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182화 (18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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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승한아아아아아아-!”

윤재의 외침이 비명처럼 울려퍼졌다. 위에서 떨어지는 바알의 팔을 피해 서둘러 움직이느라 미처 승한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니, 사실 챙겨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없었다. 승한은 윤재가 챙겨야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중요한 사람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는 윤재가 챙기지 않아도 될 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승한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바알의 팔에 얻어맞았다. 저 거대한 팔에, 형체도 없이 아래로 깔렸다.

바알의 팔이 떨어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박살난 땅과 움푹 파인 깊은 구덩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그야말로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을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승한아!”

윤재는 이미 승한이 죽었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지금 당장 윤재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쉬익-.

퍼퍼퍼펑-.

겁을 상실한 몇몇 헌터들이 바알을 향해 능력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겁을 상실한 게 아니라 너무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무서운 나머지 겁조차 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발악이었다. 이미 죽을 것을 알고, 공격을 아무리 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이라도 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서서 죽는 것을 기다리느니, 발악이라도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 공격이 시작되자 이윽고 수만 명의 헌터들이 일제히 바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바알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발악은 어디까지나 발악일 뿐. 승한의 공격과는 달리, 다른 헌터들의 공격은 바알의 심기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바알에게 있어서 승한의 존재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작은 짐승에 불과했지만, 다른 헌터들은 벌레만도 못하게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안 되는군.’

바알에게 불길을 퍼붓고, 레드 드래곤을 이용해 브레스를 뿜어봐도 바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윤재와 같은 수준의 헌터들은 이 자리에 꽤 많았다. 그들의 공격조차 통하지 않는데 윤재의 공격이 통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유일하게 바알의 몸에 상처를 낸 것은 승한뿐이었다. 하지만 그 승한은 이미 이 자리에 없을뿐더러, 있다고 치더라도 바알을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다 끝났구나…….”

바알은 더 이상 헌터들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 아래에 박혀있던 발이 움직이자, 땅이 무너져 내렸다. 바알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헌터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오자,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 기백에 헌터들이 공격을 멈추었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두 눈으로 보았고, 몸으로 실감했다. 바알의 몸짓 한 번에 자신들의 목숨이 으스러져 사라질 것임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바알은 승한을 공격했을 때와는 달리 눈동자에 어떤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벌레도 아닌 무생물을 바라보는  눈빛과도 같았다.

윤재를 비롯한 헌터들은 그렇게 그 자리에서 바알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렸다. 그들은 어디론가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치려고 한들 도망칠 곳도 없었으며, 바알의 기백에 눌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쿠그그그그-.

바알의 거대한 손이 헌터들을 향해 뻗어왔다. 하나의 산을 움켜쥘 정도로 거대한 손은 수천 명 정도는 너끈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뻗어오던 손이 헌터들을 덮치던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악-!

거대한 빛 무리가 바알의 팔을 아래에서 덮쳤다. 황금색의 불길은 바알의 거대한 팔을 위로 밀어낼 정도로 크고, 힘이 거셌다.

크아아아아-!

바알이 비명을 질렀다. 승한이 목을 베었을 때도 꿈쩍도 하지 않던 바알이 말이다.

황금색의 불꽃은 바알의 팔을 휘감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황금색의 불길. 그것을 본 윤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설마……?”

**

[50000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강림’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붉은 천사’의 힘과 영혼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바알의 팔에 얻어맞아 땅속 깊은 곳으로 내려왔건만,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변이 온통 까맣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머릿속에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승한은 바알의 팔에 얻어맞는 순간, 아껴두었던 능력 [강림]을 사용했다. 그것이 바로 승한이 마지막으로 내보일 수 있는 패였다.

‘여긴 땅 속인가?’

눈앞을 가득 메운 시커먼 공간을 보며 순간 머릿속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은 또 다시 머릿속에서 돌아왔다.

‘결국 막지 못했군요.’

붉은 천사의 목소리였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승한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 속에 있다는 것을.

[강림]의 효과였다. 언뜻 느끼기로는 [강신]과 비슷한 능력이다 싶었다. 하지만 허공에 붕 떠있는 듯한 몸 상태에 다른 점을 알 수 있었다.

비슷하긴 비슷하다. 붉은 천사, 그녀의 힘을 빌려오는 것임에는 같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힘의 본질은 같을지언정, 질적인 면에서는 결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능력이 바로 [강림]이었다.

그녀의 힘과 영혼, 그리고 육신까지. 승한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승한의 머릿속에는 붉은 천사의 자의식이 깃들었고, 그녀와 머릿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한편 그녀의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신이 된 듯하다. [강신]을 사용했을 때에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다. 조금 더 힘이 늘어났구나, 싶을 뿐.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영혼과 힘과 육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 승한은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되었다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어둠 속에서 떠진 승한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것 외에는 겉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그 황금색 눈에서는 이미 바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것은 신의 눈이었다.

