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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파악, 파악-.
사아아악-.
10여 미터의 거검. 불로 만들어졌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한 황금색의 거검은 지나가는 모든 것을 베고, 태워버렸다. 거검이 지나갈 때마다 바알은 불길에 휩싸인 눈사람처럼 빠르게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 수가 문제였다. 바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마기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형체는 아무리 쓰러뜨려도 계속해서 재생하고, 오히려 수를 더더욱 불려나가기 일쑤였다. 벌써 삼십 분 째 베어내고 있는데도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단하군. 인정할 수밖에 없어. 신을 등에 업었다고는 하나, 인간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승한은 시끄럽게 지껄여대는 바알을 향해 거검을 휘둘렀다. 크게 휘둘러진 거검은 눈앞에 있는 바알을 십여 마리씩이나 베어 넘겨 정화시켰지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뭐?”
사악-.
승한은 눈에 보이는 대로 바알을 쓰러뜨렸다. 일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마리씩 바알이 쓰러졌다. 다시 재생되면 다시 베어넘기고, 성화를 흩뿌려 태우고 정화시켰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끝은 있었다. 승한은 우직하게 움직였다.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보이는 이상, 그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습게보지 마.”
승한은 아롤을 떠올렸다.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인간. 태초의 신과 같은 모습을 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고, 신이 되었을 때 가장 완벽한 신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다. 그리고 아롤은 그러한 사실을 몸소 보여준 영웅이자 신이었다.
그가 있는 이상 인간을 무시하는 바알의 말은 모순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무시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그 어떤 존재보다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승한만 하더라도 신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하위 신들이나 하급 악마들보다도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넌 네가 무시하는 그 인간에게 발리고 있잖아?”
승한의 몸이 사라졌다. 거검을 그대로 남긴 채로.
그리고 다음 순간.
사아아아악-!
거검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눈으로 쫒는 것조차 벅찰 만큼 빠르게. 그것은 사방에 퍼져있는 무수히 많은 바알을 베어넘겼다. 수백, 수천을 한꺼번에 말이다.
화르르륵-.
베어진 바알의 몸이 타들어갔다. 그렇게 타들어가며 발화한 불씨는 근처의 다른 바알들에게로 번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도 일검에 수십의 바알을 베어넘기던 승한이었지만, 격이 다른 반격이었다.
“그렇지?”
“이놈…….”
여유로운 승한의 모습에 바알이 이를 갈았다. 바알의 본체가 움직이는지 사방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알은 다시 나타났다. 아무리 베고 태워도, 마기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죽지 않았다. 바알을 죽이기 위해서는 모든 마기를 정화시키거나 본체의 숨통을 끊어놓는 수밖에는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저도 알아요.”
마기는 무한하지 않다. 그 증거로 처음에 비해 수가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방금 전 일격으로 꽤 많은 수가 줄어들었더니, 다시 재생된 바알은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승한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마기가 정화되고, 지닌바 마기가 사라질수록 바알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신과 악마의 사이에서 말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승한의 이마에 땀이 흘러 내렸다. 바알의 마기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승한의 힘도 한계가 있었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 고위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천사의 힘에도 한계가 존재했다.
더군다나 시간이 지날수록 [강신]의 효과가 점점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힘을 소모하고 있는데 능력의 힘까지 희미해지니 더욱 빠르게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길게 끌면 불리한 쪽은 승한이었다.
‘더 빠르게…….’
화르르르륵-.
듀란달을 감싸고 있던 성화가 더욱 거대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했던 성화의 거검이 그 형체를 유지한 채 커져갔다. 시간이 없는 만큼, 더 큰 힘을 빠르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움직임도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정확하게.
승한의 황금색 눈동자가 더 크게 번져갔다. 황금색 눈동자가 흰자위를 먹어갔다. 그와 동시에 승한의 양 어깨 아래로 작은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콰드득-.
화르르륵-.
붉은색으로 불타는 날개. 그것은 붉은 천사의 날개를 닮아있었다. 아니, 그것인 실제로 붉은 천사의 날개였다. 모든 힘을 최고조로 이끌어낸 결과, 그녀의 육신과 완전히 동화가 된 것이었다.
승한은 그 때서야 [강림]이라는 능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가진 힘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이해했다.
날개가 점점 커지고, 거검이 더욱 거대해졌다. 승한의 등에 돋아난 날개는 붉은 천사의 날개보다 족히 반배는 더 거대했다. 온 몸에 [증폭]의 힘을 두른 결과였다. 승한은 비로소 지금에서야 붉은 천사라는 신의 힘을 완전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증폭]의 힘을 빌려, 더욱 강해진 상태로 말이다.
“그 모습은… 뭐냐?”
바알은 수십 미터 크기의 거검을 보며 경악했다. 그 속에 담겨있는 힘은 악마가 되어버린 바알에게는 치명적인 힘이었다. 힘의 성질뿐만이 아니라, 그 힘의 크기까지도 말이다.
“얼른 끝내자.”
승한은 거검의 손잡이를 양 손으로 잡았다. 거대한 검신과는 달리, 듀란달의 손잡이는 장난감처럼 느껴질 만큼 작았다. 승한은 손잡이와 함께 거검을 수평으로 눕혔다.
“하나, 둘…….”
후우웅-.
거검이 승한의 뒤로 돌아갔다. 팔에 들어간 힘이 더해졌다.
