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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나가들 한 가운데로 떨어진 승한은 주위를 향해 성화를 뿌렸다. 성화를 머금은 검격은 신기하게도 어떠한 것도 베지 않고 오로지 나가만을 베고 지나갔다.
승한은 시야에 보이는 나가들을 모두 정리해 나갔다. 나가의 생명력은 질겼다. 덩치도 크고, 가지고 있는 맹독은 레드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중독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승한의 능력은 그런 나가들을 어렵지 않게 베어냈다.
“뭐, 뭐 저리 강해?”
윤재는 승한이 나가들을 베어나가는 것을 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등장과 동시에 벌어진 학살. 수백 마리의 나가들을 순식간에 학살하는 모습은 방금 전까지 윤재가 보여준 활약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듀란달이 검격을 뿜을 때마다 나가들의 머리가 베어지며 몸이 타올랐다. 세상을 짓누르는 [올림포스]의 힘에 나가들은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어보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런 능력을 아낌없이 퍼붓는 승한이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쉬이이익-.
승한이 윤재의 앞으로 날아왔다. 레드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승한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윤재는 갑작스럽게 앞으로 나타난 승한을 보며 흠칫 놀랐다. 이전에는 그래도 눈으로 쫒을 수는 있었는데, 승한은 이제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형, 괜찮아요?”
“어, 어. 괜찮아.”
승한은 윤재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를 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게 자신에게 전음구를 통해 연락을 했으니 큰 문제는 없겠거니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이네요. 아 참, 아직 끝난 건 아니에요. 곧 성화를 느낀 괴물들이 더 몰려들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한은 별로 급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윤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한은 그 많은 나가들을 모두 때려잡고도 별로 지쳐하는 기색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네?”
“갑자기 왜 이렇게 강해졌어? 물론 나도 이전보다 능력의 레벨도 올랐고, 더 강해지긴 했지만… 넌 좀 반칙인 것 같다.”
이마에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은 승한을 보며 윤재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공평함과는 거리가 먼 세상이라지만, 승한의 강함은 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림]을 사용했다면 그러려니 할지 몰라도, 지금은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게요.”
“너무 태평하게 대답하니 또 할 말이 없네.”
“하하하. 그냥… 그렇게 됐어요.”
승한 역시 자신의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막상 지금까지는 싸울 일이 없다가 나가들이 나타난 뒤에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전과 힘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
‘[영생] 때문이겠지.’
[영생]은 신의 자격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수명만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승한의 육체적인 능력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아무리 능력을 사용해도 지치지 않는다. 이전까지 승한의 몸을 깊고 깊은 우물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승한의 몸은 바다와 같았다. 우물이 아무리 깊고 넓다고 해도 바다와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승한은 [영생]에 관해서 윤재에게 말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실 말하려 했다면 진작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한다 해도 달라질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윤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불굴의 육체]가 아닌 불굴의 의지였다. 10레벨을 달성한다 해도 [영생]을 얻을지는 알 수 없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승한은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말해 준다고 해도 믿을지도 문제였다. 영원한 삶이 신의 기준이라는 것도, 그것을 능력의 행태로 승한이 얻게 되었다는 것도 정작 당사자인 승한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것들, 타인 포인트를 장난 아니게 주는데?’
승한은 이 자리에 와서 벌써 백 마리에 가까운 나가들을 잡을 수 있었다. 한 마리에 3만이 넘는 타임 포인트를 주었는데, 이 자리에서만 거의 300만에 가까운 타임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괴물들은 나타날 때마다 단계에 걸쳐 5배에 달하는 타임 포인트를 주었다. 바로 이전에 나타났던 검은 인영들이 주었던 타임 포인트가 6250타임 포인트였으니, 그 5배라면 3만이 넘어가는 것이다.
‘생각보다 타임 포인트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겠어.’
승한은 성화를 더욱 강하게 일으켰다. 가능한 멀리서부터 나가들을 불러 모으기 위함이었다. 능력의 레벨을 올리는 것도 물론이고, 승한에게는 [강림]을 사용하기 위해서 더더욱 많은 타임 포인트가 필요했다.
사사사사사삭-.
새하얀 백염과 황금빛의 성화로 뒤집어 씌워진 땅 위로 나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승한의 성화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 힘에 분노하고, 그 힘을 부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것은 승한이 원하는 바였다.
‘어떻게든 더 많은 타임 포인트가 필요하다.’
승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위로 뛰어 올랐다. 윤재는 승한이 잠시 이야기 할 시간도 없이 곧장 검을 들고 달려가버리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녀석은 이제 저것들이 괴물로도 보이지 않는 건가?”
승한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윤재 역시 꽤 많은 나가들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꽤나 힘을 많이 소모한 탓에 지쳐있었다. 하지만 윤재는 그와 비슷한 수의 나가들을 쓰러뜨리고도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애초부터 두 사람은 격차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져 있었다.
“알아서 잘 하겠지.”
윤재는 레드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드러누웠다. 조금이라도 힘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레드 드래곤도 브레스를 뿜거나 달리 큰 힘을 쓰지 않는 이상은 윤재의 힘을 더 소모하지 않을 것이다.
**
사아아악-.
