고 있어요.”
승한은 안석환에게 들은 이야기를 윤재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윤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분별하게?”
“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가들도 더 많이 나타난 것 같고요.”
“대체 왜 이런 일이…….”
갑작스럽게 달라진 괴물들의 행동 패턴에 윤재가 패닉에 빠졌다. 이와 같은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괴물들을 모두 막아낼 수 있는 헌터들은 거의 없을 것이 뻔했다. 당장 헌터들의 수준이 높은 한국만 해도 힘에 벅찰 텐데, 그렇지 않은 다른 국가의 상황이야 뻔하게 눈에 그려졌다.
“……아포피스 때문일 거예요.”
“아포피스?”
“네.”
승한은 아포피스라는 악마가 나타났던 것과, [강림]을 두 번 사용해 아포피스를 쓰러뜨린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집트 신화의 나가는 달리 아포피스의 종속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나타난 괴물들이 아포피스가 만들어낸 녀석들이라면, 아포피스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아포피스의 목적이 사람들을 죽이는 거라고?”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일단 어서 움직이죠.”
“나도 같이?”
“전 죽이는 건 잘 해도, 지키는 건 잘 못해요. 함께 다니면서 형이 대피소를 지켜주고, 제가 괴물들을 정리할게요. 그게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에요.”
승한의 능력은 살상력이 강하지만 윤재와 같은 방어 능력은 부족했다. [올림포스]는 승한 개인을 지키는 힘이었지, 타인과 하나의 범위를 지키는 힘이 아니었다.
만약 승한이 [올림포스]의 힘으로 체육관 전체를 지키고자 한다면 금세 힘이 떨어져 버릴 것이다. 아무리 승한이 [영생]을 얻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 알았다.”
“그 전에…….”
쉬익-.
승한의 몸이 사라졌다. 그의 몸은 체육관 입구에서 승한과 윤재를 바라보고 있던 강동훈 소령의 앞에서 나타났다.
“소령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승한은 급한 마음에 인사를 생략하고 말했다. 강동훈 소령은 승한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깜짝 놀랐지만 이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무슨 부탁입니까?”
“혹시라도 괴물들이 다시 나타나면 이걸 가지고 저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다른 대피소도 걱정되긴 하지만… 이곳엔 저와 윤재형의 가족들이 있거든요.”
승한은 강동훈 소령에게 주머니에 있는 전음구를 건넸다. 몇 번 전음구를 사용해 본 적이 있었던 강동훈 소령은 그것을 손에 받아들었다.
가능하면 가족들을 한 번쯤 보고 가고 싶은 승한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면 다른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죽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지금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동훈 소령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론이고, 보통 사람들은 괴물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 밝혀진 바였다.
녀석들을 막을 수 있는 건 능력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승한은 자신들의 가족이 있는 이곳 대피소를 가장 먼저 우선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승한이 등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승한의 몸이 사라졌다. 강동훈 소령은 승한이 건네준 전음구를 한 손으로 꽉 쥐었다.
**
한국에 있는 대피소의 수는 수백 개에 달했다. 그 중에서 서울은 유독 많은 수의 사람들이 대피해 있는 대피소가 많았다.
승한과 윤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대피소의 수는 한계가 있었다. 승한은 일개 개인으로는 강했지만, 몸은 하나뿐이었다.
두 개의 대피소를 도왔을 때, 승한과 윤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처참한 구로구의 어느 대피소의 모습이었다.
“말도 안 돼…….”
“…….”
윤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노에 떨었고, 승한은 말을 잃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대피소의 모습은, 더 이상 대피소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벌써…….”
구로구의 대피소는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처음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부수어지고 불에 타들어가는 건물의 곳곳에는 사람들의 시체로 추정되는 핏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나가들은 대피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군인들이 대피소를 지키고 있었지만, 나가들 앞에서는 그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헌터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서울 지역에 있는 대피소의 수만 해도 수십 개에요. 헌터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모든 헌터들이 형이나 저처럼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면 대피소 하나를 지키는데만 해도 꽤나 많은 수의 헌터들이 필요하겠죠. 인력이 부족하다면… 도움을 받지 못하는 대피소도 생길 수밖에 없고요.”
