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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예의나 격식은 없었다. 주눅이든 모습도 아니었다. 무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안 그룹의 회장 안철환을 대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굽실거리지도 않는다.
승한을 바라보는 안철환의 눈이 빛났다.
실제로 보니 승한의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렸다. 때문에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직감이었다. 안철환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왔다. 그 중에는 타 기억의 고위 인사들도 있었고, 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승한에게선 그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역시. 마음에 들어.’
안철환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천성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가지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았다.
안철환은 속에 품어둔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눈동자도 웃었다. 그것은 한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온 안철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후,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비서가 세 잔의 냉수를 가져왔다. 안철환은 투명한 잔에 들어있는 냉수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예. 아들놈에게 종종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례지마는 헌터들이 사용하는 영상구라는 것을 통해서도 승한씨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제 영상이 꽤 많이 퍼져 있는 모양이군요. 그 영상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군부대 관계자에게서 얻었습니다. 아, 물론 불법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들에게 시켜서 영상을 얻어 오도록 ‘부탁’한 것뿐이니까요.”
말이 부탁이지 화안 그룹에서 움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안석환이라면 헌터 연맹의 관계자로서 정부와도 접점이 닿아있었다. 참고용으로 영상구 몇 개쯤 빼돌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일이리라.
물론 승한의 입장에서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싸우는 영상을 빼돌렸다는 것 아닌가?
안철환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 말을 꺼냈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어설픈 거짓을 말하기보다는 기분이 조금 나쁘더라도 진실을 이야기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굳이 거짓을 말하다 거짓임이 드러난 것보다는 나았다. 경로를 밝히지 않았다면 승한은 안철환을 신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승한씨를 저희 화안 그룹의 관계자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매니지먼트 형식으로 말이죠. 승한씨가 달리 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저 승한씨의 동의하에 승한씨가 저희 화안 그룹의 얼굴이 되어주시면 되는 일이죠.”
“그건 이미 일전에 안석환씨에게 들었습니다. 굳이 이 이야기를 또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실은 아들에게서 이번 스테이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테이지에 대해서는 헌터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헌터들이 스테이지라는 꿈을 통해서 능력을 얻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애초 헌터들의 존재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이라 다들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상을 봤지요. 정말 놀랐습니다. 수만 명의 헌터들이 어쩌지 못한 괴물을… 혼자서 압도하는 것을 보니, 제가 승한씨의 가치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더군요.”
안철환은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승한씨가 있다면… 세계 각국의 헌터 연맹을 하나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승한은 안석환이 차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승한을 중심으로 세계의 헌터들을 하나로 모으자는 말이었다.
‘이거 때문이었나?’
승한은 안철환이 자신을 보고자 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안석환 개인에게 맡기기에는 확실히 규모가 제법 큰 이야기였다.
애초 화안 그룹은 승한을 자신들의 얼굴로 만들고자 했다. 세계 제일의 헌터로 꼽히는 승한이 화안 그룹에 있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그를 통한 화안 그룹의 주가를 높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덩달아 승한도 화안 그룹을 등에 업고 금전적인 이득과 사회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승한도 이 부분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 일로 안철환은 생각을 달리했다.
승한은 단순히 세계 제일의 헌터라는 이름에 국한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이미 다른 헌터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노닐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 활약을 통해 세계 각국의 헌터들의 머릿속에는 승한의 존재가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을 터.
승한이라면 그들 모두가 인정하고 뒤따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안철환은 승한이라는 사람을 장치삼아 헌터 연맹을 하나로 뭉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계 헌터 연맹.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거대한 세력이 될지는 명확하게 그려졌다. 당장 각국의 헌터 연맹만 하더라도 정부가 쉽사리 건들 수 없을 만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헌터 개개인이 가지는 가치는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헌터들이 한데 뭉친다. 지금의 세상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아마 이례가 없는 권력을 가진 집단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안철환은 그런 헌터 연맹은 만들어 등에 업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를 이용해서 말이죠?”
“네. 물론 승한씨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헌터 연맹의 운영이 힘드시다면 저희가 지원해 드릴 겁니다. 헌터 연맹의 중심이라는 이름은 역사에 한 페이지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름이 제가 될까요? 아니면 화안 그룹이 될까요?”
“둘 모두가 되겠지요.”
