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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하염없이 위로 올라가던 승한은 결국 그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승한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먼 곳에 있었다.
‘헛것이던가, 아니면 너무 멀리 있던가.’
승한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저것을 향해 가까이 가 볼지.
‘가 보자. 무엇이든 확인할 수 있겠지.’
승한은 가능한 도달할 수 있는 곳까지는 가까이 가 보고 싶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윤재에게서 연락이 오겠거니 싶기도 했다. 어차피 지금 돌아가 봐야 마땅히 할 일은 없으니까.
그렇게 승한은 점점 더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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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한이 떠난 후, 윤재는 한동안 할 게 없었다. 말동무라고 할 수 있었던 승한도 사라져 버리니 무료했다. 긴장을 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이제는 눈에 익숙해져버린 검은 균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 돌아오는 거야?”
윤재는 쩍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졸립다기보다는 무료했다. 승한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다른 헌터들도 상황은 비슷하겠지.’
경계는 해야 하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는 것은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윤재는 그 점에서 위안 아닌 위안을 조금 얻었다.
쩍-.
“쩍?”
멀뚱히 앉아있던 윤재는 조용한 가운데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균열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풀어져 있던 긴장이 팽팽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재는 주머니에 있던 전음구를 손에 쥐었다.
“승한아, 균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재는 승한의 답변이 바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답은 시간이 조금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승한아?”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윤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전음구를 까먹고 집에 두고 온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쩌저적-.
그러는 와중에도 검은 균열에서 나는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윤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검은 균열을 바라봤다. 벌어져 있던 균열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흘러 나왔다. 마물, 혹은 악마에게서나 느껴지던 기운이었다.
“……이거 진짜 큰일이군.”
승한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자리에 있는 건 윤재 혼자 뿐. 윤재는 승한이 없이 싸우는 건 처음이라 처음에는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이 잘못 되었을 리 없겠지.’
승한이 돌아올 때까지 이 자리는 자신이 맡아야 한다. 윤재는 정신을 다잡았다. 승한이 없더라도 보스가 아니라면 윤재도 충분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껏 승한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윤재 역시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헌터였다. 아마 한국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꼽힐 것이다.
틱-.
화르르륵-.
윤재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위로 작은 불씨가 생겨났다. 그렇게 생겨난 불씨는 빠르게 덩치를 불려가더니 거대한 용을 불러냈다.
레드 드래곤이었다. 레드 드래곤의 덩치는 이전보다 훨씬 거대해져 있었다. 윤재의 레드 드래곤은 벌써 4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일전에 3레벨까지 도달해 있었는데, 8스테이지의 보상으로 1레벨이 더 오른 덕분이었다.
레드 드래곤의 덩치는 어지간한 고층 빌딩을 내려다볼 정도였다. 1레벨 때와 비교하면 족히 서너 배는 더 커진 상태였다. 4레벨의 레드 드래곤은 처음 불러보는 것이었는데, 윤재는 자신이 불러낸 레드 드래곤의 위용을 보고 잠시 놀랐다가 이내 든든함에 미소를 지었다.
스윽-.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아래로 내려 윤재가 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윤재는 레드 드래곤의 목 위로 올라탔다. 다시금 위로 올라간 레드 드래곤의 목 위에서 윤재는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균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조금씩 균열이 커지고 있어.”
검은 균열의 크기는 2미터 정도였다. 그런데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균열은 벌써 4미터가 넘어간 원의 상태였다. 이전보다 족히 몇 배는 더 커진 것이었다.
무언가 거대한 게 나온다. 그것밖에는 생각할 방법이 없었다.
윤재는 손을 위로 올렸다. 윤재의 손에서 쏘아진 불길이 뭉치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화려한 백염이 구체를 형성하며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꽤 넓은 범위가 밝아졌다.
“한결 좀 낫군.”
성화의 태양에서 창안한 것이었는데,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시야를 확보했으니 썩 괜찮다 싶었다.
“문제는 승한이 없다는 건데…….”
지금까지 승한과 윤재는 성화의 힘을 이용해 괴물들의 이목을 끌어왔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승한이 없으니, 넓은 범위에 걸쳐 괴물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는 힘들었다.
물론 레드 드래곤이 있으니 눈에 보이는 범위까지는 괴물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대피소 인근에 나타나게 될 괴물들이었다.
‘군인들이 괴물을 막아낼 수 있을까?’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윤재는 결국 레드 드래곤의 머리를 돌렸다.
“가자.”
균열은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커져가고 있었다. 언제 괴물이 튀어 나올지 모른다. 윤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계 체육관으로 향했다.
레드 드래곤이 조금 날아오르자 호계 체육관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체육관 근처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 역시 이미 검은 균열의 이상을 느끼고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레드 드래곤을 이끌고 온 윤재의 등장에 강동훈 소령은 반색했다.
“도와주러 오신 겁니까?”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윤재는 레드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조금 높은 곳에서 강동훈 소령의 물음에 답했다.
“네. 아무래도 군인들만으로는 벅찰 것 같아서요.”
“승한씨는요?”
“잠시… 따로 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할 일이라고요?”
강동훈 소령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이 긴급한 상황에 따로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조금이라도 손을 놓고 있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이 마당에 말이다.
