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204화 (20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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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뿔은 악마의 상징이었다. 물론 괴물들 중에서도 뿔을 가진 존재는 있었다. 일전에 나타났던 마족들 역시도 악마들처럼 뿔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족들은 악마에 가장 가까운 종족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지만, 마물로 취급해야 할 이무기의 머리에 뿔이 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승한은 녀석의 머리에 뿔이 돋아난 의미를 금세 알 수 있었다.

‘악마가 된 건가?’

이무기는 악마들을 잡아먹었다. 하급이라고는 하지만 한둘도 아니고, 수십의 악마들을 씹어 먹고 그 힘을 흡수했다. 어쩌면 그들의 힘을 흡수함으로써 스스로 악마로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급 악마들 몇을 먹어치운 걸로 어떻게……?’

녀석은 승한의 공격을 버텨냈다. 그뿐만 아니라 반격을 하기까지 했다.

승한은 [강림]을 통해 붉은 천사의 힘을 완전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바알을 쓰러뜨렸을 때처럼 완전하게 힘을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강림]을 사용한 것만으로 어느 정도 방심을 하였고, 이무기를 얕잡아 보았기에 힘을 덜 사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이면에는 자신의 몸에 부담을 줄이기 위함도 있었다. 아포피스와의 싸움을 위해서 무리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붉은 천사의 힘은 신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꼽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잠깐만요, 승한씨.’

승한이 막 다음 공격을 감행하려던 때, 그의 머릿속에서 붉은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승한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화륵-.

승한의 옆으로 붉은 천사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녀는 승한의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아 그의 귓가에 말했다.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아요. 저 악마, 조금 이상해요.”

“이상하다니요?”

“제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군.

웅장한 목소리에 바다의 수면 위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무기의 입이 벌어지며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승한은 이무기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깜짝 놀랐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은 꽤나 익숙했다. 목소리나 말투, 그리고 자신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말까지. 승한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설마…….”

승한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아포피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곳인가? 너희들이 사는 세상이.

구구구구구구-.

거대한 몸체가 움직이자 거센 강풍이 불었다. 승한이 겨우 힘을 주어 바다를 갈랐다면, 녀석은 단지 움직이는 것만으로 바다를 반으로 가를 듯했다.

아포피스는 세상을 둘러봤다. 기다란 몸체를 위로 들어 올려 세상을 빙 둘러본 아포피스는 짧은 감상평을 말했다.

-아름다운 곳이군. 망가뜨리기 좋게.

“정말… 아포피스인가?”

-너희 인간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붉은 천사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아포피스는 승한의 어깨 위에 있는 붉은 천사의 의념에게 물었다.

-이렇게 마주보는 것, 오래간만이지 않나?

“……별로 반갑지는 않군요.”

붉은 천사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미 한 차례 아포피스와 만났던 그녀이지만, 다시 본다고 해서 결코 달갑지는 않았다. 아니, 가능하다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악마가 바로 아포피스였다.

-그렇겠지. 다시 만나는 날이 네 영생이 사라지는 날일 테니까. 하하하하하하하.

“태양신은 어떻게 됐지요?”

-그건 아까 대답해 주지 않았나?

“믿을 수 없어요. 그분은 당신에게…….”

-내가 혼자일 거라 생각하는군. 왜지?“

아포피스의 대답에 붉은 천사의 의념이 흔들렸다. 그녀는 아포피스가 혼자가 아니라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먹은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아포피스 외에 그와 동급의 존재가 하나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허세 부리기는.”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인간. 오래간만의 즐거운 해후를 방해하지 마라.

“되도 않는 거짓말로 기 죽일 생각 마라. 어차피 다른 놈이 있다고 해도, 그 녀석은 여기 오지 못해. 그렇잖아? 그래서 너도 네 몸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고.”

승한의 말에 아포피스의 기세가 거세졌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마기가 사방을 잠식했다. 공간조차 부식시키는 그 힘은 과연 고위 악마라 할만 했다.

하지만 승한은 성화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공격한 것이라면 모를까, 단순히 화가 나서 기세를 흘려 보내는 것만으로는 성화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승한을 어찌 하지는 못했다.

“신이든 악마든, 태초부터 정해진 약속이라는 형태의 제약을 벗어나지는 못해. 신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능력이라는 형태로 힘을 준 것도, 너희 악마들이 균열을 통해 나타나는 것도, 다른 세상에 정해진 이상의 해를 끼치거나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그 약속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위함이지. 너 같은 녀석이 이곳에 둘이나 나타난다고? 그건 약속 위반이지.”

승한은 아포피스의 거대한 눈을 또렷이 마주보며 물었다.

“그렇잖아? 네가 이무기를 통해서 이곳에 나타난 것도, 그 때문이겠지?”

신이든 악마든, 까닭 없이 다른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불가능했다. 지구의 신은 스테이지가 지나갈 때마다 더더욱 강한 괴물들을 보내는 것을 허락했지만, 아직까지 아포피스가 등장할 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이전에 하급 악마가 처음 나타났을 때, 하급 악마는 완전히 강림하기 위해서 검은 인영들을 천 마리 가까이 제물로 삼았다. 헌터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신들의 개입이 많아진 덕분에 하급 악마들이 제약 없이 넘어올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아포피스 정도 수준의 악마가 제약 없이 넘어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포피스는 이무기라는 존재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또한 하급 악마들로 하여금 이무기에게 자신의 몸을 희생해 힘을 주도록 만들었다.

