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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황금색의 불길은 이전부터 승한이 사용하던 성화보다 더욱 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옅은 황금색이 아닌, 완전하게 진한 황금색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범위도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승한을 중심으로 그 일대 전체가 황금색의 불길로 물들었다. 헌터들은 불길이 다가오자 깜짝 놀랐지만, 곧 성화가 전혀 뜨겁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안도했다.
‘이건…….’
윤재는 승한이 사용한 성화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루이즈와 주희, 그리고 그밖에 승한을 아는 모든 헌터들은 승한의 변화를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리고 그 중 승한이 변화한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윤재뿐이었다.
‘[강림]을 사용한 건가?’
윤재는 승한이 가진 [강림]이라는 능력에 대해 일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워낙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잊고 있었는데, 고위 신을 몸으로 직접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능력이라면 바알과도 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구구구구-.
바알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거대한 악마이자 신. 그의 주먹은 하나의 산을 짓뭉개고도 남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콰앙-!
그리고 그 주먹이 승한을 향해 뻗어왔다. 대기가 찢어지고, 휘몰아치는 마기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이 보였다. 산이 아니라 하나의 섬을 통째로 지워버릴 수 있을 만한 위력이었다.
승한은 그런 바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승한의 손과 바알의 주먹은 너무나도 큰 크기의 차이가 있었지만, 승한은 자신을 중심으로 번져있는 황금색의 성화를 모아 한데 뭉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성화의 막이 승한의 앞으로 나타났다.
콰앙-!
바알의 주먹이 성화의 막을 두드렸다. 성화의 막은 결코 작지는 않았지만 바알의 주먹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초라해 보일 만큼 작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하게 바알의 주먹을 막아냈다.
헌터들은 경악했다. 위험하다고 소리치던 이들도, 아무리 승한이라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악마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들도. 지금 눈앞에 나타난 현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바알은 주먹에 닿아있는 성화에서 손을 떼어냈다. 다른 헌터들에게는 미지근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악마인 바알에게 있어서 성화의 불길은 지옥불보다도 더 뜨거운 것이었다.
파앗-.
뭉쳐져 있던 성화가 흩어지며 사방을 감쌌다. 바알은 자신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 성화를 둘러보다가 다시금 승한을 바라봤다.
그런데 없다. 잠시 한눈이 팔려있던 사이, 승한은 감쪽같이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승한을 찾아보려 해도 이미 주위는 성화로 꽉 차있는 공간이었다. 성화의 기운으로 승한을 찾아보려 해도 그는 성화에 가려져 찾을 수가 없었다.
바알이 잠시 승한을 찾던 다음 순간.
“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악-!”
바알은 바로 자신의 몸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고개를 아래로 젖혔다. 자신을 따르는 하급 악마들. 신수들이나 천사들과는 달리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기에 공격하고 있지 않던 이들이었다. 어느새 그들이 온 몸에 성화의 불길을 머금고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알이 찾던 승한은 그런 하급 악마들과 함께 있었다.
“어, 어떻게…….”
십여 명의 하급 악마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승한을 노려봤다. 이미 온 몸은 성화에 의해 타들어가고 있었으면서, 마지막 있는 힘을 쥐어짜 목소리를 냈다.
분명 승한은 강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승한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용하는 힘의 근본은 같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승한은 온 몸을 불꽃으로 만들어 악마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미 성화를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온 몸을 성화의 불꽃으로 만들었다. 성화의 열기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악마들은 순식간에 성화에 타들어가며 몸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바알뿐이었다.
크르르르-.
승한은 자신의 몸 아래에 있는 승한을 노려보며 온 몸에서 마기를 끌어냈다. 하급 악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마기가 그의 몸에서 퍼져나왔다. 고위 신에서 악마가 된 그는, 최상급의 악마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봤자 자아가 없는 악마.’
승한은 바알의 약점을 그의 힘이 아닌, 자아를 잃어버린 것에서 찾았다. 그는 이미 생전의 지혜와 총명함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신이라면, 악마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조차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는 광기를 가진 악마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승한은 원래의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신들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길 수 있다.’
승한은 자신감을 가지고 듀란달을 들었다. 검신에 성화의 불길이 맺혔다. 다른 때와 똑같은 힘이었지만, 결코 똑같지만은 않았다.
바알은 승한을 잡고자 손을 뻗었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손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승한의 몸이 사라졌다.
쐐애애애액-.
콰드드드득-.
승한이 사라진 순간과 거의 동시에 바알의 손바닥에 긁힌 상처가 생겨났다. 아니, 정확히 보면 긁힌 정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바알의 손이 워낙에 크고 두껍기에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꽤나 깊은 검상이었다.
상처의 깊이로만 보면 승한이 처음 성화의 태양을 검격으로 쏘아냈을 때와 비슷한 상처였다. 상처의 크기만 보자면 그랬다. 하지만 결코 그것은 이전과 같은 상처라고 볼 수 없었다.
화륵-.
손바닥에 난 상처를 타고 황금색의 성화가 피어올랐다. 그 힘은 성화의 태양보다도 훨씬 강렬하고 뜨거웠다. 바알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에 포효를 터뜨렸다.
크허어엉-!
