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206화 (20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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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더, 더!’

승한은 힘을 모았다. 어깨에 돋아나 있던 한 쌍의 성화의 날개가 녹아 사라지며 듀란달에 머금어졌다.

듀란달의 검신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거검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아포피스를 베었던 거검과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모든 힘을 듀란달의 검신 속에서 압축하고, 그 힘을 무한하게 증폭시켰다.

-이건… 좀 위험하군.

아포피스는 승한이 들고 있는 작은 검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힘에 몸을 웅크렸다. 기다랗게 뻗어있던 몸이 동그랗게 말려지며 그 주위를 진득한 마기가 감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한은 듀란달을 높게 치켜들어 내려칠 자세를 취했다. 일도양단. 승한의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벨 수 있어.’

아무리 아포피스가 베어진 공간을 강제로 이어 붙인다 해도, 이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공간을 가른다는 범주를 넘어, 세상을 가른다는 생각으로 내려칠 것이니까.

그리고 지금의 승한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화아아아아악-!

하나의 기다란 선으로 집중된 성화의 검격이 하늘과 바다를 이었다.

**

승한과 아포피스가 싸우는 모습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보였다. 아포피스의 덩치가 워낙 거대했고, 태양과 달이 뜨지 않아 세상이 어둠으로 깔려있는 와중에도 승한이 가진 성화의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기 때문이었다.

안석환과 해리슨, 안나는 승한과 아포피스가 싸우는 모습을 멀리서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승한의 모습은 시야로 보이기엔 너무 멀었지만, 몸체만 수십 키로에 달하는 아포피스의 모습은 아무리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렴풋이 보였던 것이다.

“요란하게도 싸우는군요.”

해리슨은 아포피스가 무언가를 향해 팔을 휘두르고, 포효를 내지르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바알과의 싸움에서도 느꼈지만 저런 악마를 상대로 다른 헌터들이 무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촤악-.

쿠르르르르릉-.

아포피스가 내지른 포효가 안석환과 해리슨, 안나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 속에 내포된 압박감에 세 사람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가까이 가기만 해도 저희는 치명적이겠군요. 그나저나 저게 이무기라니…….”

“이무기는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8스테이지에서 보았던 악마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세 사람은 아포피스와 승한의 싸움을 지켜보며 점점 더 승한과 자신들 간의 실감했다. 저런 존재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과 승한 사이에는 쉽사리 메우기 어려운 거리가 있었다.

‘그 말은, 승한씨가 패하면 우리도 끝이라는 거지만.’

과연 저런 악마를 상대할 수 있는 헌터가 현존하기는 할까? 안석환은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당장 8스테이지에 나타났던 바알만 하더라도 수만 명의 헌터들이 제대로 상처조차 입히기가 어려웠다. 헌데 지금 나타난 악마는 그 바알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승한이 패하게 된다면, 저 악마를 상대할 수 있는 헌터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돕고야 싶지만 그럴 능력도 되지 못한다.

안석환은 멀리서 손에 땀을 쥐고 승한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가끔씩 보이는 성화의 검격이 아포피스의 몸을 베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던 중, 안석환의 눈에 아포피스의 몸이 시커먼 마기로 둘러싸이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던 때였다.

“저, 저건…….”

안석환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아포피스의 몸을 두 개로 가르며 함께 하늘로 솟구치는 성화의 검격이 세상을 두 쪽으로 갈랐다.

**

아포피스의 거대한 몸체를 반으로 가르고도 승한이 날려보낸 검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성화의 흔적을 유지한 채, 그 자리를 흔적도 없이 지우고 있었다.

아포피스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승한의 검은 공간을 가른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참격. 그것은 하늘과 함께 아포피스를 베어냈다. 하나의 거대한 섬을 통째로 지워낼 수도 있는 힘을 얇고 얇은 검격의 형태로 압축하고, 그 힘을 또다시 증폭시켜 날려보낸 것이었다.

“후우우우-.”

거대한 한 방을 쏘아 보낸 승한은 잠시 긴장을 풀고 아포피스를 노려봤다. 아포피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쩌저저저적-.

촤아아아아악-.

곧이어 아포피스의 몸체가 반으로 베어져 좌우로 갈라져 아래로 떨어졌다. 갈라진 몸에서는 피가 비처럼 쏟아지고, 바다 위가 검붉게 물들었다.

그런데도 승한은 아포피스가 죽었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몸이 반쪽이 나고, 바다를 뒤덮을 만큼 많은 양의 피를 흘렸지만 상대는 아포피스였다.

‘설마 아직 안 죽었나?’

타임 포인트 획득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아포피스는 다른 괴물들이나 보스와는 별개로 취급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승한은 아포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행히도 아포피스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마기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방금 전 일격에 마기의 장막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화르르르르륵-.