안철환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승한씨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일의 진행은 저희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승한씨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나, 승한씨의 협조 하에 승한씨의 이름을 중심으로 헌터들을 모으는 것까지. 동의만 해 주신다면 일은 착실하게 진행 될 겁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군요. 다 망해가는 세상에, 고작 권력을 등에 업으려 그러시는 겁니까?”
“다 망해가는 세상이라… 세상이 뒤숭숭하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승한씨가 필요한 겁니다.”
승한은 계속 해 보라는 듯 표정도 바꾸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철환은 잠시 승한의 표정을 살피더니 설명했다.
“과거부터 난세에 가장 필요한 게 뭐였는지 아십니까?”
승한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영웅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영웅입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을 해결하려는 마음보다는 누군가 해결해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한 단체이든, 능력 있는 개인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이 필요하고, 영웅이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저보고 영웅이 되라, 이 소리입니까?”
“그런 뜻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요. 최소한 세계 제일의 헌터가 한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사람들은 조금은 안심할 겁니다. 내가 사는 나라는 안전하구나, 싶겠지요.”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헌터 강대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에 세계 제일의 헌터까지 한국에 있다고 한다면,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될 것이다.
“헌터 연맹 또한 비슷한 맥락입니다. 괴물들은 기승을 부리는 이 때, 제대로 된 해결책이나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죠.”
“그 해결 방법이 바로 세계 헌터 연맹이다, 이겁니까?”
“정확히는 승한씨의 존재와 세계 헌터 연맹의 구축. 이 두 가지입니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화안 그룹도, 승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달리 거절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제가 할 일은 따로 없다는 말, 진짜입니까?”
승한의 질문은 반쯤 허락에 가까운 말이었다. 안철환은 씩 웃으며 깍지를 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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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과 승한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계약서는 준비가 되어있었다. 승한은 도톰한 계약서를 읽어내려갔고, 안철환은 거기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곁가지로 볼 수 있는 자잘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안철환이 했던 말과 비슷했다. 승한이 따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저 승한은 자신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사회적으로 알려진 지위에 대해 화안 그룹이 자신을 이용하는데 동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화안 그룹이 승한의 뒤를 봐 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승한이 화안 그룹의 뒤에 있음을 알린다.
아마 세계 헌터 연맹을 구축하는 것 또한 화안 그룹이 진행할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승한의 이름을 팔게 되겠지만, 계약을 마친 이상 승한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계약의 내용이었다. 승한이 싸우는 영상은 이미 많이 확보되어 있었고, 이제 그것을 편집하여 방송으로 내보내고 홍보하면 될 일이었다.
거기에 대해 승한이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승한은 계약을 마치고 안석환과 함께 화안 그룹의 본사를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뭘요.”
승한이 한 일은 그저 계약서에 싸인을 한 것뿐이었다. 이제부터는 화안 그룹에서 움직일 일이었다.
안석환은 승한을 다시 차에 태웠다. 볼 일이 끝났으니 다시 승한을 집으로 데려다 주려는 것이었다.
안석환은 운전대를 잡으며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좀 부럽습니다.”
“네?”
뜬금없는 말이었다. 승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안석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아들 취급은 받고 있지만… 사실 전 버려진 자식이었습니다. 그래도 피는 섞였다고 좋은 집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가족 친척 한 번 본 적 없이 살았죠.”
난데없는 넋두리였다. 운전을 시작하며 안석환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몇 년을 살았을까요. 어느 날 제 아버지라며 안철환 회장이 나타나더군요. 말로만 들었지 가족을 만난 건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제 나이 스물다섯에 말입니다. 원망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감동이 더 컸습니다.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옛날, 갓난아기 때 이후로 가족을 처음 봤던 것이니까요.”
“안석환씨 지금 나이가…….”
“스물다섯입니다.”
승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는 것은 안철환을 처음 만난 게 바로 올해라는 말이 아닌가?
안철환이라는 사람에 대한 알 수 없는 모멸감이 밀려들었다. 가족이다. 아들이다. 승한은 일찍 아버지를 잃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었다. 승한의 아버지는 어머니 못지 않게 승한을 사랑했다.
하지만 안석환은?
“혹시 안철환 회장이 안석환씨를 만난 이유가……?”
“네. 헌터로 각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헌터로 각성하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아시다시피 제 능력 덕분에 괴물의 사체를 이용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으니, 아버지도 저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