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8 / 0223 ----------------------------------------------
23. 죽은자
땅 아래로 내려간 승한을 향해 마물들이 덮쳐왔다. 하나같이 보통 사람의 몇 배는 거대한 마물들이었는데, 덩치가 워낙 큰데다가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끄떡도 않는 방어력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그런 마물들이 수십. 황무지 한 가운데로 내려온 승한은 마물들의 표적이 되었다. 승한은 귀찮다는 듯 성화를 머금은 듀란달을 크게 휘둘렀다.
화르르륵-!
성화의 검격이 승한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성화의 검격에 반으로 베어진 마물들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6레벨의 성화는 고작 마물들 따위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듀란달 역시 마물들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의 검격으로 주위에 있던 마물들을 정리한 승한은 몸을 숙여 황무지의 모래를 한 손으로 쓸었다. 하늘에 떠 있는 먹구름과는 달리, 황무지의 모래는 평범한 모래에 불과했다.
‘역시 이상해.’
차라리 황무지의 모래들 역시 먹구름과 마찬가지로 마기로 인해 변질된 땅이라고 한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길하게도 황무지의 모래는 단순한 모래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승한은 손에 쥐어진 모래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땅 밑에서 느껴지는 이 마기는 뭐지?”
**
성화의 태양은 하늘에 떠 있는 마기의 먹구름을 정화시켰다. 땅 밑에 있는 황무지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해도, 먹구름을 정화시키는 것 정도는 승한의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승한은 이 일로 인해 신수들과 마물들, 그리고 천사들과 악마들의 싸움이 팽팽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천사들과 악마들은 그렇다 쳐도 신수들과 마물들의 싸움은 신수들이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승한이 해결한 건 마기로 이루어진 먹구름뿐이었다. 땅 아래에 있는 황무지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신수들이 마물들을 밀어붙이게 되었다는 건, 애초에 신수들이 마물들보다 강하던, 땅 아래의 황무지가 마물들과 신수들에게 별다른 영향이 없었던 것이든 둘 중 하나였다.
승한은 그 중 후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땅 아래로 내려와 황무지의 모래를 직접 확인했다.
지금까지 땅 아래에서 느껴지던 마기.
승한은 그것을 황무지의 모래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땅 아래에 있는 무수히 많은 마물들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땅 아래에 있는 마기는 마물들도, 모래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승한은 발 밑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긴.
“젠장. 그거 말고는 뭐가 또 있겠어?”
승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것만큼 최악도 없었다. 승한은 뒤를 돌아봤다. 싸움이 지속되고, 땅에 피가 뿌려질수록 점점 더 황무지는 늘어가고 있었다.
‘먹구름은 어찌 했다지만…….’
땅은 어쩔 방법이 없었다. 늘어나는 황무지를 보며 승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승한은 [귀신]을 이용해 높게 뛰어올랐다. 빠르게 날아가서는 곧장 루이즈가 싸우고 있는 악마를 향해 검격을 날렸다.
승한이 싸움에 가세하자 악마는 당황하며 몸을 뒤로 피했다. 이미 루이즈에게 옆구리를 얻어맞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던 악마는 승한의 가세에 당황하더니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승한이 악마의 움직임을 바로 앞에서 막아섰다. 어느새 악마의 등 뒤로 돌아선 루이즈가 씩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일단 하나.”
퍼석-.
루이즈가 내지른 주먹에 악마의 머리가 으깨졌다. 이전 같으면 충격을 조금 주는 정도에서 그쳤겠지만, 지금의 루이즈는 온갖 장비로 근력을 높인 상태였다. 무엇보다 승한은 루이즈가 주먹을 내지른 순간에 그의 주먹에 성화의 힘을 입혔다.
루이즈의 파괴력과 성화의 힘이 더해졌다. 악마의 머리를 단숨에 깨뜨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그 힘, 역시 쓸 만하군.”
“잡담 나눌 시간 없습니다.”
승한은 다른 악마들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움직였다. 다행히도 천사들은 악마들을 상대로 잘 막아서고 있었다. 물론, ‘막아서는’정도에서 그쳤지만 말이다.
승한은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듀란달에는 성화를 머금고, 주위를 [올림포스]의 힘으로 장악해 나갔다. 천사들과 싸우고 있던 악마들의 시선이 모여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모여들었을 때에는 이미 승한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였다.
사아아아악-.
퍼석-!
악마들 한 가운데로 뛰어든 승한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듀란달에는 성화의 힘을 가득 머금고, 공간을 격해 수십의 악마들을 일일이 가격했다.
그 공격은 제법 유효했다. 성화의 힘과 더불어 아롤의 검술이 더해지자, 악마들의 가슴에는 같은 모양의 상처가 생겨났다. 뼈가 베어지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수십의 악마들에게 공통적으로 충격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인간!”
승한이 싸움에 끼어들자 악마들이 그를 노리기 시작했다. 천사들과 싸우고 있던 악마들마저도 말이다.
후욱-.
그 순간, 승한의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한 번 공격을 감행한 뒤 도망치는 승한의 등 뒤를 악마들이 쫒기 시작했다. 승한의 움직임이 느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악마들에 비해 느린 감이 있어서 금방 따라잡혔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승한 한 명만이 아니었다.
쨍-!
퍼퍼퍽-.
