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7 / 0223 ----------------------------------------------
23. 죽은자
**
루이즈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넓직한 어깨와 분위기 등으로 같은 사람임을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주먹에 있는 건틀릿 등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루이즈가 맞긴 맞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방금 전 악마를 날려버린 일격을 보면 확실했다. 천사도 아니고 신수도 아니고, 헌터들 중에서 하급이라고는 하지만 악마에게 일격을 먹일 수 있는 헌터는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능력도 아니고 주먹으로 싸우는 헌터들 중, 승한이 아는 헌터는 루이즈 외에는 없었다.
“왜 그렇게 빌빌대지?”
루이즈의 목소리는 승한의 머릿속에 바로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전음구를 통한 말이 아니었다. 스테이지 속에서의 공간은 아무래도 모든 언어가 전음구처럼 의식이 바로 이해되는 모양이었다.
“저거 때문입니다.”
승한은 가까이 있는 성화의 태양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루이즈는 바로 옆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성화의 태양을 힐끔 바라보고는 물었다.
“저걸 네가 만들었나?”
“네. 덕분에 녹초가 됐지만요.”
루이즈는 그제서야 승한이 왜 그렇게 악마에게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만 하더라도 악마와 대등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승한이, 그 전보다 능력의 레벨이 더 높아졌을 텐데도 빌빌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는 루이즈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모습은…….”
“장비를 새로 맞췄다. 꽤 괜찮은 것들로 말이지.”
“장비를요?”
“그래. 덕분에 레벨은 별로 올리지 못했지만 말이지.”
루이즈는 검은 인영들을 쓰러뜨리고 획득한 타임 포인트를 가지고 능력의 레벨을 올리기보다는 새로운 장비를 맞추는데 주력했다. 승한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특별한 능력 없이 힘 하나로 괴물들을 쓰러뜨려온 루이즈에게는 단기적으로 빠르게 강해지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승한의 능력은 루이즈와는 다르게 신들에게서 빌려온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듀란달이라는 최고의 장비를 통한 아롤의 힘과 검술, 붉은 천사의 성화, [올림포스]의 방어력과 힘까지.
몇몇 장비 중에서는 1단계 능력의 레벨을 올려주는 효과를 가진 장비도 있었지만, 2단계로 각성한 능력의 레벨을 올려주는 장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히 단단하고 예리한 검이나 단단한 방패와 갑옷 정도를 사는 것이라면 타임 포인트가 아까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승한이 장비의 구매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이유였다.
승한이 따로 구매한 장비라고 해봤자 어느 정도 충격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 가죽 갑옷과 방어 능력에 추과 보정 효과가 있는 방패 정도. 그밖에 다른 장비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즈는 달랐다. 그는 [불굴의 육체]를 비롯한 힘 계열의 능력에 특화되어 있는 헌터였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강도와 경도를 지닌 건틀릿을 장비로 선택했다. 그것은 사용자의 근력을 더욱 높여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건틀렛 뿐만이 아니라 그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의 대부분은 사용자의 근력을 올려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루이즈가 갑작스럽게 비약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루이즈가 승한이 있는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새로운 장비 덕이리라.
‘장비의 선택이라… 나와는 방향이 다르군.’
몇 가지 장비를 통해 루이즈는 이전보다 훨씬 비약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승한이 루이즈처럼 대량의 타임 포인트를 소모해 장비를 맞추었다고 해도 저렇게 강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능력의 성향 차이. 루이즈는 그것을 이해하고 자신이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었다.
‘도움이 되겠어.’
승한은 루이즈의 존재를 악마와의 싸움에 ‘조금’ 도움이 될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이전 싸움에서도 조금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루이즈는 잠깐의 시간벌이,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악마 하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일지도 모른다.
“옵니다.”
“알아.”
루이즈가 몸을 휙 돌렸다. 주먹을 휘두르는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신인지는 몰라도 루이즈와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즈는 악마를 정면에서 막아섰다.
꽈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곰의 힘이 담긴 루이즈의 주먹과 짙은 마기가 어려있는 악마의 손이 부딪혔다. 악마는 루이즈에게 얻어맞아 오른쪽 갈비뼈가 함몰된 채 소리쳤다.
“비켜라-!”
“네가 그렇게 만들어 보던지.”
꽝, 꽈꽈광-!
루이즈는 연신 주먹을 뻗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복싱을 배운 티가 났다. 일 초에 몇 번씩 뻗어지는 주먹은 한 번 한 번이 어지간한 바위도 가루로 만들어버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승한은 루이즈를 돕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이즈의 외침에 우뚝 멈춰섰다.
“끼어들지 마!”
루이즈는 악마와 정면에서 싸우며 씩 웃고 있었다. 아무리 루이즈라지만 그는 악마를 겨우 막아서고 있을 뿐,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넌 몸이나 얼른 회복해라. 그리고 나중에나 도와라.”
“그래도…….”
“지금은 도와줘 봤자 도움도 안 돼. 그리고 네가 만든 저것 덕분에 이놈들, 꽤 약해진 모양이거든.”
