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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기괴한 얼굴을 가진 악마의 얼굴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거대한 뿔이었다. 워낙에 거대한 몸집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뿔은 머리의 두 배 정도 길이는 됨직할 정도로 거대했다. 만약 먹구름이 있었다면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을 뚫고 올라갔을 것이다.
거대 악마는 하반신을 땅 아래에 묻고 상반신을 땅 위로 꺼낸 상태였다. 이미 거대 악마의 얼굴은 헌터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하다. 어지간히 거대한 산조차도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 악마는 흉흉한 안광을 빛냈다.
크르르르-.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허공에 낮게 울렸다. 그 울음소리는 헌터들과 신수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 멀리 남아있는 들판에까지 들릴 정도이니 말이다. 입안에서 울린 소리가 이 정도라면 포효라도 터뜨리는 날에는 소리만으로 귀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얼굴과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시퍼런 피부는 달리 갑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단단해보였다. 과연 저만한 덩치를 가진 악마의 피부는 얼마나 두꺼울까 싶었다.
‘저걸 어떻게 잡아야 하지?’
눈앞을 가득 메운 거대한 악마를 보며 승한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남아있는 악마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바알…….”
한 천사의 중얼거림에 승한의 눈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그는 거대 악마의 정체를 아는 모양이었다.
“바알이라고요?”
“네. 확실할 겁니다. 이 정도로 거대한 악마는 아포피스 외에는 바알밖에는 없습니다.”
바알은 한 세상을 만들어낸 고위 신이었다. 그는 다른 신들과는 다르게 신이면서도 어두운 이면의 악마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는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했다. 신으로서의 육체와 악마로서의 육체, 그리고 그 두 가지 이면의 정신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바알은 완전하면서도 불완전했다.
신이면서도 언제든지 악마가 될 수 있는 존재. 그는 점차 악마가 되어가는 자신을 스스로 봉인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세상을 깨끗하게 비우고, 그 땅 아래에 육신을 묻었다. 그리고 악마가 된 스스로가 깨어나지 않도록 그 위를 평온한 들판으로 뒤덮었다.
하지만 그런 바알을 악마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사탄을 깨우는 동시에 잠들어있는 바알을 악마로 만들어 깨우기를 계획했다. 세상을 마기로 뒤덮고, 피로 들판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나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고위 신이었던 바알은 악마가 되어 깨어났다.
“그것이 바알이라는 존재입니다. 원래는 신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신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군요.”
머리에 있는 뿔이 그 증거였다. 날개를 가진 신은 있을지언정, 뿔을 가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뿔은 온전히 악마의 상징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즉, 신이었던 바알이 이제는 완전한 악마가 되어버렸다는 뜻이었다.
“……고위 신이었다는 말이죠?”
“네. 바알이 자신의 육신을 세상 아래에 묻은 것이 벌써 수천 년 전의 일입니다. 전 그 때에도 천족이 아닌, 천사로서 세상의 한 부분을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한 부분을 관장한다. 그 말은 바로 하나의 세상을 다른 천사들과 함께 관리하였다는 뜻이었다.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낼 정도의 고위 신이 아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천 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긴 시간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신들의 최소 자격이 무한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생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저게 예전에는 신이었다는 말이야?’
승한은 눈앞을 가득 메운 거대한 악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특이한 경우라고는 하지만 바알은 한때 신이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악마가 되어있었다.
남아있는 악마들은 어느새 바알의 곁으로 향해있었다. 애초 그들의 목적이 바알을 완전한 악마로 만들고, 그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었으니 그를 따르는 것이야 어찌보면 당연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승한의 물음에 천사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것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바알은 한 세상을 주관하던 고위 신이었던 존재. 악마가 된 그는 최상급의 악마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점이 뭡니까?”
“저희들만으로는 바알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신수들과 수만의 헌터들, 그리고 수십의 천사들이 있었다. 악마들은 이제 열도 채 남아있지 않았으니, 모든 전력을 바알을 잡는데 집중시킬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천사는 단호하게 불가능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승한보다 그가 고위 신이나 최상급의 악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크르르르-.
그 때, 바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알은 눈을 희번득하게 뜨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크어어어어어-!
거대한 울부짖음이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한 번의 포효만으로 거센 돌풍이 불고, 땅이 뒤집히고 하늘의 먹구름이 흩어졌다. 승한이 만든 성화의 태양조차도 그 포효에 잠시 흔들릴 정도였다.
“무슨 이런……!”
단순히 한 번 울부짖었을 뿐인데 하늘을 부유하고 있던 헌터들과 신수들이 휘청거렸다. 따로 공격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저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승한은 이를 악물며 검에 성화를 가득 머금었다. 바알의 덩치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할 뿐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승한은 더 높이 위로 올라갔다. 바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덩치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헌터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어떻게든 그의 주먹을 피하고자 도망쳤다.