아포피스는 뱀의 신이었다. 태양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뱀. 그것이 바로 아포피스의 정체였다.

아포피스는 자신과 비슷한 존재인 이무기의 몸을 제물로 해서 그의 몸에 강림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무기가 하급 악마들을 잡아먹은 이유였다.

-붉은 천사가 네놈의 몸을 빌려 강림하는 것을 보았다. 너희가 가능한 일을 내가 하지 못할 리 없지.

“고위 악마씩이나 된다는 녀석이 하는 짓이 결국 컨닝이냐? 잘 하는 짓이다.”

사아아아악-.

승한은 듀란달을 위로 들어올려 그대로 아래로 내리쳤다. 성화를 머금은 검격이 아포피스의 머리를 그대로 반으로 베어낼 듯이 뻗어갔다.

하지만 승한이 휘두른 검격은 아포피스에게 닿지 못했다. 검격의 힘은 흩어져 사라지고, 성화의 불길은 마기에 가로막혔다. 승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나?”

“아무래도 본신의 힘을 전부 가지고 나타난 모양이에요.”

“그런 녀석을 어떻게 이겨요? 저 녀석, 원래는 태양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녀석이잖아요.”

“그건 잘못 알려진 거예요. 아포피스가 태양을 집어삼킨다는 건 태양신의 대적 악마로서 그를 죽이고 일식을 일으키기 때문이지, 그 정도로 거대하다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보다는 더 크지만요.”

우드드드드득-.

“아, 정말 커지고 있네요.”

승한은 뼈마디를 뒤틀며 점점 더 거대해지고 있는 아포피스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무기는 악마들을 먹어치우며 점점 더 거대해졌지만, 아포피스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힘만으로도 덩치를 더욱 거대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이미 이무기를 통해서 완전히 현신한 아포피스였다. 붉은 천사의 말대로 녀석은 태양을 집어삼킬 정도는 거대하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무기의 모습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존재가 바로 그였다.

이무기의 몸은 그릇에 불과했다. 그것을 통해 현신을 마친 아포피스는 그것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릇 속에 자신의 힘을 완전하게 담아낸 이상, 그릇을 강제로 넓히는 정도는 아포피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태로는 이기기 힘들지요?”

“힘든 게 아니라, 불가능해요. 설령 단죄의 천사를 데리고 온다고 해도… 힘들 거예요.”

“왜요?”

“제가 단죄의 천사와 함께 아포피스를 봉인할 수 있었던 건, 그 당시 아포피스가 태양신을 물리치고 일식을 일으킨 상태였기 때문이었어요. 아포피스와 태양신은 불사로, 죽지 않고 영생하는 존재에요. 저와 단죄의 천사가 아포피스를 봉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를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놈의 태양신은 왜 매일 진답니까?”

승한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양신에게 불평을 늘어뜨렸다. 아포피스의 말대로 다른 악마가 함께 있었다고 한들, 태양신은 결국 아포피스에게 연속으로 두 번이나 패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사실… 승한씨가 다른 신의 힘을 빌려온다고 해도, 아포피스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없어요. 단지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그거 알아요?”

승한은 듀란달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확신인 언제나 없었어요.”

우우우우우우-.

승한의 검이 낮게 울었다. 듀란달의 새하얀 검신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졌다.

‘너무 늦었어.’

승한의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누구보다도 든든하고, 승한이 아는 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롤님.’

‘이번에도 날 안 불렀으면… 실망할 뻔했어.’

듀란달의 검신에 검은색의 무늬가 생겨났다. 새하얀 검신에 오밀조밀한 작은 글자가 새겨졌다. 생전 처음 보는 글자였지만, 승한은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롤랑의 노래.’

그것은 바로 아롤의 선조이자, 중세 유럽의 영웅이었던 롤랑이 나오는 서사시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더욱 작은 글씨로 아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게… 듀란달의 본래 모습인가?’

[50000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강림’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아롤’의 힘과 영혼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듀란달의 검신을 검은 글자가 가득 감쌌다. 조금씩 변화하던 듀란달의 모습이 완전하게 변했다.

그리고 또한, 아롤의 힘과 영혼이 승한의 몸을 감싸안았다. 잠시 눈을 감았던 승한의 두 눈꺼풀이 들어올려지며 각각 다른 색의 눈동자를 드러냈다.

황금색의 눈과, 새까만 검은 눈동자.

승한의 두 눈에는 각각 다른 힘이 깃들었다. 승한은 자신의 몸에 깃든 두 존재의 힘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항상 사용하던 익숙한 힘이었지만, 완전히 격이 달랐다.

-그 힘은… 뭐지?

아포피스는 승한이 가진 힘을 알아보지 못했다. 듀리안과 루시퍼와 같은 악마들은 아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아포피스는 지금껏 봉인되어있던 존재였다.

아롤이 신이 된 것은 불과 몇 백 년 전의 일이었다. 아포피스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아포피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힘에. 아롤의 힘은, 결코 붉은 천사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아니, 아롤의 힘을 완전하게 얻게 된 승한은 알 수 있었다.

아롤이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었는지를. 그가 왜 신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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