루이즈는 승한이 만든 성화의 태양을 힐끗 바라봤다. 확실히 성화의 태양에 가까이 다가온 악마는 이전보다 약해져 있었다. 성화의 태양에서 뿜어진 [광휘]의 빛은 악마에게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그가 뿜어낸 마기를 조금이나마 정화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니 말이다.
승한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악마를 루이즈에게 맡기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전음구를 꺼내 손에 쥐었다.
“주희야, 다시 한 번 회복 능력을 가진 헌터들을 모아 줘.”
승한의 말에 다른 헌터를 치료하고 있던 주희가 깜짝 놀라더니 조금 뒤에 대답했다.
-승한 오빠에요?
“그래. 시간 없어. 이번에도 급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 한다. 성화의 태양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악마가 손을 쓰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승한이 그것을 지킬 힘이 없어 루이즈에게 맡겨놓았지만, 그 혼자서 악마를 무사히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그래서 승한은 주희를 통해 미리 회복이 가능한 헌터들을 모아달라고 한 것이었다.
승한은 다시금 주희를 비롯한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승한의 부탁을 들은 주희가 헌터들을 모아놓고 있어서 바로 몸을 회복하면 되었다.
“끄럼, 시작합니다.”
주희와 에밀리는 비롯한 헌터들이 다시금 승한의 몸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숨이 차서 어깨로 숨을 쉬고 있던 승한의 호흡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몸의 피로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몇 분 뒤, 이전처럼 완벽하지는 않아도 승한은 다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됐어.”
승한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빠르게 힘을 사용하고 몸을 회복시키는 것을 반복한 것은 처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최근 들어서 성화를 마음껏 퍼부으며 지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오빠, 잠깐만요.”
그 때, 주희가 승한에게 다가왔다. 시간이 없는 승한은 그녀를 무시하려했다.
“나중에 이야기…….”
“너무 그렇게 무리하다가 큰일나요. 진짜에요!”
주희의 말에 승한이 잠시 멈춰섰다. 조금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 들었다.
“무슨 소리야?”
“미국에서 실험이 있었어요. 헌터들이 사용하는 능력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요. 한 번 힘이 바닥을 치고 피로를 느낀다는 건, 조금씩 몸이 망가진다는 의미라고요.”
주희의 말은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승한은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몸이… 망가져?”
“네. 오빠도 알다시피 우리가 사용하는 힘은 신의 힘을 빌려온 것이에요. 그 힘을 가능한 많이 받아들이고, 몸에 부담을 줄여주는 능력이 바로 [불굴의 육체]고 정신적인 부담을 줄여주는 능력이 [불굴의 의지]에요. 하지만 그 능력의 레벨을 높였음에도 다른 능력을 사용하는데 부담을 느낀다는 건, 그 힘을 사용함으로서 몸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승한은 손을 들어 주희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점점 말이 더 길어지고 있었다.
“미안.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승한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아직까지도 루이즈가 싸우고 있었다.
물론, 주희의 말이 신경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능력을 사용하고, 피로가 느껴진다는 것이 몸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징조라면 지금껏 승한은 몇 번씩이고 몸을 망가뜨려 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그래, 어쩔 수 없었다. 몸이 조금 망가진다고 해도 지금 당장 승한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다가는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니까. 무엇보다 승한은 모든 헌터들이 자신의 한 몸을 아끼고자 나서지 않게 되면, 이 세상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승한은 높은 곳에서 싸우고 있는 루이즈와 악마를 보며 손을 뻗었다. 힘이 다 회복되었고, 성화의 태양을 떠올린 이상 힘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이제부터 하나 둘씩 악마를 죽이면 그만.
쿠구구구-.
승한은 루이즈와 싸우고 있는 악마를 비롯해 다른 악마들 모두에게 [올림포스]의 힘을 사용했다. 세밀하게 힘을 사용해, 루이즈와 천사들에게는 힘의 사용을 피하고 악마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범위를 줄인 것이었다.
[올림포스]로 짓누르고, 성화로 태우고, 듀란달로 벤다. 이것이 승한이 가진 능력의 전부였고, 싸우는 방식이었다.
성화의 태양은 여전히 존재했다. 승한이 만든 성화의 태양 덕분에 전황은 서서히 뒤바뀌고 있었다. 신수들이 마물들을 밀어내고, 헌터들 역시 한결 싸움이 편해진 상태였다. 천사들도 서서히 악마들과의 싸움에 저울주를 맞춰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승한의 힘이 개입했다.
‘이길 수 있다.’
그 생각이 들었을 무렵, 승한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단 하나, 승한이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승한은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가 땅 아래의 황무지를 바라봤다.
‘저 황무지는 왜 사라지지 않지?’
불길함에 승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하늘에 있는 먹구름은 성화의 태양에 정화되어 사라졌지만, 땅 아래의 황무지는 여전했다. 먹구름과 황무지가 마물들과 악마들의 상징임을 생각해 보면 여전히 지형적인 이점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은 마기로 이루어진 먹구름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로인해 그 아래에 있는 마물들과 악마들은 힘을 얻고, 반대로 신수들과 천사들은 힘이 약해졌다.
그렇다면, 땅 아래의 황무지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승한은 설마 하는 생각에 땅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