아포피스의 몸에 황금색의 거대한 성화가 피어올랐다. 승한은 아포피스가 성화의 힘에 저항을 하지 않자 그때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흐흐흐흐흐. 크크크크크크.

낮게 깔리는 웃음소리에 승한이 음칫 놀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단순한 웃음소리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 웃음소리를 통해 승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포피스가 죽어가고 있음을. 힘을 잃고, 몸이 죽어간다. 영혼까지 태우지는 못했지만 아포피스는 가지고 있던 힘을 모두 잃었다. 이대로 가만히 둬도 아포피스는 다시 힘을 쓸 수 없었다.

-웃기는 일이군. 크크크. 본래의 몸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인간에게 죽는 일이 생길 줄이야.

허탈한 목소리였다. 성화에 온 몸이 타들어가던 중에도 아포피스는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었다. 물론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얼른 죽지?”

-내가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그래. 알지. 알고말고.”

아포피스는 분명 대단한 악마였다. 저 거대한 태양을 가릴 정도의 능력이 있었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본체가 아닌 몸을 가지고도 하나의 세상을 뒤집어 놓을 만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승한은 아포피스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의 최종 보스가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포피스가 직접 말로서 확인시켜주었다.

“사탄인가 하는 악마가 부활할 때까지, 또 다른 녀석이 나타나겠지.”

악마들의 목적은 사탄의 부활이었다. 머나먼 옛날, 승한의 세상에 봉인되었다 하는 악마인 사탄을 부활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니 그 목적을 이룰 때까지 저들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아포피스보다 더 강한 악마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악마들의 수가 많다고 해도 아포피스는 고위 신조차 가볍게 여기는 존재였다. 그런 아포피스보다 강한 악마라니, 상상이 되질 않았다.

-무언가 오해하고 있군.

“……오해라고?”

-아무래도 아는 게 전혀 없는 모양이구나. 이거 놀라워. 그 고명하신 천사께서, 자신을 도와 움직이는 순진한 인간을 속이고 있다는 것인가? 크하하하하하!

아포피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승한은 그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듣지 마세요. 한 귀로 흘려버려요.’

붉은 천사는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포피스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승한은 혼란을 느꼈다.

‘뭐가 진실입니까?’

‘승한씨. 절 믿으세요.’

불안했다. 승한은 아포피스를 빤히 바라봤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아포피스는 두 개의 눈만을 간신히 움직여 승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심한 인간아. 너는 모르고 있구나. 천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 천사가 너를 데리고 갈 곳이 에덴이라고 생각하느냐?

화르르르륵-.

아포피스의 몸에 다시금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승한이 사용한 힘이 아니었다. 성화의 원래 주인이었던 붉은 천사의 힘이었다. 승한을 통하지 않은 힘이라 그 위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다 죽어가는 아포피스의 입을 틀어막을 정도는 되었다.

‘승한씨. 듣지 마세요.’

붉은 천사는 거듭 승한에게 귀를 막을 것을 강조했다. 어차피 더 이상 아포피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한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뇌리에 깊숙이 남아있었다.

승한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쨌건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적은 아포피스였다. 아포피스는 이미 다 죽어가는 상태라 더 이상 말을 할 만한 상태도 아니었고, 물어본다 하더라도 자신을 죽인 승한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승한도 알고 있었다. 지금 아포피스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승한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고, 그 말이 분명 승한의 정신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죠.”

쐐애애애액-!

승한의 검이 횡으로 베어졌다. 그 순간, 남아있던 아포피스의 몸체가 깨끗하게 반으로 베어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콰과과과과과과-.

쏴아아아아-.

거대한 몸체가 떨어지며 태평양 한 가운데의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

[50000000타임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승한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타임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

5000만. 상상도 하지 못했던 포인트였다. 하긴, 아포피스 정도 되는 악마라면 이 정도 타임 포인트를 준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기대 이상이라고 해야 하나?’

수십의 악마들을 먹어치운 이무기. 그런 녀석의 몸을 통해 나타난 아포피스를 잡았다. 아직까지도 아포피스의 몸은 바다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씩, 천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몸을 보며 승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도 아포피스의 몸체는 이 바다 아래에 영원토록 잠들 것이다. 저만한 덩치의 시체를 에너지원이랍시고 꺼내올 수도 없을 테고, 단단한 아포피스의 몸을 절단할 만한 기술도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아포피스는 평생토록 이 아래 잠들 것이다.

‘다시 부활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언제고 아포피스가 다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승한은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 당장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아직 [강림]의 지속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굳이 [강림]이 아니더라도 승한은 이미 붉은 천사와 어느 때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붉은 천사는 승한의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다. 분명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말이다.

“……대화를 거부하는 겁니까?”

승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대화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아포피스의 말대로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승한씨!”

쉬이이익-.

그 때, 승한의 이름을 부르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승한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해리슨이었다.

“해리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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