바알의 포효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전과는 달리 그 속에는 마기가 섞여 나왔는데, 그 힘에 신수들과 헌터들이 뒤로 날아가기까지 할 정도였다.
쿠구구구구-.
움직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승한은 바알에 비하면 먼지처럼 작았다. 바알은 그 작은 승한을 눈으로 쫒으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와 달리 느릿느릿 힘을 빼고 움직이지 않고, 승한을 잡기 위해 더욱 몸에 힘을 주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바알의 움직임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빨랐다. 그는 승한을 향해 두 개의 팔을 휘저었다. 산보다 훨씬 거대한 두 개의 팔이 이리저리 휘둘러 오니 승한은 다급히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콰아앙-!
화악-.
바알의 팔이 지나간 자리의 대기가 찢겨져 나갔다. 승한은 그 자리에 있다가 몸을 불로 화해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승한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다시 나타났는데, 그럴 때면 바알은 다시금 승한을 향해 다른 한쪽 팔을 휘둘렀다.
바알은 승한을 잡고자 하였지만 잡지 못했고, 반대로 승한은 바알을 공격할 만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쓸데 없는 움직임을 했다가는 그대로 얻어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한 대라도 맞으면 위험하다.’
처음 승한이 바알의 팔에 얻어맞아 땅 아래로 떨어졌을 때, 승한은 [강림]을 이용해 붉은 천사의 힘을 빌려 그 힘으로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승한을 우습게보고 가볍게 팔을 휘둘렀던 그 때와는 달리, 바알은 승한을 향해 죽일 듯이 공격하고 있었다.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은 없었다. 되도록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문제는 언제까지도 이렇게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씩 흔들어 볼까?’
승한의 몸이 다시금 흩어졌다. 다시금 승한이 나타난 곳은 바알의 가슴 바로 앞쪽이었다. 바알은 승한을 공격하고자 자신의 가슴 위를 두드렸다.
쿠웅-.
승한은 이번에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바알은 자신의 가슴을 스스로 두드리고는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균형을 잃은 것이었다.
바알은 잠시 몸을 휘청거리다 승한을 쫒아 시선을 옮겼다. 찰나의 시간 동안 바알의 머리 위로 올라간 승한은 주위로 퍼뜨려 놓았던 성화의 불길을 자신의 몸 주위로 모으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하늘 위로 성화의 바다가 생겨났다. 하늘과 땅이 뒤집혀 황금색의 바다가 구름이 되어버린 듯했다.
아니, 그것은 구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높은 곳에 있었다. 애초에 바알은 구름을 아래로 내려다 볼 만큼 거대한 존재였다. 승한이 만들어낸 성화는 그런 바알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넘실거리는 물결처럼 성화가 흔들거렸다. 바알은 하늘을 뒤덮은 성화가 눈이 부신지 눈을 반쯤 감았다.
“흐읍!”
승한이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성화의 바다가 구겨지며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헌터들은 경악했다. 그것은 처음 바알의 거대한 모습을 보았을 때와 같은 수준의 경악이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은 이미 성화의 열기에 녹아 내린지 오래였다. 이제는 원래 구름이 있어야 할 곳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또 다른 성화의 구름이 생겨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땅을 뒤집어 바다가 황금색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승한의 손짓에 따라 움켜쥐고, 바알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움켜진 성화의 바다가 바알을 향해 떨어졌다.
촤아아아아-!
성화의 바다는 물결처럼 바알의 몸을 감쌌다. 출렁이는 파도는 바알의 몸 위를 덮치고, 그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바알이 다시금 포효했다. 자신의 온 몸을 감싼 성화를 떨쳐내고자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쿵, 쿵-.
땅 아래에 박혀있는 바알의 다리가 움직였다. 헌터들은 바알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움직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승한과 바알의 싸움에 말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승한은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바알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던 성화가 그의 몸을 옭죄었다. 거대한 바알의 몸을 사방에서 감싸 밧줄처럼 그의 몸을 둘러맸다.
카아아아아아-!
의미없는 비명을 지르며 바알이 자신의 몸을 강제한 성화를 떨쳐버리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것은 큰 의미가 없는 발버둥이었다.
바알 역시 고위 신이었던 몸이었다. 자아를 잃고, 이성이 없다고 해도 가진바 힘만큼은 고위 신과 다를바 없었다.
하지만 바알은 승한이 가진 힘에 압도되고 있었다. 그가 몸을 구속한 성화를 풀어내지 못했다.
당연했다.
승한이 가진 힘은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증폭]이 이럴 때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군.’
승한은 지금껏 모든 능력에 [증폭]을 사용하고 있었다. 온 몸에 [증폭]의 힘을 걸어 신체적인 능력을 강화하고, [성화]와 [올림포스]에도 역시 [증폭]을 이용해 더욱 힘을 강화했다.
하지만 [증폭]의 힘은 어느 순간부터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늘상 사용하다 보니 마치 그 힘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림]을 통해 붉은 천사의 힘을 온전하게 받아들인 지금, 승한은 [증폭]이 얼마나 유용한 능력인지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완전한 성화의 힘까지 강화시킬 줄이야…….’
[증폭]이라는 능력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붉은 천사가 가진 완전한 성화의 힘까지 더욱 강화시켜 주었던 것이다.
완전한 신, 그것도 하나의 세상을 주관하는 고위 신의 힘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