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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증폭]이라… 꽤 유용한 힘을 가지고 계시네요.’
붉은 천사는 승한이 가진 [증폭]의 힘을 눈여겨 보았다. 지금까지는 성화의 힘에 덧씌워 조금 더 강한 힘을 내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지만, 붉은 천사의 힘을 완전하게 사용하면서 더욱 그 힘을 강화시키는 능력은 붉은 천사로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화는 붉은 천사라는 고위 신의 힘이었다. 게다가 승한은 [강림]을 통해 그 힘을 완전하게 이끌어내고 있는 상태. 거기에 [증폭]을 통해 더욱 힘을 실어주자 성화의 힘은 족히 반 배 이상 더 강한 힘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승한 역시 [증폭]의 효과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화의 힘에 [증폭]을 입혀 사용하는 것은 당연시 하던 것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그 힘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가능하다니요? 뭐가 말입니까?’
‘그게…….’
붉은 천사의 말에 승한이 화들짝 놀랐다.
‘그게 가능합니까?’
‘부탁드려요.’
승한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승한은 그렇게 말하며 바알을 휘어잡고 있는 성화의 불길을 풀어냈다. 그러자 성화의 불길에 휩싸여 몸부림치던 바알이 휘청거리며 양 팔을 휘둘렀다.
쿠릉-!
승한은 몸을 불길로 화하며 바알이 휘두른 팔을 다시 한 번 피해냈다. 거대한 팔이 거칠게 휘둘러지자 천둥 소리가 났다.
“거 성질 한 번 급하네.”
승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성화의 불길에 온 몸이 휘감기고도 바알은 여전히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온 몸을 까맣게 그을린 것을 보면 아주 멀쩡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럼, 해 볼까?”
화르륵-.
승한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증폭]의 힘을 온 몸에 집중시키고, 듀란달과 함께 듀란달에 휘감긴 성화에 더욱 힘을 실었다. 성화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며 승한의 움직임에 따라 잔상을 남겼다.
사악, 사악-.
“크어어어어어어-!”
바알의 몸에 자잘한 상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알은 승한을 잡기 위해 무작정 팔을 휘두르고 발버둥 쳤지만, 승한을 잡기에는 느렸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힘이 강하다 해도 승한은 바알보다 더 빨랐다.
작은 상처라 해도 그것이 계속해서 생겨나자 바알 역시 마냥 상처를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바알은 승한의 칼질을 피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바알의 눈이 일순간 번쩍 빛났다. 그의 손이 더 빨라졌다.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손을 뻗은 바알이 승한의 몸을 움켜잡았다.
콰득-.
승한의 몸이 바알의 손에 가려졌다. 거대한 산만한 크기의 손에 짓눌린 승한을 보며 헌터들이 소리쳤다.
“안돼---!”
승한의 힘에 경악한 헌터들은 그가 어쩌면 바알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존재였지만, 방금 전까지 승한이 보여준 신위는 결코 바알에 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승한은 헌터들과 천사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가 바알을 어쩌지 못하게 된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천사들과 헌터들만으로는 바알을 잡을 수 없었다.
꾸득, 꾸드드득-.
바알은 승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알은 그렇게 손을 입 가까이 가져갔다.
쩌억-.
무수히 많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바알이 입을 벌렸다. 그리곤 자신의 손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손이 펴지는 순간.
덥석-.
바알의 입이 닫혔다.
**
바알에게 먹히는 승한을 바라보던 헌터들이 잠잠해졌다. 그들은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승한이 바알의 입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순간, 희망은 사라졌다.
“끝났어…….”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헌터들이 늘어났다. 바알은 승한을 한 입에 털어 넣은 후 길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알의 몸은 잔뜩 그을리고,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들이 나 있었다. 그 상처들 모두 승한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바알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목젖을 움직여 승한을 뱃속으로 밀어 넣고, 입을 우물거렸다. 곧 움직임을 멈춘 바알이 헌터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우리 차롄가?”
윤재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승한이 사라진 지금, 다음에는 바알의 철퇴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크르르르-.
바알이 울음소리를 흘렸다. 바로 공격해 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바알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헌터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 갑자기 멈춰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공격할 만한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윤재 역시 의문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러던 중, 문득 한 가지 의문이 꼬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왜 굳이 승한을 삼킨 거지?’
윤재를 비롯한 모든 헌터들은 승한이 바알의 손에 잡힌 순간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 거대한 손에 잡힌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바알은 승한을 손안에 잡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입 속에 넣고 집어 삼키기까지 했다. 마치 죽지 않은 먹잇감을 입 속에 넣고 소화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이성이 없는, 본능에 이끌린 행동이었다.
‘뭔가가 있어.’
윤재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
화륵-.
어두운 공간 안에서 불길이 떠올랐다. 도깨비불처럼 둥실 떠오른 불길은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그래봤자 텅 빈 공간밖에는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시야가 드러나자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후우. 덥네.”