이윽고 하늘을 뚫고 올라갔던 바알의 거대한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땅이 산산이 부수어지며 그 파편이 위로 떠올랐다. 천 미터 가까이 잔해가 떠올랐다. 바알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헌터들과 신수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눈에 뻔히 보였다.
단순한 주먹질 한 번.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끔찍했다. 지면은 마치 거대한 미사일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산산히 부수어졌다. 그 범위가 물경 십 키로에 갈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헌터들은 감히 바알에게 공격을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꽉 찼다.
화르르륵-.
그 때, 하늘에 떠 있던 성화의 태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알의 앞에서 이미 그것은 작은 태양이라고 하기조차도 민망한 크기였지만, 성화의 태양이 움직이자 헌터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여들었다.
승한은 성화의 태양을 검으로 빨아들였다. 어차피 이제와서는 성화의 태양이 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성화의 태양은 악마들과 마물들을 약하게 만들고, 먹구름과 황무지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니 말이다.
성화의 태양은 승한이 온 힘을 다해 만들어낸 힘. 승한은 그것을 몸이 아닌, 듀란달을 통해 받아들였다. 거대한 성화의 힘이 듀란달에 압축되었다.
‘이거라면…….’
성화의 태양이 듀란달에 고밀도로 압축되었다. 새하얀 검신은 이미 성화의 태양에 가려져 황금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승한은 자신이 뿜어낸 힘이었지만 듀란달에 압축된 성화의 힘에 자신감이 붙었다.
할 수 있다. 이거라면 분명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고위 신이었던 바알이라 해도, 성화 역시 고위 신의 힘이었다. 더군다나 악마가 된 지금에서는 성화야말로 바알의 가장 큰 천적이 될 것이다.
승한은 방패를 등 뒤로 걸치고 듀란달을 양 손으로 잡았다. 검을 가로로 눕힌 승한은 있는 힘껏 휘둘렀다.
바알의 목을 향해서!
쏴아아아아아악-.
화르르르륵-.
성화의 검격. 그것은 지금까지 승한이 휘두른 그 어떤 검격보다도 거대하고, 맹렬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고, 무엇이든 태워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산 하나를 가를 것만 같은 검격. 비록 바알의 덩치에 비해서는 작게만 보일 뿐이지만, 이만한 공격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지금 승한뿐이었다.
단숨에 목을 벤다!
검격이 바알의 목을 향해 뻗어가는 그 짧은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성화의 태양이 검격으로 변해 바알의 목을 베는 순간이었다.
화르르르륵-.
성화의 검격이 흩어지며 바알의 몸에 잔해를 남겼다. 바알은 목 주위로 번진 성화를 한 손으로 문질렀다. 마치 모기가 문 듯한 모양새였다.
“미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하고 날린 것이었는데,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바알은 손으로 목을 문질러 성화의 불길을 꺼뜨렸다. 따로 힘을 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몸을 감싸고 있는 마기에 성화의 불길이 꺼진 것에 불과했다.
손이 떨어지고 목 언저리를 보니 작은 생채기 같은 것이 나 있었다. 물론 작다고 볼 수 있는 상처는 아니었다. 목에 살짝 나 있는 상처라고 해도, 목 자체가 어지간한 산보다 거대한 것을 생각해 보면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는 검상이었다.
차원이 다르다. 성화의 태양을 가득 머금은 검격이 통하지 않았다. 온 힘을 퍼부었다 볼 수 있는 공격조차 작은 생채기를 내는 게 고작이라면, 이 다음 공격부터는 아예 먹히지 않을 것이다.
“이건… 수준이 다르잖아?”
“저걸 어떻게 잡아…….”
승한의 공격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했다. 성화의 태양을 가득 머금은 승한의 공격조차 통하지 않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헌터들은 아예 기가 확 죽어버렸다.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바알을 상대로 어떻게 해볼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득 역시 승한의 공격에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혹시나 역시 통하지 않았다.
크르르르-.
악마가 되어버린 바알은 멀쩡한 자아를 가지지는 못했는지 말보다는 울음소리로 승한을 노려봤다. 거대한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승한은 온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화가 난 건가?’
바알의 분노는 승한에게로 이어졌다. 자아가 없는 바알은 단지 자신에게 작은 상처를 입힌 승한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움직였다.
쿠구구구구-.
다시 한 번 거대한 팔이 위로 올라갔다. 그 팔은 승한의 머리 위에서 멈추더니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두쪽으로 가를 것만 같은 기세였다.
승한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른 헌터들은 이미 바알의 팔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멀리서 윤재가 도망치라며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 말은 승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승한은 결심을 굳혔다. 이미 바알의 팔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승한은 아예 눈을 감고 검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앙-!
바알의 팔이 아래로 떨어지며 승한의 몸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