‘막지 못했다는 건, 바알을 말씀하는 겁니까?’

‘네. 전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어요. 이런 모습이 아닌,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이죠.’

붉은 천사 역시 바알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름대로 한 세상을 창조할 만큼 고위급의 신이었고 어두운 이면을 악마로 만들지 않고 한 몸에 지니고 있었던 만큼 그를 모르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더군다나 붉은 천사 역시 고위 신. 살아온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고, 알고 있는 지식 또한 많았다. 승한은 그녀와 하나가 되면서 그녀의 지식을 직접 얻지 못했다는 게 내심 아쉬웠다.

‘어쩔 수 없죠. 이미 악마가 된 이상, 편히 잠들도록 도와주는 수밖에.’

‘부탁드려요. 바알 역시 스스로 악마가 되기를 꺼려해 스스로 땅에 묻혔던 만큼, 지금 자신의 모습을 경멸할 게 분명해요. 그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고 싶어요.’

그녀의 안타까움이 승한의 가슴으로 직접 전해졌다. 그것은 바알에 대한 연민이자, 동시에 승한에 대한 동정심이기도 했다.

‘승한씨. 결국 당신의 선택은 이건가요?’

붉은 천사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씁쓸했다. 승한은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주희가 말다시피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몸에 무리가 간다. 한두번, 아주 조금씩 능력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승한은 이미 지금 이 자리에서만도 몇 번씩이나 몸을 혹사시켰다 회복하기를 반복하지 않았던가.

[강림]은 그런 승한의 능력 중 가장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능력이었다. 지금 당장에는 붉은 천사의 육신과 하나가 되어 문제가 없다지만, 능력의 효과가 끝난 이후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여러 번 망가진 몸은 완전히 회복할 수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붉은 천사는 승한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한 데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그냥 죽을 수만은 없었으니까요.’

승한이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강림]을 통해 붉은 천사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강림]은 두 가지 능력으로 분류되었다. 타임 포인트를 소모해 붉은 천사를 직접 소환하던가, 아니면 자신의 몸에 붉은 천사의 힘을 완전하게 깃들게 하던가. 어느 쪽이든 효과는 확실했지만 승한은 그 중 자신의 몸에 붉은 천사의 육신과 힘을 깃들게 만들었다. 바알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승한은 이렇게 버젓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몸에 더더욱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붉은 천사는 차라리 승한이 자신을 직접 소환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 몸은 저도 잘 압니다. 이렇게 빠르게 망가질 만큼 부실하진 않아요.’

‘지금 당장을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하나 둘 생각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못하지 않겠습니까?’

승한은 여유로이 허공을 밟았다. 붉은 천사의 육신과 능력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승한의 다른 능력들은 버젓이 남아있었다.

이거라면 할 수 있다. 승한은 자신의 몸속을 가득 메운 성화를 느끼며 확신을 얻었다. 무엇보다 승한이 가진 능력은 이것 하나만이 아니지 않은가?

승한은 바알을 잡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크르르르르-.

바알은 자신의 팔을 감싼 성화의 불길을 다른 한쪽 팔로 문질러 꺼뜨렸다. 이번에는 제법 뜨거웠던지 다시금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공격한 버릇없는 인간을 찾았다.

자신의 팔에 부수어진 땅 속에서 작은 인간이 위로 올라왔다. 익숙한 힘이 느껴졌다. 자신의 목에 작은 상처를 내고, 팔을 뜨겁게 달군 힘이었다.

크르르르르-.

바알은 악마가 되면서 자아를 잃었지만, 본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바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을 공격한 다른 미개한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는 이미 인간이라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는 것을.

악마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한 때 고위 신이었던 바알이었다. 그는 승한을 결코 얕볼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한이 하나의 벌레와 같은 존재였다면, 이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맹수가 되었다.

“승한아---!”

승한의 등장에 윤재가 반갑게 소리쳤다. 다른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한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고, 그가 바알에게 한 방에 목숨을 잃었다 생각한 그들이었다. 유일하게 바알에게 상처를 입혔던 승한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니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승한은 윤재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리 붉은 천사의 힘을 얻었다고 해도 바알을 눈앞에 두고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바알과 승한이 서로를 마주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너무나도 작고 초라한 바알과 승한이었지만 그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승한은 작지만 거대했고, 바알은 보는 그대로 거대했다.

스윽-.

승한의 듀란달의 검끝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검에 황금색의 성화가 맺히는 순간이었다.

화르르르륵-.

세상이 황금색의 불길로 태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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