승한은 바알의 뱃속을 둘러봤다. 몸을 성화로 칭칭 휘감은 상태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지옥 불 한 가운데라도 들어온 것처럼 뜨거웠다. 불과 같은 뜨거움이 아니라 승한의 성화와는 상극이 되는 마기라는 힘에 대한 불쾌한 열기였다.
승한은 허공을 밟고있었다. 다행히 바알의 몸속은 견딜만 했다. 처음에는 몸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진득한 마기에 버티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성화로 몸을 감고 있으니 조금 덥다 싶은 정도였다.
“으, 진짜 죽을 뻔했네.”
승한은 어깨를 주무르며 엄살을 피웠다. 바알의 손아귀에 잡힌 순간, 승한은 온 몸을 급하게 성화로 두르며 최대한 충격을 줄였다.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충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만 힘이 부족했다면 온 몸이 으스러질 뻔했다. 바알의 손에 잡히는 것은 도박이었다.
틱-.
승한은 손가락을 튕기며 자신의 옆으로 작은 불씨를 만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불씨는 곧 익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한 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천사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제 됐습니까?”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작은 불씨로 만들어진 천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바로 붉은 천사였다. 그녀는 승한이 만들어낸 불씨를 새로운 몸으로 빌려 그것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보다는 한결 대화하기 편하네요. 속으로 떠드는 게 영 어색했는데.”
“익숙해지면 괜찮을 텐데요?”
“어차피 이 주위를 밝히려면 불씨는 필요하니까요. 겸사겸사라고 할까요?”
“제가 횃불 대용이라는 건가요?”
붉은 천사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작은 불씨에 불과했지만 붉은 천사의 의지가 깃든 그것은 마치 진짜 생명이 창조된 것만 같았다.
“바알에게 먹힌 건 의도한 건가요?”
“네.”
“……먹히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이 방법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거든요.”
승한은 자신이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 싶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요.”
붉은 천사가 승한에게 했던 부탁.
그것은 바로 바알을 다시 정화해 달라는 것이었다.
바알은 본래 고위 신이었던 존재였다. 특이하게도 악마를 탄생시키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신이자 악마를 공존하는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신에서 악마가 되어버렸다.
붉은 천사는 그런 바알을 안타까워했다. 신들끼리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승한에게 바알을 정화해 다시 신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부탁했다.
어떻게? 라고 묻는다면 답은 뻔했다. 성화라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단한 몸뚱이를 아무리 태워 봤자 소용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럼 몸 속에서부터 정화해야죠.”
“신기한 발상이네요. 아니, 그 전에… 그걸 이런 식으로 도전한 게 가장 신기하군요.”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했겠죠. 뭐, 다른 방법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승한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금 주위를 쭉 둘러봤다. 바알은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몸속도 넓었다. 성화로 주위를 비춰봐도 끝이 보이질 않았으니 말이다.
‘이 넓은 곳이 다 마기로 가득 차 있는 건가?’
[강림]을 통해 붉은 천사의 힘을 손에 넣지 않았다면 진작에 몸이 썩어 녹아내렸을 만한 마기였다. 덩치에서 나오는 힘뿐만이 아니라 몸 자체를 이루고 있는 마기도 만만치 않았다.
마기. 그것은 악마들이 가진 힘을 통칭하여 부르는 것이었다. 붉은 천사를 비롯한 신들이 가진 힘과는 정 반대되는 힘이었고, 바알을 악마로 만든 힘의 정체이기도 했다.
성화는 바로 이 마기를 정화할 수 있는 힘이었다. 순수한 악마들은 이 힘에 정화되어 재가 되어 타버리거나, 녹아내린다. 하지만 바알은 악마이긴 하나 절반은 신이었던 존재였다.
태우고자 하지 않고, 정화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성화는 그것이 가능한 불이었다. 다루는 존재의 의지에 따라 힘의 성질을 바꾸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악마라 하더라도 태우지 않을 수도 있었고, 순수한 신과 인간이라도 까맣게 불태울 수도 있었다.
붉은 천사는 그것을 이용해 바알의 마기를 정화시켜 달라 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바알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화르르르륵-.
승한의 양 손에 성화가 맺혔다. 작은 불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성화의 힘은 바알의 몸속에 자리잡고 있는 마기를 정화시켜 나갔다.
“그럼… 태워 볼까요?”
**
헌터들과 천사들, 신수들은 여전히 바알의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감히 먼저 공격할 생각도, 함부로 움직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망가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스테이지 안인지라 어디로 도망가야할지도 모르고 있었다.
신수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바알의 존재감 앞에서, 쥐 앞의 고양이처럼 숨을 죽이고 웅크렸다.
그렇게 한참. 삼십 분 정도가 흘렀을까? 헌터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왜 움직이지 않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바알이 움직이지 않은 건 승한을 집어삼킨 직후부터였다.
‘승한이… 살아있는 건가?’
윤재를 비롯한 헌터들은 바알에게 먹혔다 생각했던 승한이 저 몸속에서 뭔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알이 움직임을 멈춘 시기가 바로 승한을 집어삼킨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승한이 무언가를 해 주기를.
크르르르르-.
바알이 다시 낮게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아아아아아-!”
바알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