바알은 승한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는 불길함을 느꼈다. 승한이 들고 있는 거검에서, 그의 등에 돋아난 날개에서, 황금색으로 가득한 눈에서. 겉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지금까지와는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디를!”
바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한을 감싸고 있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알들이 그를 향해 덮쳐들었다. 마기가 흩어지고, 승한의 가슴을 노렸다. 그들은 수적 우위를 통한 힘으로 찍어 누를 듯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승한의 거검이 움직였다.
화아아아악-!
카가가가가가가각-!
성화의 검이 흩어졌다. 검의 형상으로 뭉쳐있던 성화가 흩어지며 불길을 만들었고, 검격이 그 불길을 머금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것은 수천, 수만, 수억 개의 칼날이 되어 승한을 덮쳐오던 바알의 무리들을 난도질했다.
바알은 마기를 뭉쳐 자신을 닮은 형상을 무수히 많이 만들었지만, 승한이 만들어낸 성화의 칼날은 그것보다 더 많았다. 성화의 거검은 승한이 가진바 힘을 모두 꺼내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것은 한 순간에 쪼개어 사방으로 흩어져 날려 보낸 것은, 무수히 많은 바알을 한꺼번에 정리하기 위한 수였다.
흩어진 성화의 칼날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달려들던 바알들이 베어지고 타들어가 바닥에 쓰러지며 사라졌다. 성화를 머금고 있던 듀란달은 어느새 거검의 모습에서 원래의 새하얗고 작은 검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허억. 허억.”
승한의 황금색 안광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검은자위 눈동자에 살짝 황금색이 감돌 뿐, 이전처럼 흰자위까지 황금색으로 빛나지는 않았다. 두 어깨에 돋아났던 날개도 힘을 잃고 아래로 축 처졌다.
가진바 모든 힘을 방금 전의 일격에 쏟아 부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 눈에 봐도 역작이라 할 수 있었다.
“……생각 이상이군.”
시야에 드러난 모든 것들이 타들어갔다. 만약 이곳에 도시 한복판이었다면 한 줌의 재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마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허공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성화는 대기중에 떠돌아다니던 마기조차도 남겨두지 않았다.
‘대단한데요? 진심으로 놀랐어요.’
붉은 천사가 속으로 승한을 칭찬했다. 승한이 만들어낸 이 일격은 성화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천사조차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승한이 가진 능력, [증폭]. 그리고 아롤의 검술을 가능케하는 [성검]이라는 능력과 성화의 진짜 힘을 머금고도 타지 않는 유일한 검, 듀란달까지. 승한은 단순히 성화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바 힘을 이용해 그 힘을 더욱 진화시켰다.
성검 듀란달과 아롤의 검술, 그리고 성화의 힘 자체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증폭]의 힘. 이것들이 조합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싸울 힘도 없어요.”
승한은 슬슬 [강림]의 지속시간이 다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힘을 크게 소모할수록 [강림]의 지속시간은 점점 더 짧아졌다. 물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만 더 능력에 익숙했다면 이렇게 힘들일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마지막 순간, 승한은 [강림]을 통해 붉은 천사의 힘을 완전하게 사용하는 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익숙해 졌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승한의 눈이 완전한 황금색으로 물든 것, 그리고 붉은 천사와 같은 날개가 돋아난 것은 그녀의 육신과 힘에 완전히 몸이 동화된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 순간에 쏟아낸 일격. 승한의 손은 그 일격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끝났겠죠?’
‘그럴 거예요. 느껴지는 마기가 없으니…….’
승한의 눈동자 색이 돌아왔다. 황금색의 빛이 사라지며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승한과 동화되었던 붉은 천사의 힘과 영혼이 사라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승한.’
‘뭘요.’
승한이 씩 혼자 웃었다. 붉은 천사는 승한이 웃었다는 사실에 함께 속으로 웃었다. 이윽고 그녀의 영혼이 승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능력 – 강림’의 지속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붉은 천사의 영혼이 분리됩니다.]
간단한 메시지를 끝으로 승한의 머릿속에서 울리던 붉은 천사의 음성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승한은 몸 안에 가득 차 있던 성화의 힘이 미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씁쓸하게 웃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신과 같은 힘을 얻었던 만큼 힘을 잃어버리는 허탈함은 적잖은 상실감을 가져왔다.
“아무튼… 끝난 거겠지?”
막상 [강림]의 지속시간이 끝나고 붉은 천사의 힘이 사라지자 불안감이 엄습해 들었다. 아직까지 [강림]을 한 번 더 사용할 만큼의 타임 포인트는 남아있었지만, 가능하면 그럴 일이 없었으면 했다. 남아있는 타임 포인트는 다음 번 괴물들과의 싸움을 대비해 남겨두어야 했으니 말이다.
여전히 승한의 주위는 성화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승한의 손을 떠난 성화였지만 그 힘은 금세 꺼지지 않았다.
승한은 성화의 불길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불길이 꺼지고 나면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쿠르르르르르릉-.
그 때, 바알의 몸체가 크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과 함께 승한의 주위에서 타오르고 있던 성화가 한 순간 크게 타올랐다가 다시 꺼져갔다.
바알이 움직인다. 승한은 불길함을 느꼈다. 끝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머릿속이 노랗게 물들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
바알이 세상이 떠나갈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