나가들의 머리가 베어지고, 그 자리를 성화의 불길이 지지듯이 태웠다. 승한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며 나가들을 하나 둘씩 베어나갔다.
‘생각보다 수가 적어.’
승한의 성화는 레벨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먼 곳에 있는 괴물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일전에는 안양 시 내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괴물들을 끌어 모으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보니 모여든 나가의 수는 그 때의 반절도 되지 않았다. 나가들을 괴물이 아닌 포인트로 보고 있던 승한은 내심 아쉬웠다.
‘부족한데…….’
서걱-.
승한의 검격에 나가들이 픽픽 쓰러졌다. 성화의 힘은 물론, [성검]의 레벨이 3레벨까지 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간혹 승한을 향해 어금니를 드러내며 다가온 나가들이 있었지만 [올림포스]의 힘을 이용해 만들어낸 장벽에 가로막혔다.
‘생각 이상으로 강해졌어.’
승한은 점점 더 자신의 실력에 실감을 하고 있었다. [영생]뿐만 아니라 모든 능력의 레벨이 각각 1레벨씩 오르면서 전반적으로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성화의 레벨만 하더라도 벌써 7레벨. 1스테이지의 능력도 아니고, 무려 5스테이지의 능력이었다. [성검]의 레벨도 3레벨로 [강림]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영생]과 7레벨의 성화, 3레벨의 [성검]. 게다가 그 능력과 더불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올림포스]라는 능력까지. 승한은 나가들이 너무나도 약하게 느껴졌다.
‘약해도 너무 약해.’
적어도 일전에 나타났던 검은 인영들은 약하긴 해도 쉽게 죽지 않는 끈질김이 있었다. 성화를 전력으로 사용해야 겨우 하나 둘씩 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나가들은 검을 한 번씩 휘두르면 픽픽 쓰러지는 게 불안할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타임 포인트는 착실하게 주는 걸 보면 보통 괴물들임에는 분명한 듯했다.
승한은 금세 나가들을 정리했다. 나가들의 움직임이 어지간히 빨라서인지 모여드는 것도 금방이었다. 더 이상 나가들이 모여들지 않고, 주위로 나가들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자 승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벌써 다 끝났냐?”
잠시 쉬고 있던 윤재는 제대로 푹 쉴 틈도 없이 빠르게 돌아와 버린 승한에게 투덜대듯 물었다. 승한은 그가 지쳐 쉬고 있었던 것을 보고는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네. 그렇게 됐네요.”
“하아. 진짜 쉴 틈이 없네.”
“그나저나 생각보다 괴물들이 약한데요? 수도 그렇게 많지 않고요. 아무래도 이번 괴물의 출현은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겠어요.”
“……너 지금 뭐라는 거냐.”
승한의 말에 윤재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약하다고? 저것들이?”
윤재 역시 나가들을 상대해왔다. 나가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지금껏 나타난 어느 괴물보다도 강했다. 수가 적어서 그렇지 만약 다른 괴물들처럼 떼로 나타났다면 윤재는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단단한 외피는 박격포에 작은 생채기로 그칠 정도로 단단했다. 불에 대한 내성은 물론, 어떠한 피해에도 저항하는 질긴 외피는 상대하던 윤재가 질리도록 경험했다. 빠른 움직임과 창과 어금니에 묻어있는 독성은 거대한 레드 드래곤조차 마비시킬 정도였다.
윤재는 세계적으로도 실력을 인정받은 헌터였다. 당장 윤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헌터는 전 세계를 다 뒤져도 스물이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윤재가 이 정도로 고전할 정도라면 다른 헌터들이 어떨지 뻔했다.
나가들이 약한 게 아니었다. 단지 승한이 강한 것뿐이었다. 말이 안 될 정도로 말이다.
“……됐다. 말을 말자.”
“왜 그래요?”
“저것들이 약한 건지, 네가 강한 건지는 금방 알게 되겠지.”
윤재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넌 대체 어딜 다녀 온 거냐? 삼십 분 넘게 연락도 없이.”
“아, 그게…….”
윤재의 물음에 승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표정에 윤재는 역시 보통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승한이 삼십 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는 것만 봐도 말이다.
“무슨 일인데?”
“아마 이번 보스는 균열에서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균열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어디서 나타난다는 건데?”
윤재의 물음에 승한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하늘에서요.”
“하늘?”
“네. 어마어마한 게 오고 있지요.”
이미 바알을 한 번 겪어 보았던 승한이었다. 그런 승한이 어마어마하다고 표현할 정도라면 정말 보통이 아닌 것이었다.
“그게 혹시… 아침이 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이냐?”
이미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밤, 그것도 달빛 한 점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윤재는 승한이 이 위에서 보고 온 무언가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관련 있죠. 아주.”
“대체 뭔데?”
“형, 전에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 하죠? 제가 스테이지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스테이지라면… 몇 번째?”
“여섯 번째요.”
윤재는 승한이 겪은 스테이지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윤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승한보다 더더욱 말이다.
“설마…….”
“네. 그 설마가 사실이에요.”
승한은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몇 시간 전부터 저 하늘 멀리서부터 꿈틀거리던 어떤 존재는 더욱 더 가까워져 있었다.
“낮이 오지 않는 이유는, 아포피스가 나타났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