서울에 있는 대피소의 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많았다. 물론 헌터들의 수도 함께 많았지만, 그들 중 절반 가까이는 지방으로 가 있는 상태였다.
결국 도움을 주지 못하는 대피소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헌터들은 지역 단위로 괴물들을 맡았지, 대피소의 수를 따져가며 괴물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지역 단위 방어 시스템의 결점이 지금 드러난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윤재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 나왔다.
반면, 승한은 그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이 아니었다. 상황은 그렇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머리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역시… 발악이었나?’
알고는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면,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렇게 움직인 까닭은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수고한다면 대피소 하나에 십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승한이 분신술이라도 배우지 않은 이상, 모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승한에게 주어진 능력은 그 정도였다.
“서둘러 움직이죠. 아직… 공격받고 있는 대피소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
승한의 말에 윤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레드 드래곤을 움직였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넋을 달래주고, 죽음을 애도하기에는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승한과 윤재는 다른 대피소로 움직였다. 최대한 가장 가까운 대피소로, 많은 수의 나가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 이후에 도착한 다섯 개의 대피소 중, 하나의 대피소가 같은 꼴을 당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피해는 더더욱 커졌다.
뿌드드득-.
처음에는 큰 화를 내지 않고 냉정하게 생각하려던 승한도 점차 울분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속이 쓰라렸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거지?”
한국의 상황이 이렇다면, 다른 국가의 상황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다. 나가들이 대피소를 공격하기 시작한지 아직 몇 시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동안 한국에서 죽은 사람들만 하더라도 수백만 명은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세계 인구의 오분지 일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동안, 승한이 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사탄…….”
승한은 이 일이 벌어지게 된 원흉에게 분노를 돌렸다. 이 세계 어딘가에 봉인되어있을, 악마들이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기 위한 동기가 된 존재. 녀석이 바로 원흉이었다.
그렇게 승한의 머리가 분노로 뜨겁게 달궈지던 때였다.
[스테이지 9.1]
달성 조건 : 사탄의 부활을 막아라. 사람들은 죽고,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의 감정들로 인해 사탄의 부활이 앞당겨지고, 곧 봉인이 깨어질 위기에 처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면 사탄의 봉인은 풀려날 것이다.
제한시간 : 24시간
남은시간 : 24시간
성공 : 최종 스테이지로의 이동.
실패 : 9.2스테이지로의 이동
“이건…….”
승한은 머릿속에 떠오른 메시지에 고개를 숙였다.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스테이지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스테이지의 내용은 불가능한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탄의 부활을 막으라고?’
어떻게 말인가? 승한의 몸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승한이 강하다고 한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나가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끝이 코앞까지 왔는데…….’
스테이지가 현실에서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0스테이지 정도가 끝일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질 스테이지의 내용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성공할 경우, 최종 스테이지로 이동하지만 반대로 실패하게 되면 9.2스테이지로 이동한다. 9.2스테이지의 내용이야 뻔했다. 사탄의 부활을 막지 못하게 되면, 사탄을 쓰러뜨려야 할 것이다.
‘가능할까?’
확신은 없었다. 아직까지 승한은 사탄이라는 존재를 직접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악마들이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부활시키려 할 정도로 강한 존재일 거라는 점이다.
‘불가능하더라도… 해야겠지.’
자신이 아니면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아포피스를 쓰러뜨렸던 만큼, 조금 자신은 있었다. 상대가 사탄 하나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스, 승한아?”
윤재 역시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스테이지의 내용에 당황한 눈치였다.
“다음 스테이지가… 최종 스테이지라는데?”
“그러네요.”
“그러네요? 그게 끝이야?”
“어차피… 불가능한 스테이지니까요.”
승한의 말에 윤재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당장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다음 스테이지에서 사탄을 쓰러뜨리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높아요. 사탄을 쓰러뜨리면… 다음으로 기다리는 게 최종 스테이지이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그래서? 이대로 손 놓고 있으려고?”
“아니요.”
그럴 리가 없었다. 사탄의 부활을 막는 건 불가능하지만, 자신이 움직이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을 구하면서 최대한 많은 괴물들을 잡고 타임 포인트를 획득해야지요. 사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
승한이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자, 윤재는 다시 힘을 얻었다. 그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아직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제 막바지였다. 길고 길었던 무대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