“아무래도 꽤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연락도 되지 않고요.”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에 강동훈 소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큰일이군요.”
“어떻게든 제가 막아 보겠습니다. 승한이 돌아올 때까지 말이죠.”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때쯤, 체육관 근처에 벌어져 있던 균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것을 지켜봤다. 군인들은 총구를 각 균열을 향해 겨누었고, 윤재는 레드 드래곤을 타고 언제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사아아아아-.
균열 속에서 아니, 사방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뱀과 같은 소리였다. 8스테이지에서 만난 마물들의 성난 울음소리와는 달리 낮고 조용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이윽고 균열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머리에서부터 튀어나왔는데, 그 형상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리자드맨?”
도마뱀과 같은 파충류의 얼굴. 하지만 리자드맨의 얼굴과 닮았다고 생각한 것은 잠시일 뿐이었다. 얼굴이 아닌 머리 전체가 튀어나왔을 때에는, 그것이 도마뱀이 아닌 다른 파충류를 닮았음을 깨달았다.
‘아니, 저건 뱀이다.’
검은 뱀의 얼굴. 그것도 사람의 얼굴이 섞여있는 뱀의 얼굴이었다.
시커먼 뱀 인간은 머리를 끄집어내더니 곧 몸을 드러냈다. 머리는 물론, 몸통까지도 어마어마하게 두꺼웠다. 몸통만 하더라도 두께가 2미터는 될 것 같았는데, 몸길이는 십 미터가 가뿐이 넘었다. 다리는 없지만 뱀처럼 기지 않고 유연한 꼬리로 우뚝 서기까지 했다.
“나가… 인가?”
윤재는 그 괴물의 정체를 보고 떠오르는 괴물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괴물이라 보기 어려운 존재였다. 뱀이긴 뱀이되 어느 곳에서는 신처럼 떠받들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가는 여인의 형상처럼 가슴이 나오는 녀석도 있었고, 남자처럼 생긴 녀석도 있었다.
윤재는 레드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수많은 나가들을 내려다보았다. 워낙 높은 곳에서 보았고, 레드 드래곤의 덩치가 압도적으로 커서 그런지 나가들은 덩치에 비해 그럽게 커 보이지는 않았다.
‘위험해.’
하지만 그런 나가들을 바라보던 윤재는 잔뜩 긴장했다. 레드 드래곤의 덩치가 워낙 커서 그렇지 나가들의 덩치가 그렇게 작은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손에 들고 있는 창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어금니는 강렬한 맹독이 묻어있었다.
무엇보다 점점 더 강해지는 괴물들의 특성으로 보아 나가는 지금까지 나타난 괴물들보다 훨씬 더 강할 게 분명했다.
“쏴, 쏴라!”
강동훈 소령은 손을 빠르게 저으며 소리쳤다.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그의 외침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다-.
수백 명의 군인들이 가까이 있는 나가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대피소 인근에는 박격포 역시 설치되어 있었는데, 박격포 역시 나가들을 향해 날아갔다.
티티티티팅-.
나가들에게는 총이 통하지 않았다. 작은 생채기를 조금 입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수백, 수천 발을 쏘아도 나가들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박격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총보다는 조금 더 통하는 듯했지만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생긴 작은 생채기와 상처들은 눈에 띄는 속도로 다시 재생되었다.
“이런…….”
강동훈 소령은 나가들에게 총이 통하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몇몇 군인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는데, 그 역시 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쿵-.
그 때, 레드 드래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하늘 위로 날아올랐을 레드 드래곤은 날아오르지 않았다. 그가 나가들을 피해 날아오른 순간, 나가들의 공격이 군인들에게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화르르르르륵-.
거대한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다. 새하얀 백염이 하늘을 뒤덮자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던 나가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시커먼 하늘이 어느덧 정 반대의 색인 백색으로 물들었다.
백색의 화염이 아래로 쏟아졌다. 마치 거꾸로 뒤집혀 있던 바다가 중력을 잃은 것처럼. 백색의 화염은 세상을 집어 삼키는 것 같았다.
화아아아아악-!
“피, 피해!”
“불이다!”
그 불길은 대피소까지 집어삼켰다. 군인들은 윤재의 능력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강동훈 소령은 알고 있었다. 윤재의 백염은 그가 원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대단하군.’
강동훈 소령은 눈에 모이는 모든 것들 뒤덮은 백염을 보며 감탄했다. 늘 승한과 함께 다니기에 눈에 띄지 않을 뿐, 윤재 역시도 대단한 헌터임에는 분명했다. 그리고 강동훈 소령은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화르르르륵-.
그 때, 다시금 백염의 파도가 일어났다. 대피소 주변에 나타난 나가는 수십 마리에 달했다. 하지만 그 중 윤재가 쓰러뜨린 나가는 몇 마리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몇 마리가 죽었을 뿐이다.’
윤재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타임 포인트 획득 메시지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백염에 휩싸인 수십 마리의 나가들 중, 목숨을 잃은 나가는 몇 마리에 불과했다. 한 번에 수를 절반 가까이 줄일 생각으로 능력을 사용한 것인데, 윤재의 능력은 범위는 넓지만 살상력 자체가 높지는 않았다.
사아아아아-.
이윽고 살아남은 나가들이 백염의 파도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