날아온 창이 악마들의 날개에 박혔다. 승한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악마들은 뒤쪽에서 천사들이 자신을 뒤쫒자 계속해서 승한을 쫒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몇몇 악마들을 제외한 다른 악마들은 계속해서 천사들과의 싸움을 감행했다.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악마들은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있던 승한이 스스로 나서자 기뻐 날뛰었다. 눈앞에만 나타나면 바로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승한이 수고를 덜어준 것이다.
“죽을 자리는 무슨.”
티티티팅-.
승한의 앞으로 성화의 구슬이 연달이 떠올랐다. 이미 몇 번이고 성화가 압축된 구슬의 힘을 맛보았던 악마들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몇 갈래로 흩어졌다.
“늦었어.”
촤아악-!
승한은 그것을 손으로 쏘아내지 않고 검으로 쳐냈다. 성화의 구슬은 듀란달에 베어지지 않고 야구공처럼 날아갔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사방으로 흩어진 악마들을 향해 하나씩 날아갔다.
“이런…….”
“젠장!”
콰콰콰콰쾅-!
성화의 구슬이 사방에서 폭발했다. 하나하나의 위력이 결코 만만치 않은 폭발이었다. 비록 이것만으로 악마들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겠지만, 꽤 충격은 주었을 것이다.
파악-.
아니나 다를까, 폭발 속에서 악마들이 하나 둘 손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 몸에 마기를 둘렀다. 그것으로 성화로부터 몸을 보호한 모양이었다.
“죽여버리겠다-!”
악마들의 텅 빈 눈동자가 붉고 검게 물들었다. 그들의 몸 전체는 조금씩 그을려져 있었다. 다른 불도 아니고, 성화의 불에 그을린 상처였다. 분명히 충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벤다.’
성화로 태웠다. 그 영향이 남아있다면, 단단한 몸뚱이도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승한은 왼 손에 들고 있는 방패를 앞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 방패에 [올림포스]의 힘을 가득 실었다. 동시에 주위에 넓게 퍼뜨려 놓았던 [올림포스]의 힘을 압축시켜 자신에게 달려드는 세 마리의 악마를 향해 집중시켰다.
쿠구구구구-.
[올림포스]의 힘이 악마들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짓눌렀다. 달려들던 악마들이 잠시 휘청거리더니 이내 승한을 향해 재차 달려들었다. 온 몸에 두르고 있는 마기가 파도처럼 승한을 향해 덮쳐왔다.
승한은 도망치지 않았다.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동시에 성화의 힘을 방패에, 그리고 온 몸에 둘렀다.
화아아아아악-!
마기의 해일이 승한의 몸을 덮쳐왔다. 악마들이 속으로 웃었다. 그들은 승한의 몸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직접 손을 써 숨통을 끊는 일만이 남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콰득-.
“크아아악-!”
마기의 해일을 뚫고 나온 검 한 자루가 악마의 가슴을 꿰뚫었다. 온 몸을 마기의 검은 안개로 휘감고 있던 승한은 성화의 불길로 그것을 정화시켰다. [올림포스]와 성화의 힘으로 악마들의 마기로부터 저항한 것이다.
일전과 달리, 승한은 하급 악마들의 마기로부터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올림포스]와 성화의 레벨을 한 단계씩 높인 상태였다. 그 덕분에 승한은 하급 악마들의 마기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 마기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겨 악마들을 향해 파고들 수 있었다.
‘벤다!’
승한은 악마의 가슴에 꽂아넣은 듀란달에 성화의 힘을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가슴 아래쪽의 결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올림포스]의 힘까지 실어서 말이다.
서걱-.
악마의 몸뚱이가 반으로 베어졌다. 뒤이어 두 마리의 악마가 승한을 덮쳤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승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꽈앙-!
악마의 위에서 주먹을 휘두른 루이즈가 그의 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다른 하나의 악마의 손은 승한의 방패에 손이 막혔다.
“역시 센데?”
루이즈는 승한이 악마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루이즈가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만큼, 승한 역시도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승한 스스로도 꽤나 놀란 부분이었다.
‘[성검]의 레벨이 오르기라도 했나?’
승한은 다른 능력들보다도 듀란달을 휘두르는데 있어서 이전과 차이를 느꼈다. 마치 이전에 [강신]을 통해 아롤의 검술을 따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승한은 스스로의 검술이 이전보다 훨씬 발달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아롤의 검술은 어디까지나 [성검]의 능력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성검]은 어디까지나 듀란달을 통해 아롤의 힘과 검술, 두 가지 모두를 가져오는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힘은 그렇다 치더라도 검술은 승한이 스스로 익혀나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강신]을 사용했던 영향일까? 승한은 아롤의 검술이 어느 정도 손에 익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전보다 성화의 레벨도 더 올랐고, [올림포스]와 [불굴의 육체]의 레벨도 올랐다. 그것이 바로 이전보다 수월하게 악마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성화의 태양에서 나오는 [광휘]로 인해 약해진 악마들.
승한은 최악의 상황이 오기 전에, 최소한의 조건은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루이즈의 역할도 꽤 컸고, 무엇보다 일개 개인이라고는 하지만 승한은 악마들 몇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승한은 루이즈와 힘을 합쳐 하나 남은 악마를 마저 쓰러뜨렸다. 몇 마리의 악마들을 유인해 처리한 승한은 다음 악마들을 향해 움직이려했다.
“무리하는 거 아닌가? 이주희 헌터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
“들었습니다.”
“그럼 무리하지 말고 조금만…….”
“무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승한은 멀리 펼쳐져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커지고 있는 황무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밑에, 어떤 녀석이 있을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